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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도 잠시 생각해 봤다.
허공섭물을 따로 수련한 적은 없지만 일 장 거리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삼 장이라면?
혈룡기가 있었을 때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혈룡기.
사실 혈룡기는 핏빛 독무가 일으키는 독기였다.
핏빛 독무에 중독되었을 때 폭발하던 체내의 기운을 강소군은 한 마리 혈룡이라고 상상하였다.
형상을 지닌 한 마리 혈룡이라고 의식할 때 금단진공으로 다스리기가 수월하였다.
사실 핏빛 독무를 독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독은 인체의 한 부분을 파괴하거나 제약하여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핏빛 독무는 전신의 모든 근육은 물론 장부와 뼈 심지어 피까지 각성시켜 잠력을 쏟아내게 만든다.
처음에는 안력이 극대화되어 어둠 속에서도 십 장 밖 상대의 체모까지 눈에 들어온다.
청력 또한 증폭되어 상대의 심장 박동은 물론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소리까지 들린다.
온갖 냄새가 느껴지고 스치는 바람의 강약까지 감별된다.
주먹을 내지르면 전신의 기운이 한꺼번에 쏟아져 바위가 뚫린다.
듣기에 따라 잠재력을 증폭시키는 영약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 그 결과는 참혹하다.
뇌 또한 극한까지 각성되어 전신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일일이 반응하며 발악을 한다.
시간이 더디 흐르고 공간이 확장되는 게 느껴지다가 결국 자신과 사물의 경계가 사라진다.
살아온 생의 모든 기억이 깨어나고 사물을 보면 본질이 그대로 이해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들리는 것은 물론 스치는 바람과 온갖 냄새까지 그대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다 그 많은 정보들이 뒤엉키기 시작할 때쯤 미쳐 가며 환각에 휩싸인다.
그다음에는 환각과 실제의 구분이 사라진다.
고통 또한 더없이 민감해진다. 뇌가 부풀어 터질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기에 무총에서 중독된 이들 중에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뜯어내고 뇌를 끄집어낸 자도 있었다.
전신 감각이 각성된 결과이니 해약이 있을 수 없었다. 감각을 잠재운다는 건 곧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니까.
강소군은 무총을 나온 뒤 금단진공으로 핏빛 독무의 기운을 눌러왔다.
그러나 요천루주와 삼사, 그리고 천무방과의 격전에서 숱한 내상을 겪으며 자의반 타의반 핏빛 독무로 얻은 잠력을 폭발시켜야 했다.
다행히 생사를 넘는 격전 과정에서 체내에 쌓였던 핏빛 독무의 독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부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폭주할 때 그때까지 남아있던 독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졌다고도 볼 수 없었다.
놀랍게도 이제까지 독기를 누르던 금단진공이 이제는 거꾸로 체내의 잠력을 깨우려 들었다.
오랜 세월 극한까지 잠력을 쏟아냈던 경험을 육신은 기억하고 있었다.
이는 핏빛 독무의 독기에 의해 폭발적으로 각성되는 것과 확연히 달랐다.
강소군의 의지에 따라 서서히 잠력이 깨어났고 이는 금단진공의 기운과 어우러져 새로운 기운을 형성하였다.
그게 강소군이 명명한 금룡기였다.
하지만 단숨에 극한까지 폭발하던 과거와 달리 금룡기는 그야말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이제 고작 삼성에서 사성으로 넘어가고 있다.
강소군은 최근에야 그간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현상을 이해하였다.
강소군의 뇌가 핏빛 독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분한 이성을 되찾아가며 무총 이후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은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핏빛 독기, 혈룡기로부터 자유로워졌으나 대신 강소군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강했던 무공은 상당 부분 손실을 봐야 했다.
사실 천무방 신기수사 조개량이 방심했던 것은 아니다.
조개량이 천성대 등 무력대와 천무십객을 운용한 기준은 십대고수였다.
실제로 십대고수라는 이들이 같은 처지였다면 대부분 조개량의 포위망을 뚫지 못했을 것이다.
십대고수가 만인(萬人)을 감당한다는 것도 전장의 일반 군사를 두고 한 이야기이다.
천무방의 정예 무력이나 천무십객과 같은 기인이사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데 강소군의 당시 무위는 혈룡기에 의해 잠력이 극한까지 발휘되고 있었기에 인간의 상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장무강이나 노이칠 같은 경험이 많은 고수도 강소군의 무공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오히려 중랑이나 조운룡같이 경험이 부족한 자들이 절대고수가 되면 저 정도 무공을 펼칠 수 있구나, 라고 여겼을 뿐이다.
실제로는 십대고수라고 해서 모두 당시 강소군의 무위를 펼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엉뚱하게도 십대고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한층 높아졌다.
-십대고수도 아닌 자가 천하사패 무력의 절반을 상대하였다!
-진짜 십대고수라면 혼자서 천하사패 하나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황당하지만 매화자들은 사실인양 떠들었고 사람들은 이제 십대고수를 거의 신으로 추앙한다.
어찌 됐든 삼 장 거리의 검을 허공섭물로 당겼다면 혈룡기를 지닌 강소군과 비슷한 존재라는 뜻이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그런 고수가 천황성의 사자(使者) 노릇을 하고 있다고?’
그건 확실히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물론 허공섭물을 목적으로 한 기공을 수련한 자일 수도 있지. 그래도 적어도 당금 십대고수의 수준은 될 것이네.”
백정무의 추론은 일리가 있었다.
“그런 자를 심부름꾼으로 쓰는 무리의 경고라면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었네. 선황이 대정무각을 만근 것은 그 때문이지.”
“….”
그랬을 것이다. 선황은 의심이 많았으니까. 아니, 의심을 빙자해서 남모르는 호위세력을 만든 것일 수도 있고.
“황실과 조정을 둘러싼 권력은 수많은 갈래가 있지. 남경파와 북경파가 있고 토호를 배경으로 한 권력 가문과 공신 가문, 군벌 등 이해득실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지. 여기에 황제와 친왕들을 따르는 갈래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다양한 분파가 있네.”
“….”
“드러난 세력은 문제가 아니네. 그런데 점차 조사를 하다 보니 드러나지 않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었네. 그 힘은 조정 바깥과 결탁한 게 분명하네. 우리는 그게 천황성이라고 봤네.”
강소군은 아버지가 언급한 조정에 흐른다는 모종의 암류가 떠올랐다.
“조정 밖이라면 무림입니까?”
“그게 무림만이라고 단언할 수가 없다네.”
“토호와 연결되어 있군요.”
“상단과 지방관, 군과도 연루되어 있는 것 같더군. 그런데 십각에서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파악을 못하고 있네.”
“그렇다면 점조직이군요.”
강소군이 바로 맥을 짚자 백정무가 내심 놀랐다. 더 이상 중언부언 끌 필요를 못 느꼈다.
“이제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겠네. 나는 자네가 조정으로 들어가 대정비각을 복원하고 천황성의 실체를 잡아내기를 부탁하고자 왔네.”
결국은 대정무각으로 합류하라는 뜻이다.
“제 뜻은 이미 오각주님을 통해 전해드렸습니다.”
강소군이 딱 잘라 말했다.
한 마디로 사양한다는 뜻이다. 백정무의 안색이 굳었다.
예상은 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원하는 바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협조하고자 한다면 받아주시겠습니까?”
강소군은 바로 대안을 제시하였다.
“원하는 방식이라….”
백정무는 다시 한 번 강소군이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그를 끌어들이고자 하는 욕심이 커간다.
“자네가 원하는 방식이 뭔가?”
“우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장홍 대장군부 역모 사건의 진실을 밝혀 주십시오.”
“….”
“대정비각을 잃었다고 그동안 조정의 일에 손 놓고 있지만은 않으셨을 겁니다. 그 힘이라면 충분히 밝힐 수 있을 겁니다.”
백정무가 흠칫, 놀랐다.
실제로 대정비각을 잃은 뒤 새로이 조정에 대정무각의 세력을 심어왔다.
“대신 천황성의 실체는 제가 밝혀드리겠습니다.”
백정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 장군부의 역모 사건을 밝히려면 조정에 끈이 있거나 직접 들어가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강소군이 대정무각에 의뢰하는 건 조정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천황성의 실체를 밝히겠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천황성의 실체를 밝히는 것 또한 조정에 몸담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조정에 몇몇 우리 일을 돕고 있는 자가 있다는 건 인정하네. 그럼에도 그 실체는 밝히지 못했지. 그런데 자네가 야인으로 있으며 천황성의 실체를 밝히겠다는 건가?”
강소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백정무는 가만 강소군을 주시하였다. 담담하게 시선을 맞받는 강소군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후우… 자네 속은 아버지보다 더 알기 어렵군.”
백정무가 끝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렇게 하지. 그런데 혼자서 가능하겠나?”
“대정무각의 힘이 필요하면 요청하겠습니다.”
“언제든 최대한 지원하겠네.”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기나긴 밤이었다.
“이만 가 봐야겠군.”
백정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소군이 일어나며 예를 취했다.
방을 나가기 전 백정무는 강소군을 돌아보며 한마디 하였다.
“경성은 지금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네. 몸부터 다스려야 할 걸세.”
백정무는 강소군의 내상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을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그 말씀은 백 숙부께서도 유념하셔야 할 것 같군요.”
“뭐…? 하하!”
강소군의 말에 허를 찔린 백정무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백정무 역시 천마도 우문극과의 결전에서 얻은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다.
“하하. 도무지 못 당하겠군. 내가 졌다. 졌어. 나중에 보자.”
문을 나서는 백정무의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
‘네 녀석에게 반드시 대정무각을 떠넘기고 말 것이다.’
***
“들어가도 되냐? 갑자기 어디가 아프다는 거냐?”
경성을 떠나기로 한 날인데 남궁령이 아프다고 자기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아니, 안 돼! 왜 아녀자 방에 들어오겠다는 거야?”
“난 네 오라비잖아. 대체 어디가 아픈지 봐야 알 게 아니냐.”
“콜록, 콜록. 어제 바람이 좀 찼나 봐.”
남궁우는 기가 막혔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초여름에 감기라니. 더군다나 남궁령이 무공을 익힌 세월이 몇 년인데.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남궁령은 막무가내였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쉬어야 겠어. 하루 이틀 더 있다 가자고.”
남궁우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저 녀석이 무슨 꿍꿍이지?’
남궁우가 경성으로 온 것은 국장과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지만 다른 목적도 있었다.
시국이 수상하니 경성의 상황을 살피고 본가에 전하는 임무도 띠고 있었다.
그동안 모은 정보를 전서구와 인편을 통해 보냈다. 그 사이 경성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 곧 전쟁이 터질 조짐이다.
한왕의 군대가 북상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제는 경성을 빠져나가야 할 때다. 머뭇거리다 전쟁에 휩쓸리면 무슨 변고를 당할지 모른다.
그런데 저 말썽쟁이가 무슨 속셈으로 시일을 끄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봐야 하루 이틀이겠지.’
남궁우는 한숨을 쉬고 무인들을 풀어 경성 안팎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남궁우가 여동생의 속셈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강제로라도 끌고 경성을 떠났을 것이다.
‘이제 돌아왔을까?’
강소군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점소이에게 물어봤는데 객잔을 떠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돌아올 것이다.
‘직접 길을 안내했는데 여자의 호의를 날로 먹으면 안 되지. 그건 강호 도의가 아니라고.’
강소군에 대한 두려움을 떨친 남궁령은 인연을 확실히 해 둘 참이다.
‘일단 근사한 곳에 가서 술을 사라고 하고 속을 튼 다음, 결의남매를 맺는 거야. 크하하. 그러면 나는 절대고수를 둘이나 거느리는 여고수가 되는 거지.’
남궁령은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