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당신은 십대고수의 자격이 없다.’
구연강이 돌연 마지막 초식으로 필사(必死)의 살수를 쓴 데는 강소군의 말에 대한 자신도 모르는 반발심이 들어 있었다.
그와 같은 고수가 자격지심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인이 추앙하는 천하사패의 주인임에도 십대고수 서열에서 오 위로 평가받고 있다.
자존심이 극히 강한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서열이다. 그러나 그건 그가 어찌한다고 하여 바뀌는 게 아니다.
천하의 평가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한왕의 면전에서 그는 자신의 상대는 셋뿐이라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세간의 평가를 뒤엎을 수는 없다.
결국은 그가 자신의 윗서열을 쓰러뜨려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는 십대고수의 서열 일 위 비천신검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천하일통을 이룬 후 비천신검 상관무영을 꺾어 세력으로도 무인으로도 천하에 우뚝 서는 그날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강소군은 아예 자신에게 십대고수의 자격이 없다고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의 격장지계라고 넘기기에는 강소군이 지닌바 무공이 간단치 않다.
‘저놈은 십대고수와 겨뤄 본 적이 있는 것일까?’
짧은 시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 생각이 끝내 그의 진신절기를 뽑아내도록 한 것이다.
구연강의 검에는 수십 년 고련한 내공이 담겨 있다.
검과 구연강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내공 줄기로 연결이 되어 있다.
상대가 피하는 순간 폭사되어 갈 것이고 검에 담긴 응축된 내공이 시신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다.
구연강으로서 아쉬운 것은, 이기어검이라지만 이제 입문을 하여 아직 자유자재로 허공을 누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검에 내공을 담아 보내고 이를 조정하는 것까지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경지다.
하지만 이 한 초식을 막을 사람은 세상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건방진 젊은이도 마찬가지.
구연강은 그렇게 생각했다.
검을 출수하고 난 뒤 잠시 후회했지만 어차피 한왕을 처리할 계책은 많았다.
‘건방진 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 대가다.’
구연강은 자식을 죽인 것보다 자신을 능멸한 것에 더욱 앙심을 품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사실 구연강의 손에서 벗어난 검이 강소군에게 다가가기까지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검이 느릿느릿 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보다 빨랐다.
강소군은 구연강이 검을 보더니 한 발을 길게 빼며 몸을 낮추고 창끝으로 지면을 찔렀다.
-툭!
강소군이 창날로 조약돌 하나를 들어 올렸다.
가벼운 돌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마치 바위라도 들어 올리듯 강소군의 전신이 떨렸다.
창대가 대어를 낚은 낚싯대처럼 휘었다.
누가 보면 돌 하나에 천근만근의 무게가 실린 듯했다.
강소군의 관자놀이가 불룩 튀어나오고 양팔에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퉁!
강소군은 어느 순간 서서히 들어 올리던 조약돌을 퉁겨 올렸다.
조약돌은 마치 구름을 타고 오르듯 천천히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구연강의 검이 조약돌과 정확히 부딪쳤다.
-쾅!
검과 조약돌이 부딪치자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벼락이 친듯한 굉음과 함께 엄청난 기파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장막에서 지켜보던 이들까지 양손을 내저어 기파를 막아야 할 정도였다.
마치 화탄이 터진 것만 같은 기파가 사방으로 쭉쭉 퍼져 나갔다. 강가의 모래와 조약돌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모래바람이 사라지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망연자실 쳐다보는 구연강과 창을 비껴들고 의연히 서 있는 강소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
모두가 침묵하였다.
한왕조차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두 사람을 노려볼 뿐이다.
“세 초식이 끝났군요.”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구연강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약돌 하나에 천근의 경력을 담아?’
물론 조약돌에 실린 경력은 자신의 검에 담긴 경력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연강은 검에 만근의 경력을 담았다.
서로 비등했다면 구연강의 검도 깨졌을 것이다.
하지만 조약돌에 담긴 경력은 검을 깨뜨리긴 어렵지만 그에 담긴 만근 경력을 폭사시킬 정도는 되었다.
대략 천근의 경력이랄까.
실로 교묘한 수였다.
조약돌 하나를 허공에 띄워 만근의 경력이 담긴 검을 막은 것이다.
만일 창으로 검을 쳤다면 그 순간 경기가 폭발하며 창대를 타고 흘러가 강소군의 전신을 난타했을 것이다.
구연강은 강렬한 살인 충동을 느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강소군을 죽이지 못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앞길을 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동시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을 후회하였다.
한왕이나 수하들만 없다면 자신의 전력을 다해 강소군을 죽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천하사패 천무방주다.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말을 많은 이가 보는 앞에서 뒤집을 수는 없었다.
강소군은 구연강의 심기가 이미 깨졌음을 알았다.
강소군이 몸을 돌려 나룻배 쪽으로 갔다.
“멈춰라.”
한왕이 일어나서 장막을 나왔다.
“네가 존장에 대한 예도 없이 그냥 가려 하다니. 참으로 방자하구나.”
강소군이 힐끔 한왕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나룻배에 올라탔다.
“저런 건방진!”
한왕의 옆에 있던 장수 하나가 흥분하였다.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한왕에게 말하고는 달려왔다.
“네가 약간의 재주가 있다고 안하무인이구나!”
때로는 눈으로 보고도 실력의 차를 가늠하지 못하는 인간도 있다.
이 장수가 그랬다.
내공의 오묘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강소군이 잔재주로 구연강의 검을 막은 것이라 봤다.
애초에 구연강의 검 자체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왕의 심복으로 주군의 체면이 상했으니 당연히 나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려나갔다.
장수가 달려나가다 나룻배에 이르렀을 때, 엄청난 기합 소리와 함께 거구를 허공에 띄웠다.
“어서 왕야께 무릎을 꿇어라!”
장수가 대도를 내려치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역시 한 수가 있었기에 믿고 나선 것이다.
강소군이 나룻배 위에서 연달아 창을 내밀었다.
-땅! 따당! 땅!
강소군이 선 선두가 강물에 처박힐 듯 아래로 내려갔다.
장수가 연달아 삼도(三刀)를 내리쳤고 강소군은 일일이 받아쳐 올렸다.
장수는 강소군의 삼창(三槍)에 나룻배로 내려서지 못했다. 허공에서 한 번 몸을 뒤집어 나룻배를 넘어섰다.
-풍덩!
장수는 허리까지 강물에 빠졌다.
그 옆으로 강소군의 나룻배가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강소군이 나룻배 선두에 서서 장수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려 한왕을 봤다.
“안 돼!”
한왕은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퍼억!
강소군의 창이 반원의 궤적을 그렸다.
중간에 장수의 머리가 걸렸다.
장수의 머리가 하늘 높이 날아 한왕의 발치에 떨어졌다.
“저 새끼가!”
한왕이 극도로 분노하여 고함을 질렀다.
강소군은 한왕이 보는 앞에서 아끼는 장수의 목을 쳐 보냈다.
다른 장수들이 몰려나갔으나 강소군의 나룻배는 이미 강을 따라 내려가는 중이다.
***
-쉭!
위응환의 비도가 날았다. 일직선이 아니라 비스듬히 휘어 날아갔다.
“큭!”
진마대의 조장으로 보이는 자는 방비를 하고 있었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어깨로 받아냈다.
“나는 괜찮다! 포위를 풀지 마라!”
조장은 비도를 뽑아내며 무인들을 독려하였다.
적은 처음에는 대여섯 명이었으나 순식간에 이십여 명으로 불어났다.
구양수의 말이 맞았다. 장강을 따라 천무방의 이목이 쫙 깔려 있었다.
진마대원들은 잘 조련된 무인들이었다.
장무강 일행의 실력도 이미 알고 있는 듯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포위만 하고 있을 뿐이다.
뚫고 나가려 하면 합심하여 저지하였다.
호각 소리가 연신 울리고 진마대가 아닌 천무방도들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천무방도들은 진마대의 뒤를 받치고 포위망을 더욱 두텁게 쌓아 갔다.
고수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장무강이 상황을 살폈다.
진마대는 장무강 일행이 강을 건너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 쪽을 막고 있는 인원이 두 배는 많았다.
뚫고 나간다고 해도 배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일단 후퇴해야겠다.’
일행은 다섯이지만 모두 고수다.
진마대가 천무방의 정예 무력대라지만 빠져나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산동삼호는 지난 몇 달 격전을 치르며 실전 감각을 되찾았다.
중랑과 연화심 또한 괄목상대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의 성취를 이뤘다.
적들은 강 쪽으로 가는 건 필사적으로 막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뒤쪽은 허술하였다.
아마도 강을 건너는 걸 막은 다음 추적대를 편성해 서서히 죄어 가는 전략을 쓸 모양이다.
-휘이익!
멀리서 소성이 터졌다.
진마대주나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고수가 오는 모양이었다.
“일단 뒤로 빠진다!”
장무강이 소리쳤다.
심마백이 창을 앞세워 길을 뚫었다.
그 뒤 중랑과 연화심이 측면을 막고 장무강과 위응환이 후미를 맡았다.
달려들던 적들은 위응환의 암기술에 가까이 다가오지를 못했다.
장무강은 후미에서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며 길을 잡았다.
심마백이 폭풍처럼 창을 휘두르며 질주하자 점차 진마대와의 간격이 벌어졌다.
진마대는 섬멸이 아니 추적을 택한 듯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장무강은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심마백이 멈췄다.
저 앞 관도가 막혔다.
수십 기의 기마에 탄 이들은 갈의 무복을 입은 장한들이었다.
건장한 체구에 드러난 팔뚝은 구릿빛으로 빛나는 이들이었다. 갈의 무복 가슴팍에 마(馬)자가 쓰여 있었다.
“마가보로구나.”
구양수의 언질이 떠오른 장무강이 관도를 막아선 이들의 정체를 알아봤다.
마가보는 장무강 일행을 발견하자 미친 듯이 달려왔다.
선두에 한 여인과 두 사람이 나란히 달려왔다. 아마도 마씨 부인과 마가보의 고수임이 분명했다.
‘좋지 않군.’
앞은 마가보가 막고 있고 뒤는 진마대가 쫓아오고 있다.
“구양수 그놈이 헛소리를 한 게 아닌 모양인데요.”
심마백이 장무강을 보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장무강이 문득 연화심을 향해 물었다.
“연 낭자, 전장에서 최고의 병법이 뭔지 아시오?”
“네?”
연화심은 이 상황에서 뜬금없이 물어오니 반문하였다.
“삼십육계 줄행랑이라고 들어 봤소?”
연화심이 미소를 지었다.
앞뒤로 적인데 오른쪽은 들이고 왼쪽은 야산이다. 그 산 너머 계속하여 야산이 펼쳐지는 지형이다.
“저리로 가야겠군요?”
“맞소, 갑시다.”
장무강 일행은 관도를 버리고 야산으로 올라갔다.
중턱쯤 올라갔을 때 마가보와 진마대가 아래 당도했다.
적들이 곧장 추격해 올라왔다.
“이리로!”
심마백이 앞장섰다.
전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심마백이다. 야산을 어떻게 타야 적의 시선을 피하는지, 때로는 매복을 하여 뒤쫓는 적을 칠 수 있는지 머릿속에 훤하다.
심마백은 칠부능선을 따라 산을 돌아갔다.
큰 나무가 없는 야산이건만 적들은 장무강 일행의 종적을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진마대원 중에 추적술에 능한 자가 흔적을 찾아가며 쫓는데 아무래도 더디었다.
어느새 어둠까지 내리고 있었다.
“그 계집은 반드시 찾아내야 돼. 내가 직접 죽여야 한다고!”
앙칼진 중년 여인의 목소리만 야산에 울려 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