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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를 시험하다니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백정무가 정색을 하였다.
강소군은 옥빛 술이 그득한 자신의 잔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상상력이란 참으로 교묘합니다. 있지도 않은 용과 봉황을 그려내지 않습니까? 누가 제게 이 잔에 독이 있다고 하면 과연 주저 없이 마실 수 있을까요?”
백정무의 눈썹이 꿈틀하였으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강소군이 술잔을 훌쩍 비웠다.
“실로 어이없고 가소로운 자들이로군요. 역사를 적당히 꿰맞춰 황제를 농락하려 들다니.”
“….”
“외할아버지는 조카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오르셨지요. 정당성 시비가 끊이지 않음을 악용한 누군가의 술수일 따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그럼에도 선황께서는 천황성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셨을 겁니다. 가진바 약점이 있으니까요. 스스로 판 지옥이지요.”
“천황성이 실체가 없는, 누군가 조작한 거짓이란 말인가?”
강소군이 백정무를 주시하였다.
“그건 누구라도 잠시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수백 년을 이어온 황조는 있어도 그만한 세월을 지탱한 호족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호족이야말로 오히려 삼대를 넘기기 어렵지 않았던가요?”
“그들은 어느 특정한 호족 세력을 낙점하여 권력을 나누라고 한 게 아닐세. 자신들은 그저 권력분산을 관장하는 세력이라고 했지.”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백 숙부께서 끝까지 저를 시험하려 드시는군요.”
“….”
백정무는 여전히 정색을 하고 강소군을 바라볼 뿐이다.
자신의 말을 바로 거짓으로 일축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얽혔다.
십대고수 백정무의 시선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강소군은 담담하게 받아냈다.
잠시 후 강소군이 탄식을 하고 시선을 내렸다.
술을 마시고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한 가지 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강소군이 가만 눈을 감았다.
“백 숙부께서도 한때 군문에 계셨으니 변방 군사들 사이에 떠도는 무총의 전설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백정무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피를 먹는 혈룡은 공포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인간세를 평정할 천하제일 무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
“적과 아군, 장수와 병사 합쳐서 일천일백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총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미로를 헤매며 서로 죽고 죽였지요.”
강소군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총에는 정말 피를 먹는 혈룡이 있었습니다.”
백정무의 미간이 다시 꿈틀거렸으나 말을 끊지 않았다.
“거대한 석상에서 핏빛 마기(魔氣)가 쏟아져 나왔지요. 마기에 침식된 이들은 미쳐 갔습니다. 적도 아군도 없었습니다. 그저 피를 먹는 혈룡의 하수인이 되었지요. 팔이 떨어지면 입으로 상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습니다.”
강소군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뇌리에 당시 참상이 떠올랐던 것이다.
“심지어 시체가 다시 살아나 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목을 잘라야 했지요.”
“그게 정말인가?”
백정무도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에 되묻고 말았다.
강소군이 눈을 떴다.
눈에서 한 줄기 정광이 쏟아져 나왔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사실이 아닙니다.”
백정무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스치더니 곧 싸늘하게 굳었다.
강소군이 무슨 의도로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지 괘씸해하였다.
강소군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석상에서 쏟아져 나온 핏빛 마기는 사실 강력한 환각을 불러 일으키는 독무(毒霧)였습니다. 아마도 도굴을 막기 위한 장치였겠지요.”
석상에서 쏟아져 나온 핏빛 독무는 넓은 석실을 채우고 무총의 미로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처음 독무를 마신 자들이 날뛸 때 모두가 환각독(幻覺毒)임을 알았지요. 그래서 싸움을 멈추고 석실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지요.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 구석구석까지 정말 피를 먹는 혈룡처럼 흘러들어 왔으니까요.”
강소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크하하. 나, 마운산이다! 다 덤벼라! 형! 내 몫까지 살아 줘!’
핏빛 독무를 피해 미로를 헤매다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
핏빛 독무는 어김없이 밀려오고 미친 자들 또한 달려왔다.
마운산은 끝내 자기 가슴을 찔렀다. 그리고는 미쳐 날뛰는 자들에게 돌진하여 싸우다 죽었다.
그때 이미 그 역시 환각에 빠져 있었기에 고통도 못 느꼈을 것이다.
고수들은 좀 더 버티긴 했다. 하지만 내력이 강하다 해도 숨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내공으로 독무에 저항하였지만 결국은 미치고 말았다.
환각에 사로잡힌 자들은 잠력이 폭발해 평소보다 서너 배의 괴력을 발휘하였다.
강소군은 그들과 싸워야 했다. 미친 자들은 시신을 뜯어먹고 피를 마셨다.
무총에서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백 일 정도 지났다고 생각될 즈음 살아 있는 자는 강소군 뿐이었다.
강소군 또한 수시로 환각에 사로잡혀 어두운 미로를 끊임없이 헤맸다.
죽은 시체가 살아나 공격하는 것 같아 일일이 목을 잘랐다.
그럼에도 끝없이 미로를 돌아다녀야 했다.
살기 위해서.
미로에 쌓인 시체를 뒤지며 건량을 찾아 먹었다. 천여 명이 가지고 온 건량 덕분에 죽지 않고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미치지 않은 건.
금단진공.
의식을 나눌 수 있는 희대의 절학.
무당의 고인 현치자가 양의심공을 바탕으로 창안한 금단진공 덕분이었다.
환각에 휩싸여 허공의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시체를 난도질하다가도 한 줄기 금단진공의 기운이 돌면 희미하게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그 의식을 붙잡고 출구를 찾아 헤맸다.
그러기를 삼 년.
핏빛 독무가 서서히 사라지고 의식이 명료한 시간이 많아지자 간신히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무총에서 빠져나온 이후에도 환각의 영향은 계속됐습니다. 삼 년!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환각 성분이 온몸에 배었던 것이지요.”
이제 백정무는 침통한 얼굴로 듣기만 하였다.
산전수전 모두 겪었다고 생각했던 그도 이런 끔찍한 이야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지기(知己)의 아들이 지옥을 헤매는데 까맣게 몰랐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오래전 어느 날 밤 강부를 찾았을 때 봤던 어린아이는 그야말로 순수하였다. 그 아이가 가혹한 시련을 겪고 지금 앞에 앉아 있다.
이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가늠이 안 되는 존재가 되어.
강소군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물론 무총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지요. 신선한 공기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체내에 쌓인 환각독은 수시로 폭발하곤 하였지요. 활화산을 안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의식은 명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러면서 사람을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녔습니다.”
“….”
“무총에서 스스로 죽지 않고 살고자 했던 건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 그리운 친구, 사랑하는 여인. 그들을 떠올리며 그 어둠과 살육의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나오니 아무도 없더군요.”
강소군의 목소리는 담담하였으나 듣는 이의 가슴을 후벼팠다.
“처음에는 분노했습니다. 왜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찾았는가?”
강소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앞에 놓인 잔을 쳐다보다 훌쩍 마시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이제 찾지 않아도 됩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찾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담긴 여운이 깊었다.
마침내 백정무가 입을 열었다.
“자네 이야기를 들려 준 뜻이 무엇인가?”
“백 숙부께서 천황성 이야기를 들려주신 의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강소군의 애매한 대답에 백정무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십대고수다.
십대고수는 단순히 무공에 몰두한다고 올라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의 극에 오르기 위해 깨쳐야 하는 게 얼마나 많은가.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강소군의 대답이 의미하는 바를 선뜻 파악하기 어려웠다.
‘내가 자신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걸 아는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백정무는 강소군에게 대정무각에 합류할 것을 권하고자 할 참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대정무각의 후계자로 강소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노이칠 등으로부터 강소군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 받았다.
자신의 지기이자 대정비각의 각주 아들이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절대고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랍고 내심 기뻐하였다.
무공으로도 명분으로도 강소군은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다만 심성과 의지가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가 장 장군부의 일로 황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직접 만나 보고 판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로서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튼 그는 강소군에 대해 일체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이 후계자로 점찍은 사실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만일 알고 대답을 했다면 완곡한 거절이다.
‘선황은 그가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는 동안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던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과연 원망할 만 하군.’
그러니 황실의 비호세력인 대정무각을 맡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황실에 적대적이라고 봐야 한다.
원래 백정무는 천황성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선황이 공신과 호족에게 가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선황이 천황성이라는 곳으로부터 협박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이는 중앙권력을 강화하여 법을 변방 구석까지 미치게 하고 토호의 횡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는 개혁이 위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 만백성을 위하자는 명분이 확실했다.
그러나 강소군은 천황성을 삿된 무리의 수작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화제를 돌려 자신의 삶의 근간이 무너졌음을 말했다. 단순히 선황에 대한 반감의 이유를 설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백정무는 둘 사이의 연관관계를 바로 추론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백정무는 강소군을 직접 보고 나서 오히려 후계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이 굳어졌다.
‘이 아이가 죽음의 고통을 헤치고 나와 천하를 관조하는구나. 이제는 솔직해야 할 때다!’
백정무는 강소군이 높은 봉우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정무는 강소군 앞에서 중언부언한 것이 겸연쩍게 느껴졌다.
백정무가 생각을 마치고 강소군을 주시하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천황성은 허상일 수 있네. 하지만 완전한 허구라고 볼 수도 없지. 천황성에서 온 자는 분명 존재하니까.”
“….”
“그자는 황궁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선황의 침소까지 들어왔네.”
황제의 침실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천하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은신술이 절정에 이른 고수도 불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그런 자를 염두에 두고 금군이 경계를 선다.
“절대고수라는 뜻이지. 자네 역시 절대고수이니 알 것이네. 절대라는 경지를 말로 구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같은 절대고수들 간에도 분명 차이가 존재하지.”
백정무가 가볍게 탄식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찾아온 자는 삼 장 거리를 두고도 허공섭물을 자유자재로 하는 경지였네. 그자가 침입한 걸 느끼고 황제가 장검을 잡으려 하자 그 자리에서 손만 뻗어 장검을 당겼다더군.”
강소군도 내심 놀랐다.
허공섭물.
보통 사람에게는 신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말을 듣고 너무도 놀랐네. 평생 무공에 전념해 왔던 나도 이제야 일 장 거리의 비도 정도를 당길 수 있다네.”
백정무가 탄식한 이유가 있었다.
그자는 이미 십여 년도 전에 지금 십대고수 백정무를 훨씬 능가한 고수였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