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93화 (93/250)

93

강소군을 실은 나룻배가 강가에 닿았다.

나룻배를 젓는 이는 황오, 아니 이제는 성을 바꾼 장오였다.

장오가 먼저 내려 땅 위로 배를 끌어올리자 강소군이 배에서 내렸다.

잠시 장막 쪽을 보던 강소군이 천천히 걸어왔다.

구연강이 장막 앞에 서서 기다렸다.

천하사패의 주인이자 십대고수가 나와서 기다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드문 일이다.

그만큼 구연강은 강소군에 대해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저 젊은 놈이 누구기에 구 방주가 저리 예의를 차리는 거지?’

한왕 주고후는 당연히 이상하게 여겼다.

스물 대여섯 정도로 보이는 사내는 명문가 귀공자 같았다.

언뜻 보았을 때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듯했다.

주고후는 십여 년 전 태후전에서 강소군을 본 적이 있었으나 당시 어린아이가 눈앞의 청년이라고 연결짓지 못했다.

구연강이 다가오는 강소군에게 말을 걸었다.

“약속을 잊지 않았군.”

강소군은 묵례로 답을 하고 장막 안을 보았다.

“오늘 비무의 공증인으로 한왕을 모셨네.”

구연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소군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장막으로 들어갔다.

“한왕야를 뵙습니다.”

주고후가 강소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혈마라고 하기에 피에 물든 마인인 줄 알았는데 이리 준수한 귀공자라니 놀랍군.”

주고후가 아무래도 낯이 익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구연강이 들어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르시겠습니까? 외숙부와 조카가 너무 오랜만에 만난 모양입니다.”

“조카?”

주고후는 그제야 강소군이 누군지 알아챘다.

“강휘로구나! 네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리 장성하였을 줄은 몰랐군.”

“마지막으로 뵌 지가 십 년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네가 구 방주와 손속을 겨룬다고?”

“구 방주가 삼초지약(三招之約)을 종용하기에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구 방주는 천하 십대고수로 적수를 찾을 수가 없는 고수다. 그런데 네가 그의 상대라니 놀랍구나.”

주고후는 정말 놀란 듯 보였다.

오랫동안 황실의 제일 고수는 주고후였다. 타고난 신력이 극히 뛰어난 데다 싸움을 즐기는 성정, 그리고 수많은 영약 덕분에 황족으로서는 드물게 초절정고수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일류 무인이 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적지 않다.

끊임없이 수련을 해야 하니 술과 여자나 잡기를 가까이할 시간이 없다.

일반 무인이 절정에 이르려면 온종일 무공 수련에 전념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명가는 영약이나 기타 여러 가지 도움을 얻어 남보다 유리한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자신을 절제하고 무공수련에 뜻을 두어야 절정의 경지를 밟을 수 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주고후는 강소군이 절대고수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황실이나 권문세가의 자식들이 어찌 사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앞의 음식도 집어 줘야 먹는 족속들이다.

‘구 방주가 나를 놀리려는 건가?’

주고후가 구연강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는 뜻이다.

“한왕야께서는 황실의 고수 아니십니까? 이제 황실의 젊은 고수가 나타났으니 그 실력을 평가해 보시라고 모셨습니다.”

구연강이 주고후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며 말했다.

“으음. 그런 뜻이었군.”

주고후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주고후에게 강소군은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에겐 최대의 적이었던 강 국공의 아들이다.

‘이 녀석을 내 편으로 삼으라는 뜻인가 보군. 구 방주가 괜한 짓을 했어. 이놈은 애초에 출신이 나와 맞지 않는데.’

주고후는 구연강의 의도를 자기 좋은 대로 오해하였다.

같은 황실의 일원이니 거사를 앞두고 포섭하라는 뜻으로 여겼다.

주고후가 강소군을 보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는지 거만하게 말했다.

“네가 변방 전장에서 군사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더니 절치부심한 모양이구나. 구 방주가 높이 평가하여 삼 초의 가르침을 내릴 모양인데 최선을 다해 봐라.”

사람의 속을 후벼 파는 비수 같은 조롱이 섞여 있었다.

장막 안팎에 선 한왕부의 고수들 얼굴에 비웃음이 흘렀다.

강소군은 담담하게 받았다.

“소문이 그리 난 모양이군요. 한왕께서 염려하실 일은 아니니 편히 구경이나 하시지요.”

주고후의 안색이 굳어졌다.

‘건방진 놈.’

구연강은 두 사람 사이에 날인 선 말이 오가자 내심 만족했다.

구연강은 강소군의 무위에 대해 여러 경로로 보고를 듣고 분석을 하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고 판단하였다.

사실 그에게 올라간 보고는 수많은 변명과 과장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강소군과 결사적으로 싸우다 아깝게 분패했다는 보고에서부터 기습을 하여 치명상을 입혔다는 공적까지.

사실 그대로 적은 내용은 많지 않았다.

전장에서 장수들이 올리는 보고와 다를 바 없으나 유독 강소군에 대해서는 거짓이 많이 섞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천무방 고수들이 너무나 무력하게 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포장하기 위해 강소군이 간신히 살아 도주하였다고 적곤 하였다.

장막 한쪽에 선 신기수사 조개량만은 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강소군의 무위를 거의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직접 천무방을 이끌고 추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구 방주가 치명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전권을 쥘 기회가 올지도 몰랐다.

안타깝게도 조개량 또한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강소군이 천무방 무력대나 천무십객과 싸울 때는 체내 잠력을 서너 배 끌어올리는 혈룡기가 있었다.

인간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당시라면 구연강 역시 삼 초 만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혈룡기가 사라졌다. 혈룡기에 의해 깨어난 체내 잠력을 금단진공을 통해 내공으로 끌어들이고 있으나 과거와 같은 초인(超人)의 경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강소군이 구연강과의 삼초지약을 순순히 승낙한 것은 자신의 무위를 가늠하기 위함도 있었다.

따로 비무대를 설치할 것도 없었다.

강소군과 구연강은 강가로 나가 서로 대치하였다.

강소군은 창두를 아래로 비껴 거꾸로 든 채 왼발을 반보 내민 자세로 섰다.

마치 검수의 기수식 같았다.

구연강은 담담하게 강소군을 바라보다 검을 뽑았다.

“오랜만에 검을 뽑게 만드는군. 이 검에 삼도문 삼형제가 죽었다.”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건가?”

“당신은 십대고수 자격이 없소.”

구연강의 눈썹이 꿈틀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강소군은 답을 하지 않았다.

구연강은 삼도문 삼형제의 죽음을 거론하여 강소군을 동요케 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흥분하고 말았다.

‘이, 이놈이….’

삼도문 삼형제를 죽일 때 천살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강소군의 눈에 가득 찬 비웃음은 마치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놈이 그걸 아나?’

고수 간의 싸움에서 심리상태는 크나큰 변수가 된다.

강소군은 구연강이 삼도문 삼형제의 죽음을 들먹인 격장지계를 지적한 것이었으나 구연강은 오해하였다.

강소군은 유리알처럼 맑은 평정심을 유지하였으나 구연강은 한 번 든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먼저 출수하겠습니다.”

강소군이 한마디 하더니 등 뒤에서 창을 돌리고는 그대로 던지듯 찔렀다.

-쉭!

경쾌하기 짝이 없는 일수였다.

구연강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자연스럽게 검을 내밀었다.

천수무흔.

구연강의 별호다. 대개 권법이나 금나수의 달인에게 붙는 별호인데 검호인 그에게 붙었다는 건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어림없다.”

구연강이 툭, 내뱉고는 검을 비껴 세워 창대를 쳐내고는 곧바로 사선으로 쳐 내렸다.

-쉬이익!

내려치던 검이 중간에서 꺾이더니 갑자기 변화를 부렸다. 순식간에 십여 개의 검영이 나타났는데 그 모두가 검의 실체로 보였다.

놀라운 것은 검과 검 사이에 손그림자가 번뜩인다는 것이다.

마치 손으로 강소군을 잡아채어 검으로 목을 그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강소군은 튕겨 나간 창을 양손으로 잡아 다시 내리누르며 구연강을 후려쳤다.

마치 힘에서 질 수 없다는 듯 후려치는 무지막지한 초식이었다.

“허….”

구연강은 한 걸음 물러나 초식도 없이 내려치는 창의 공격권을 피했다.

아니, 피하는 척하며 자신의 검을 둥그렇게 휘둘러 강소군의 창을 감아갔다. 마치 뱀이 나무를 타듯 검이 감아오자 강소군이 창을 위아래로 털어 검을 튕겨냈다.

-터텅!

경기가 폭발하며 두 사람이 다시 일보씩 물러났다.

“일 초로군요.”

강소군이 말했다.

“그렇군.”

구연강이 삼 초를 제시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일 초에 죽이지 못할 상대가 없다고 자신하는 구연강이다.

생각 같아서는 아들을 죽인 강소군을 당장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가슴속에 천하일통을 담고 있는 효웅이다.

강소군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대업에 쓰는 칼로 삼고자 하였다.

구연강은 삼 초를 통해 강소군의 무위를 최대한 드러내 한왕에게 보여 주려 하였다.

그런데 엉겁결에 일 초가 끝나 버렸다.

강소군이 보여 준 것은 찌르다가 튕긴 창을 내려친 것뿐이다.

적절한 변초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자신이 물러나고 어이없이 일 초가 끝났다는 사실에 구연강은 당황하였다.

“이제 내 공격도 받아 봐라!”

구연강이 검을 등 뒤로 숨겼다가 한 발 나아가며 휘저었다.

-파악!

구연강의 전면에 은하수가 펼쳐진 듯 검광이 만연하였다.

그의 절초 성리만하(星離萬河)가 펼쳐진 것이다.

“오!”

“과연!”

장막 주위에서 감탄성이 쏟아졌다.

절대고수의 진검이 펼쳐진 것이다.

거대한 검벽을 이룬 검광이 은하수가 흐르듯 끊임없이 흐르다 어느 순간 강소군을 향해 쏘아져 왔다.

강소군도 자신의 가진 바 전력을 다해야 함을 직감했다.

양손으로 창을 잡고 한 발을 내딛더니 다가오는 검광의 물결 한가운데 꽂았다.

-우우웅.

-따다다당.

창두가 미세한 울음을 울리며 검광 사이를 파고들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창끝에서 기운이 흘러나왔는데 검광은 그 기운에 쓸려 굴절이 되었다.

구연강의 검벽이 서서히 붕괴되었다.

-쾅!

어느 순간 경기가 터지고 두 사람이 일 장씩 물러나 삼 장 거리로 벌어졌다.

강소군은 태연히 창을 비껴든 채 구연강을 바라보았다.

“아, 저걸 깨다니.”

“저 나이에 구 방주에 필적할 만한 경지라니 놀랍구나!”

장막 주위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고수들이다.

그럼에도 구연강의 성리만하 일 초를 받아낼 자신이 있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강소군은 자세 한 번 바꾸지 않고 성리만하를 깨뜨렸다.

‘으음.’

구연강이 내심 침음을 흘렸다.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침중하게 굳었다.

‘이 녀석의 내공이 이렇게 심후하다니.’

강소군의 내공은 일반적인 경로와 달리 혈룡기와 싸우며 생성된 것이다.

운기조식을 통해 얻은 내공과는 사뭇 성질이 달랐다. 이 사실을 모르는 구연강은 내공이 심후하다고 여겼다.

구연강은 순간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자리에서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게 맞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 생각을 곧바로 실천에 옮겼다.

그가 검을 수평으로 던져 슬쩍 허공에 띄우더니 그대로 검자루를 밀어냈다.

-쉬이익!

검이 날아갔다. 그런데 그 속도가 마치 사람이 걷는 듯 서서히 다가갔다.

보던 이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구 방주가 이기어검의 경지에 들었구나.”

강소군은 서서히 날아오는 검에 적지 않은 경력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자칫 쳐냈다간 검은 광폭하게 달려들어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것이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마치 구연강이 쥐고 있듯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언제든 방향을 바꿀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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