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92화 (9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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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경이 고개를 숙였다.

막막한 심정이었다.

아버지 초강립은 죽고 장 장군부는 사라졌으니 이제 설 곳이 없다.

역도의 무리에 명단이 올랐고 남경 방부에서도 쫓고 있어 갈 곳도 없다.

초하경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변방 전장으로 가서 낭인으로라도 살아야지요.”

호패제도가 날로 강화되고 있어 대도시에서는 살 수가 없고 멀리 변방으로 가야 할 처지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강소군이 내실로 가더니 작은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당분간 내 일을 도와줄 수 있겠나?”

초씨 남매와 황오는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말씀하실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무슨 일이신지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네.”

초하경 등이 일어나 정식으로 포권을 하였다.

“강 공자께서 살려 주신 목숨입니다.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우선 이것부터 받게. 떳떳하게 다녀야 일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강소군이 건넨 것은 호패였다.

강하, 강란, 그리고 장오.

총관 모상에게 부탁하여 미리 만들어 둔 것이다.

초씨 남매와 황오는 장 장군부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한 강소군이 거둘 수 없었다.

그러기에 가지고 있다가 이제야 꺼낸 것이다.

“두 사람은 아버지 고향 먼 친척의 후손이네. 항렬로 따지면 내 아우들이지. 장오는 그 집안 외가의 숙부라네. 강씨 호적에 모두 정리됐으니 염려할 것 없는 신분이네.”

강소군이 세 사람의 새로운 신분에 대해 일러주었다.

초씨 남매와 황오는 감격하였다.

장 장군부가 역적으로 몰린 지 육 년이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늘 쫓기며 살다가 새로운 신분을 얻은 것이다.

무엇보다 강씨 가문에 입적했다는 게 의미가 컸다.

강부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분이 바뀐다.

“나중에 모든 일이 밝혀지면 그때 가서 초씨 성을 찾게.”

세 사람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주군!”

강소군이 손을 저었다.

“아니지, 제대로 불러야지.”

초하경 등이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형이라고 불러야 맞지.”

“….”

“이제 아우와 여동생이 생긴 건가요? 장숙?”

강소군이 어리둥절해하는 장오에게 웃으며 장숙이라 불렀다.

***

인적 드문 야산 계곡.

좁은 골짜기에 풀과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집들이 몇 채 들어서 있었다.

급하게 지은 티가 역력한 것이 임시로 쓰는 거처임을 알 수 있었다.

그중 제법 큰 목옥에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제법 너른 실내였건만 사람들이 꽤 많아 비좁아 보였다. 날이 더워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벽을 등지고 신임 도룡회주 염기창이 앉아 있었다.

탁자도 없었다. 가운데 적당한 공간을 남겨 놓고 사방 벽을 등진 채 사람들이 두세 겹 앉거나 선 상태다.

그 많은 사람이 있건만 실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한쪽 벽을 차지한 무리의 중심에 있는 중년 무인이 입을 열었다.

장로직을 맡고 있는 임승백이다.

“회주. 결심하셨소?”

말이나 행동이 절제된 모습으로 보아 군문 출신임이 분명했다.

염기창이 말이 없자 임승백이 채근하였다.

“이제 도룡회는 왕야와 운명을 같이해야 하오. 회주의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오. 이번 작전의 지휘권만 넘기라는 것이오.”

염기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도룡회는 수많은 문파가 함께 모여 이룬 것이오. 각 문파의 생존이 달려 있는 일이니 장로회의에서 주관하는 게 맞습니다.”

임승백의 눈에 흉흉한 살기가 스쳤으나 이내 사라졌다.

“하하. 평상시라면 그래야겠지만 지금은 전쟁을 앞두고 있소. 회주의 나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으니 큰일이오. 급변하는 전장에서는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어야 함을 모르니 정말 답답하군.”

임승백의 말투는 무척이나 무례하였다.

“임 장로! 예의를 갖추시오.”

염기창을 지지하는 군소문파 출신 고죽문(古竹門) 문주가 불쾌하다는 듯 나섰다.

고죽문은 문도는 많지 않으나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나고 고죽문주 역시 절정에 이른 고수다.

하지만 임승백 역시 절정을 넘어선 고수다. 솔직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눈에 차는 이가 없었다.

‘흥! 이놈들이 분명 딴생각을 하고 있군. 잔치를 위해 기른 돼지가 죽기를 거부하다니.’

임승백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일어나더니 말했다.

“내일까지는 분명히 답을 하셔야 할 것이오.”

임승백이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나가 버렸다.

그러자 고죽문주를 비롯한 몇몇 장로가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우리를 화살받이로 삼을 생각이 분명하군.”

“도룡회를 이만큼 키운 게 누군데 이제 와서 차지하려 하다니. 과거 주원장이나 똑같은 놈이야. 역시 그 핏줄이 어디 가겠어?”

고죽문주가 염기창을 향해 말했다.

“염 문주, 화룡문은 도룡회의 주축이오. 우리가 지지할 테니 절대 회주의 권한을 내줘서는 안 됩니다.”

염기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죽문주와 그 일파가 나간 뒤 목옥에는 염기창과 장영영만 남았다.

장영영은 여전히 면사를 쓰고 있었다.

“옛사람들은 만났소?”

“예. 회주.”

염기창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영영, 나는 네가 그들과 떠났으면 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도룡회는 죽을 자리로 들어가고 있다. 네 한 몸이라도 건사하는 게 옳은 일이다.”

“….”

염기창은 우문극의 대제자다. 오랜 세월 우문극의 수발을 들며 그의 의중을 헤아릴 정도는 됐다.

우문극은 염기창에게 임시 회주를 맡기고 장로회의에서 새로 회주를 선임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로회의에서는 아직 젊은 염기창을 회주로 재추대하였다.

화룡문이 도룡회에서 가장 큰 문파라는 이유에서였다.

염기창은 우문극이 화룡문을 조운룡에게 맡긴 것은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측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문극은 도룡회에 앞날이 없다고 봤던 것이다.

이는 염기창도 그렇고 도룡회 모든 구성원이 알고 있는 일이다.

“나는 도룡회와 운명을 함께해야 하는 처지다. 이번 거사에는 수많은 함정이 숨어 있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려 살길을 도모하기 바란다. 오늘은 이만 쉬고 싶구나.”

도룡회의 교화 장영영은 말없이 목옥을 나왔다.

초여름이 훌쩍 지났건만 좁은 골짜기는 수목이 그리 많지 않아 메말라 보였다.

장영영은 자신의 마음이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거야.’

장영영은 목옥을 돌아봤다.

염기창이 자신의 운명을 지고 앉아 있을 것이다.

가슴에 알 수 없는 아픔이 스쳐 갔다.

염기창은 그녀에게 생명의 은인이다.

동창과 금의위에 쫓겨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마침 염기창이 지나다 뛰어들어 구했다.

염기창은 그녀를 불모에게 의탁했고 불모는 그녀를 제자로 삼았다.

염기창은 뛰어난 무재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깊고 남을 배려하는 자였다.

염기창은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남녀 간의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처지다.

그녀의 복심(腹心)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불모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룡회에 있어야 기회가 오기에 초씨 남매도 물린 것이다.

‘어서 조 문주가 돌아와야 할 텐데.’

화룡도 조운룡은 화룡문 십이도객과 함께 무공수련 중이다.

올 때가 되었건만 아직 소식이 없다.

그가 오면 임승백 장로 일파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

자신의 초옥으로 돌아온 임승백은 사람들을 물리고 술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사람이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더니 이놈들이 딱 그 짝이 아닌가.’

도룡회는 우문극이 황실에 의해 멸문된 문파들을 모은 데서 시작됐다.

하지만 한왕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성세는 꿈도 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왕의 자금이 들어오고 불모가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데려옴으로써 도룡회는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다.

임승백은 염기창보다 고죽문주가 더욱 괘씸했다.

‘가만두었으면 그대로 사라졌을 놈들을 살려 놓았더니 저 잘난 줄 알고 목을 빳빳하게 세워?’

멸문된 문파는 제자를 거두기 어렵다. 누가 다 망한 문파의 계승자로 들어가려 하겠는가.

그런데 불모가 따르는 백성들의 자제들을 멸문된 문파의 문도로 보냈다.

각 문파들은 수많은 제자를 받아들여 전심전력으로 가르쳤다. 이제 큰 문파의 문도는 백여 명이 넘고 작은 문파도 이삼십 명은 된다.

그런데 문도가 늘어나자 문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황실을 전복하자는 애초의 뜻은 잃고 자신의 문파를 건사하는 데 급급해하고 있다.

염기창은 그들을 대변하여 이번 거사에 미온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한왕이 재촉하는 상황이라 임승백은 초조하였다.

임승백이 술병째 들어 벌컥, 마시고는 결심하였다.

‘네가 결국 네 무덤을 파는구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임승백이 결심을 하고 자신의 심복을 불렀다.

“천객가에 염기창을 제거하라 일러라. 반드시 대정무각에서 보내온 자객이라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

“존명!”

심복이 명을 받고 사라졌다.

***

구룡탄.

아홉 마리의 용이 모여 질주하는 듯한 강물이 빠르게 흐른다.

강가에 거대한 장막이 들어섰다.

장막 안에 놓인 태사의에 거구의 한왕이 앉아 있었다.

우측의 자리에 천무방주 구연강이 앉았다.

주위로 한왕부의 고수와 천무방 고수들이 줄지어 섰다.

“도대체 누구를 초청하였기에 이런 곳에서 보자고 한 건가?”

한왕은 이제 구연강을 완전히 아랫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천무방주는 내심 불쾌하였으나 눈가에 가벼운 웃음을 품고 말했다.

“왕야께서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척 젊은 고수지요.”

“하하. 젊은 고수라. 젊은 놈 중에 누가 감히 천하 십대고수 구 방주와 겨룬다는 말인가.”

한왕은 천무방이 혈마라는 젊은 고수 때문에 적잖은 피해를 입은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도 구연강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짐짓, 모른 척하였다.

오히려 구연강이 솔직하게 말했다.

“그자가 제 막내아들을 죽였지요. 그래서 수하들을 시켜 잡아 오라 일렀는데 그만 큰코다치고 말았습니다.”

“아, 그 혈마라는 자 말이오? 그자에 대한 소문은 들었소. 일당백의 고수라고 하더군.”

“제가 보기에는 능히 만인을 감당할 고수입니다.”

“허허… 그가 십대고수라도 된다는 말인가?”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얼마 전까지 제 적수는 셋이었습니다. 그중 하나인 요천루주가 죽었지요. 이제는 둘 남았는데 그자로 인해 다시 셋이 되었습니다.”

“호오. 구 방주의 적수가 셋이나 된다는 말이오?”

“비천신검 상관무영! 누구나 그를 십대고수의 수좌로 꼽습니다. 두 번째가 탈명마장이지요.”

“강호 고수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진진하군. 그렇다면 나머지 십대고수는 구 방주의 적수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것도 실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사실 절대고수는 직접 겨뤄 봐야 자웅을 가를 수 있지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태도를 보면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흥! 십대고수라? 네놈들이 황제라도 된다는 말이냐? 어떤 놈이든 정말 만 명의 군사를 보내면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한왕은 내심 무림인들이 십대고수 운운하는 게 가소로웠다.

“아, 저기 오는군요.”

강 하류로부터 작은 배 한 척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 사람이 창을 비껴든 채 뱃머리에 서 있었다. 뒤로 넘겨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장(天將)인 듯 고절한 기품이 흘렀다.

“흠. 기도가 대단하군.”

한왕이 관심을 보였다.

구연강이 자리에서 일어나 장막 밖으로 나갔다.

“강 공자! 어서 오시오!”

작은 나룻배를 타고 온 이는 강소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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