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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도관.
향화객들이 돌아가고 어둠이 내릴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갔건만 도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어둠 속에 경계를 서는 자들은 변복을 한 금군의 고수들이다.
잠시 후 한 사람이 찾아왔다.
강소군이다.
약속이 되어 있기라도 한 듯 한 사람이 다가가 강소군을 안내하였다.
“이쪽입니다.”
허리를 숙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젊은 내관이 내실로 안내하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강소군이 내실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내실.
한 사람이 벽에 걸린 족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족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방 안에 그 말고는 딱히 관심을 둘 게 없어 보는 게 분명했다.
족자에는 용과 구름, 그리고 천계의 풍광이 그려져 있었다.
그 사람은 강소군이 들어서자 이내 돌아섰다.
기다리고 있던 이는 젊은 황제 주첨기였다.
강소군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가볍게 예를 취했다.
“쓸데없는 예는 거둬라. 너는 애초에 나를 존중할 생각도 없지 않았더냐.”
주첨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손을 저었다.
강소군은 그러거나 말거나 예를 마치고 담담히 주첨기를 응시하였다.
“네가 더 이상 강휘로 살지 않겠다고 하더니 경성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주첨기가 핀잔을 주었다. 지난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부모의 죽음에 대해 몰랐을 때 이야기다.
그러나 강소군은 구구절절 말을 이을 생각이 없었다.
“강휘로 해야 할 일이 남았더군요.”
“그래, 사람은 태생을 벗어날 수 없다. 너는 어찌 됐든 내 외사촌 아우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
주첨기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황실의 일원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
“숙부들이 내 자리를 노리는 모양인데. 흥! 어림없는 소리. 그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주첨기가 가만 앉아 있지 못하고 내실을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 찾아왔다. 천황성의 사자라더구나.”
주첨기가 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다.
「천자는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
“감히!”
주첨기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까지 쥐었다.
“발칙한 무리가 짐을 겁박하다니.”
젊은 황제는 야망이 컸다.
그런데 등극하자마자 잇달아 도전을 받으니 분을 참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부황은 법치를 강화하고 권문세가와 호족의 권력을 약화시켜 백성들에게 살길을 열어 주려 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일 년도 채우지 못했지만 죽은 황제는 그 짧은 기간 여러 가지 개혁을 하였다.
“나는 부황의 뜻을 이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가로막는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젊은 황제의 눈에서 분노가 불길처럼 일었다.
“죽일 놈들!”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해 보시죠.”
강소군이 침착한 목소리가 젊은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혔다.
젊은 황제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의를 할 사람이 없구나.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돌아가신 부황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 것 같구나.”
젊은 황제는 고심하다 잠행을 나와 강소군을 부른 것이다.
“천황성의 사자란 놈은 뻔뻔하게도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하더구나.”
다시 눈에 분노가 어렸다.
“천황성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면 일 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강소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권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주첨기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가 얼마나 황위를 원했는지 강소군은 잘 안다. 결국 그 자리에 올랐는데 역도의 무리가 위협을 하니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주첨기가 탄식을 하였다.
“그놈은 금군이 지키고 있는 황궁을 무인지경으로 들락날락하였다. 내통하는 무리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첨기는 천황성의 경고보다 그 사자가 지척까지 왔다는 데 더 충격을 받은 듯했다.
사자가 자객이었다면 그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강소군은 백정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내가 믿을 건 너밖에 없구나. 천황성이라는 놈들을 잡아다오.”
주첨기가 금패를 하나 내밀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그려진 패다.
“이 금패는 황제를 상징한다. 황제가 그 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네게 전권을 주겠다.”
강소군이 금패를 보다 입을 열었다.
“형님이 나를 믿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주첨기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올랐다. 강소군이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너와 나는 함께 자랐다. 태후전에서 같이 뛰놀았지. 내가 아는 너는 적어도 뒤를 노리는 성품은 아니다.”
주첨기의 목소리에 절실함이 깃들었다.
주첨기는 한왕과 조왕을 상대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런데 갑자기 천황성의 사자가 나타나자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 주위에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하니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소군은 잠시 생각했다.
부모와 진운초의 죽음을 밝히려면 황궁 주위의 권력을 파헤쳐야 한다.
강소군은 천황성이 부모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잠시 젊은 황제와 한배를 타는 게 나쁘지 않았다.
“좋습니다. 다만 일을 마친 후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 네가 원하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들어주겠다.”
“아닙니다. 그때 가서 말씀드리지요.”
강소군이 금패를 받았다.
젊은 황제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다 곧 매서운 눈초리로 말했다.
“오늘부터 경성에 죽음이 드리워질 것이다. 혼란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저택을 마련해 줄 것이니 그곳에 있는 게 어떠냐?”
주첨기는 모종의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황제가 분을 품고 작정을 하였으니 피바람이 불겠구나.’
“형님과 저는 오늘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무관하게 지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강소군이 말했다.
자신이 천황성을 좇는 걸 노출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머물 곳은 제가 구하겠습니다. 자연 아시게 될 것이니 우선은 한왕을 상대하는 데 전념하시지요.”
***
새벽어둠이 걷힐 무렵 경성에는 새로운 어둠이 밀려왔다.
“으악! 살인이다!”
황궁에서 내관 하나가 죽었다.
그 죽음을 기점으로 경성 전역에 죽음의 물결이 퍼져 나갔다.
자객의 무리가 밤을 타고 죽음을 몰고 다녔다.
어느 쪽이 누구를 죽였는지 알 길이 없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고 죽인 자들은 종적을 감췄다.
어둠이 내리면 길거리에 인적이 끊어지고 날마다 초상 행렬이 이어졌다.
“시절이 너무 수상하니 더 이상 경성에 머물기 어렵군요.”
남궁우가 경성을 떠나 남궁세가로 돌아간다며 찾아왔다.
“강남에 오면 꼭 들러 주세요. 우리는 지기잖아요.”
남궁령이 못내 아쉬워하였다.
남궁세가가 떠난 뒤 강소군은 작은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
“호부에서 봉직하다 퇴직한 윤지평이라는 관리가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윤지평은 지병으로 사람들 앞에 나오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 합니다.”
강하와 강란 남매는 강소군이 찾아냈던 중급관리의 저택을 감시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그 집을 드나드는 상인이 부쩍 늘었습니다.”
“강호에 하오문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을 찾을 수 있나?”
“정보가 필요하시면 대정무각에 요청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대정무각 역시 감시를 받고 있을 것이다.”
“하오문은 기루나 점집, 도박장과 같은 곳에 퍼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경성에도 분명 하오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강란이 말했다.
“접촉할 수 있는 방법만 알아봐 주게. 내가 직접 만날 것이네.”
“알겠습니다.”
강하와 강란 남매가 나간 뒤 강소군은 성장(盛裝)을 하였다.
“이렇게 입으시니 정말 명문가의 주인 같으십니다.”
장오가 강소군을 보고 감탄하였다.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을 두르고 옥패와 패검까지 찬 모습은 권문세가의 주인다웠다.
“마차와 호위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강소군은 화려한 마차를 타고 호위를 넷이나 거느리고 윤지평의 저택으로 갔다.
윤지평의 저택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문첩을 건네게.”
장오가 대문을 두드리자 하인이 나왔다.
“강부의 공자께서 주인을 만나고자 하네.”
장오가 방문첩을 건네자 하인이 마차를 살펴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대문이 열리고 서른가량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왔다.
강소군이 마차에서 내려 들어가자 사내가 읍을 하며 말했다.
“윤가의 장남 윤석중입니다. 남경 강부에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요.”
“경성에 올라온 김에 선친과 연분이 있던 분들을 찾아뵙고 있네.”
“선친이라시면 강 국공 아니십니까? 제 부친과 강 국공이 아는 사이였습니까?”
윤석중이 놀라 되물었다.
윤지평은 호부의 시랑에 올랐으나 곧바로 퇴직을 하였다.
강 국공과 같은 고위층과 어울릴 신분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윤 시랑을 뵙고 이야기하지.”
윤석중이 눈알을 굴렸다.
“죄송하오나 부친께서는 병환 중이라 외인을 만나 뵙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병문안을 온 것이네. 이리 보약도 가져왔다네.”
강소군이 돌아보자 장오가 나무함을 들어 보였다.
윤석중은 당황하였다.
“어찌 됐든 안으로 드시지요.”
윤석중이 직접 접객당으로 안내하였다.
강부의 주인은 황제의 외사촌 아우다. 관직은 없으나 신분이 극히 높아 윤씨 집안으로서는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시비들이 차를 내오자 윤석중이 정중하게 읍을 하고 말했다.
“실은 부친께서는 관직을 떠나신 후 일체 외인과의 교류를 끊고 계십니다. 시문을 벗 삼아 야인의 삶을 지내고자 하시기에 병이 깊다고 한 것뿐입니다.”
“그런가? 윤 시랑이 그리 고적한 삶을 즐기는데 방해를 한 셈이군. 하지만 기왕에 왔으니 뵙기를 청하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윤석중이 접객당을 나갔다.
윤지평은 자신의 서재에 있었다.
“그가 선친을 들먹이며 나를 보고자 한다고?”
반백의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문사건을 쓴 윤지평은 청수한 문사 그 자체였다.
윤지평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가 찾아온 것은 우연도 병문안도 아니다. 이미 우리의 정체가 발각된 것일 게야.”
“어찌해야 할까요?”
“그때 일이 벌어졌을 때 여기를 포기했어야 했는데 미련이 남아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구나.”
윤지평이 자책을 하였다.
늙은 내관을 죽여 시신을 무너진 그의 집에 둔 걸로 마무리가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 걸 깨달은 것이다.
“생각보다 집요하군. 게다가 그는 고수다. 이제라도 여기를 포기해야겠구나. 아깝게 됐군.”
그때 문밖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아까운 것을 굳이 포기할 필요가 있나?”
강소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게 무슨 짓이오?”
윤석중이 놀라 소리쳤다.
“함부로 남의 집 내실까지 들이닥치다니. 아무리 강부의 권세가 높다지만 이래도 되는 거요?”
강소군은 윤석중을 무시하고 윤지평을 향해 말했다.
“죽은 내관은 자신의 집을 폭파하던데 당신은 무슨 수를 쓸지 궁금하군.”
그때까지 앉아 있던 윤지평이 천천히 일어났다.
“강부 사람들은 쓸데없는 데 호기심이 많아. 그래서 죽음을 자초했는데 그 후손마저 스스로 화를 부르니 안타까운 일이지.”
놀랍게도 윤지평의 전신에서 예리한 살기가 퍼져 나왔다.
그는 한낱 문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오기를 잘했어.”
강소군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윤지평을 노려봤다.
“네가 들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윤지평이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