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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령이 수작을 부린 보람이 있었다.
열어 놓은 창문 너머로 강소군이 지나는 것이 보였다.
남궁령은 제비처럼 날아 담장에 걸터앉았다.
‘어디서 뭘 하다 왔는데 얼굴이 저리 훤해졌지?’
남궁령이 강소군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총에서의 일은 강소군에게는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 같은 기억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백정무에게 털어놓으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다.
그러니 밤을 새웠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강 공자님이시네?”
강소군이 담장에 걸터앉은 남궁령을 올려다봤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는 게 맞죠?”
뜬금없는 질문에 강소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길을 안내했으면 술이라도 한잔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영악한 남궁령은 강소군이 대인관계가 서투르다는 걸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대놓고 술사라고 종용하였다.
“어렵지 않은 일이오. 시간이 될 때 말씀….”
“쇠뿔은 단숨에 빼라고 했죠. 지금 가요!”
남궁령이 담장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지금은….”
“시간이 될 때 말하라면서요. 지금밖에 시간이 안 되네요. 이제 곧 경성을 떠나야 해요.”
남궁령이 퇴로를 막았다.
강소군은 이상하게 남궁령과 이야기를 하면 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반점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강소군이 거처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런데 남궁령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점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남궁령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기왕 사는 거 좋은 데서 사셔야죠.”
‘정말 수완이 좋은 아이로군.’
강소군이 보기에 남궁령은 아직 앳된 소녀다. 다만 남궁세가의 체면을 봐서 반존대를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장영영 외에 여자를 만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열여섯에 장영영과 정혼하자마자 군문에 들어가 소년 장수로 변방의 전장을 전전했다.
무총을 나와서도 연화심을 만나기 전까지 여자와 말을 섞어 본 적이 없다.
남궁령은 장영영과도 연화심과도 달랐다.
장영영은 어린 날 처음 만났으 때 그에게 다가와 손을 잡아달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그가 하자는 대로 잘 따랐다. 마치 오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화심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유약해 보이는 가운데 굳은 심지가 있고 차분한 듯 보이는데 무모함이 있었다.
반면 남궁령은 거침이 없다. 구김이 없는 성격이지만 몇 마디 말로 상대방을 빠져나갈 수 없게 옭아매는 영악함이 있다.
‘무가의 여자들은 권문세가의 여식과는 많이 다르군.’
장영영 외에 교분을 나눈 여자는 없지만 권문세가의 여식들이 어떻게 자라는지는 안다.
“뭐 해요? 제가 앞장설까요? 생각해 둔 집이 있는데 그리로 가죠.”
강소군이 딴생각을 하자 남궁령이 쐐기를 박았다.
***
구양수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마을까지만 동행하는 줄 알았더니 같은 객잔에 투숙했다.
서로 멀찌감치 방을 썼는데 이상하게도 식사 시간을 또박또박 맞춰 나왔다.
무엇보다 빤히 사람을 보는 음침한 시선이 불편했다.
끊임없이 따라붙는 구양수의 시선에 산동삼호는 저잣거리에 나가 팔자에 없는 진짜 장사를 해야 했다.
위장으로 준비한 비단을 팔아치우고 약초와 차, 공예품 등의 상품을 구입하였다.
짐 보따리를 꾸리던 심마백이 투덜댔다.
“형님, 차라리 조용한 곳으로 유인해서 죽여 버립시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삼공자 구양운이 죽고 난 뒤 구연강이 무슨 짓을 했던가. 천무방 무력 절반을 희생하면서까지 쫓아왔다.
구양수를 죽이면 남은 절반을 다 끌고 올 것이다.
자신들만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천지를 떠도는 신세이니 죽여 버리고 멀리 새외 구경이나 하고 오면 된다.
하지만 연화심과 중랑은 처지가 다르다.
뿌리를 내려야 할 곳이 있다.
“도무지 그놈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우리 신분을 알고 따라붙은 게 분명한데 무슨 수작을 부릴 꿍꿍이는 없는 것 같고.”
위응환도 헛갈려하였다.
“아무래도 화심을 납치할 기회를 노리는 것 같습니다. 지원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중랑의 의견이었다.
“그러면 바로 죽여 버릴 거예요.”
연화심은 그러기를 바랐다.
절정에 들어선 이후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연화심이다.
“포획할 의사가 있었다면 그때 고갯길에서 바로 잡으려 들었을 것이다.”
장무강의 말이 맞았다.
일백 진마대가 있었다. 그때는 놔두고 굳이 홀로 따라왔다가 지원을 부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구양수는 아침저녁으로 마주칠 때마다 너스레만 떨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제 끝이다. 내일 새벽 마을을 빠져 나가자.”
“또 따라오면.”
“무조건 반대로 가자고. 그러면 속셈을 드러내겠지.”
“그냥, 쳐 죽이자니까.”
“안 돼!”
다음 날.
장무강 일행이 새벽같이 일어나 조용히 객잔을 나섰다.
기가 막히게도 구양수가 동구 밖에서 말에 탄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그쪽도 떠나는 거요? 하하. 아무래도 인연이 깊은 것 같군.”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헤어져야겠군요. 먼저 가시지요.”
장무강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거, 무슨 섭섭한 소리를 다 하시나. 길동무 삼아 같이 가자고.”
구양소가 뻔뻔하게 나오는 순간 장무강과 심마백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죽이자!’
두 사람의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양수는 나란히 따라왔다.
마을 밖을 나와 십 리 정도 갔을 때 구양수가 말했다.
“무슨 물건을 파나 봤더니 별것도 없더만. 그런데 호위를 둘이나 붙이고 다니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 된다고. 무슨 귀한 물건을 가지고 가나 이목을 끌거든.”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다만 요즘 치안이 불안해서 어쩔 수 없군요.”
“아냐, 아냐. 아니라고. 저 두 사람 호위는 산적을 만나면 아무 소용이 없지. 저놈들도 감당하기 어려울걸?”
구양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야산 기슭 아래 십여 명이 앉아 있었다.
‘하아. 이제 별 떨거지들까지.’
장무강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구양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런 놈들은 말야.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쪽수를 맞춰 오거든. 그러니 차라리 호위가 없이 다니는 게 낫다고. 없어 보이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지.”
구양수가 놀리듯 말하더니 연화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기왕 호위를 쓰려면 이런 미인은 안 되지. 오히려 화를 부르기 십상이거든.”
면사 밖으로 드러난 연화심의 눈꼬리가 쑤욱 올라갔다.
구양수 앞에서 진면목을 보여 준 적도 없건만 마치 본 것처럼 말한다.
장무강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구양 공자. 대체 무슨 의도로 우리를 따라오는 거요?”
구양수가 히죽, 웃었다.
장무강과 정면으로 시선을 맞대고는 말했다.
“오호.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아쉽잖아. 천하의 산동삼호가 저잣거리에서 굽실거리며 장사를 하는 걸 지켜보는 게 무척 재밌었는데. 아주 잘하던데?”
“역시 처음부터 알고 따라온 것이로군.”
장무강이 씁쓸하게 웃었다. 괜히 상인 노릇까지 한 것이다.
어느새 구양수와 장무강 일행이 거리를 벌리고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연화심이 대뜸 앞으로 나서 검을 뽑았다.
“구양수! 나는 천무방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말에서 내려라.”
“연 낭자. 섭섭하네. 같은 지붕 아래서 며칠 잘만 지내 놓고 갑자기 왜 이러시나?”
구양수가 음침한 미소를 흘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우리끼리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저놈들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죽여 달라고 오는데.”
오다 말고 일행이 서로 대치하는 걸 보고는 기다리던 패거리들이 병장기를 들고 다가왔다.
“뭐냐? 오다 말고. 눈치 깐 거냐?”
시꺼먼 배자만 입고 도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우두머리로 보였다.
체구가 단단한 것이 아주 이름 없는 잡배는 아닌 듯했다.
“가만! 너희 거기 그대로 멈춰 봐.”
여전히 말 위에 앉아 있던 구양수가 다가오는 무리를 향해 외쳤다. 그러고는 손을 휘저었다.
-쉭!
비도 한 자루가 쏜살같이 날았다. 얼마나 빠른지 보이지도 않았다.
“헉!”
우두머리가 숨을 들이켜고 재빨리 머리를 틀었다.
비도가 우두머리의 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는 뒤에 있던 자의 면상에 박혔다.
“크악!”
졸지에 비도가 얼굴에 박힌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우두머리가 기겁하였다.
“뭐야? 저 새끼는?”
무려 십여 장 거리였다. 작은 비도가 그 거리를 날아와 박혔다.
위응환이 눈이 다시 꿈틀하였다. 구양수의 비도술은 산적과 마주쳤을 때 보고 다시 한 번 본 것이다.
다른 사람도 내심 놀랐다.
구양수는 체구가 작은 편이라 힘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저 먼 거리의 적을 격살한 것이다.
장무강 등은 천무방에 쫓기며 대정무각으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들었다.
천무방 삼 형제 중 대공자 구양조의 무공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죽은 삼공자 구양운이었다.
구양수의 무공은 일류 무사 정도라고 들었을 뿐 비도술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정작 구양수 본인은 혀를 찼다.
“쯧, 피했네? 역시 십 장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는 놈은 무리인가?”
구양수의 비도에 죽을 뻔한 우두머리가 격분하였다.
“저 새끼부터 죽여!”
패거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러자 구양수는 말을 돌려 장무강 일행 뒤로 빠졌다.
“치고받고 싸우는 건 별로라….”
뻔뻔한 구양수의 말에 장무강 등은 어이가 없었다.
“응환아, 네가 쓸어 버려라.”
심마백이 위응환에게 말했다.
위응환의 암기술이면 달려드는 무리를 한 번에 거꾸러뜨릴 수 있다.
심마백은 비도술을 자랑하는 구양수에게 암기술의 진수를 보여 주라고 한 셈이다.
그런데 위응환이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아.”
심마백이 멍한 얼굴로 위응환을 보다 헝겊으로 돌돌 말아 말 옆구리에 달아놓은 창을 풀었다.
“보기 싫다고 안 보게 될 거 같아?”
심마백이 투덜거리며 창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 사이 패거리들이 왔다.
심마백이 보폭을 좁히며 달려가더니 창을 풍차처럼 돌렸다.
“에라이, 이 잡것들아!”
-퍽! 퍼퍽!
몇 달간 제대로 싸워 보지 못한 심마백은 신나게 창을 휘둘러 패거리들을 두들겼다.
구양수를 팬다는 심정으로 때리니 창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컥! 고수다!”
“도망쳐라!”
패거리들은 아우성을 치며 순식간에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팔다리 한 군데씩 어김없이 부러졌다.
“백주 대낮에 상인을 겁탈하다니. 내 아우가 피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해서 팔다리만 부러뜨려 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심마백이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구양수가 다시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다 죽여 버리지? 때려죽이면 피도 안 나오는데.”
우두머리가 이를 갈며 외쳤다.
“우리는 장하방이다. 이러고도 너희가 무사할 줄 아느냐?”
“장하방?”
장하방이라면 이 근방 장강 유역을 관할하는 방파로 꽤나 이름이 높은 곳이다.
장무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길로 장강을 넘어 남쪽으로 가야 하는데 귀찮게 된 것이다.
그때 구양수가 혀를 찼다.
“저런, 지금쯤 장하방은 기둥뿌리가 뽑혔을 텐데? 아마 네 동료들이 황천길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우두머리가 격분했다.
“무슨 소리냐? 장하방을 뭘로 보고?”
“큭큭큭. 장하방은 몰라도 천무방 진마대는 잘 알지. 진마대 전원이 몰려갔으니 아주 아작을 냈을 거야.”
“뭐? 천무방? 천무방이 왜 여기까지?”
우두머리도 천무방에 대해 안다. 하지만 여기는 대정무각의 영역이다.
“머리가 나쁜 놈이군. 영역 싸움도 안 해 봤냐? 이제 여기는 천무방 영역이다 하고 침 뱉어 놓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