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87화 (8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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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심은 구양수 일행이 나타났을 때부터 격동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의 원수들이 나타난 것이다.

연화심은 과거의 나약한 삼도문 금지옥엽이 아니다. 그동안 밤낮으로 천성육십사식을 수련하였다. 대연의결을 얻고 유문광과 반여월의 지도로 절정에 진입하였다.

사람들이 보기에 놀라운 성취였다. 애초에 아버지 연성결이 딸을 위해 어려서부터 좋은 약을 쓴 게 큰 도움이 됐다.

게다가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 때 강소군이 불어넣은 금단진공 또한 적잖은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 성장한 연화심 앞에 원수가 나타났으니 당연히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연의결을 운공해라.

중랑이 연화심의 숨이 거칠어지자 전음을 보냈다.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연화심은 시선을 내리고 대연의결을 운공하였다. 격동하던 기운이 가라앉고 마음이 점차 차분해졌다.

장무강 일행을 훑던 구양수의 시선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화심에게 머물렀다.

죽립을 쓰고 면사로 얼굴을 가렸지만 몸매부터가 남달랐으니 눈길을 끈 것이다.

“보아하니 상인들 같은데 어디까지 가는 것이오?”

구양수가 장무강에게 말을 걸었다.

“산적에게서 구해 주어 감사합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떠도는 봇짐장수가 무슨 목적지가 있겠습니까. 그저 가까운 마을에 가서 장사를 해 보고 또 정하는 거지요.”

“아무튼 큰일 날 뻔했군. 우리가 아니었으면 저 산적 놈들 때문에 아주 곤란했을 거야.”

구양수가 슬며시 말을 놓으며 뻔뻔하게 자기 얼굴에 금칠을 하였다.

‘구연강 아들놈들은 하나같이 무례하군.’

장무강이 내심 생각하면서도 봇짐장수답게 말했다.

“예, 예. 그랬습지요. 때마침 영웅들께서 와 주셔서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저분들이 호위인가?”

“신변 보호를 부탁한 분들입니다.”

“요즘 세상이 험해서 달랑 호위 두 사람으로 다니면 위험하지.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나?”

“저희 같은 하찮은 상인이 어찌 그런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가진 것도 별게 아니라 도적들도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답니다.”

장무강이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때, 뒤쪽에서 거센 기파가 밀려왔다.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제 오는군. 이래서야 천무방 진마대(鎭魔對)라고 할 수 있나.”

구양수가 뒤를 보고 혀를 찼다. 추 대주라 불린 무인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가 바로 천무방 진마대주 추위산이다.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공자 구양수는 천무방 내에서도 괴짜로 유명하다. 하잘것없는 놈들과 어울려 주루와 기방을 전전하며 지낸다.

‘그러니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밀려났겠지.’

남들이 수군거리거나 말거나 방의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이번 일도 방주 구연강이 엄명을 내려 마지못해 나온 것이다.

오는 길에 지루하다고 투덜대더니 갑자기 진마대를 훈련시켜야 한다며, 자신은 말을 타고 전력 질주를 하면서 진마대는 경공을 펼쳐 따라오라 했다.

“소인들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장무강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고 하였다.

“잠시만!”

구양수가 멈춰 세웠다. 그러더니 추위산에게 말했다.

“추 대주, 먼저 가시오. 나는 이 상인들과 함께 갈 테니.”

“이공자, 일정이 급합니다.”

“하하하. 언제부터 내가 그리 중요한 사람이었나? 나 하나 빠진다고 일이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

추 대주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여기는 대정무각의 영역입니다. 따로 계시다가….”

“변이라도 당할까 봐? 하하, 걱정 말라고. 나는 누구처럼 날뛰는 성격은 못 되지. 여차하면 도망칠 테니까.”

“대체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지금 이 상인들이 대낮 관도에서 겁탈당할 뻔한 걸 보고도 그런 소리 하나? 기왕에 구해 주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내가 마을까지 안전하게 보내고 따라가겠네.”

추 대주가 가볍게 탄식을 하였다. 괴짜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방주의 명을 받고 나선 임무 수행길에 샛길로 빠지겠다니 기가 막혔다.

“그러면 대원 몇 사람 붙여 호위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오랜만에 말을 급하게 몰았더니 속이 울렁거려. 이런 사소한 협행은 내가 할 테니 추 대주는 어서 큰일을 돌보라고.”

추위산은 더 이상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구양수는 아버지 구연강의 말도 잘 듣지 않는다.

‘차라리 그게 낫겠군.’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수하들은 본 진마대주 추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합비에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가라고. 수하들이 많이 지친 거 같아.”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끝까지 얄미운 소리를 남기고 구양수는 장무강 일행을 따라갔다.

***

노상찻집으로 젊은 유생이 찾아왔다. 유생을 따라간 곳은 번화가에 있는 커다란 주루였다.

의외였다. 대정무각의 일각주라면 보다 은밀한 장소에서 만날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많은 주루라니.

삼 층까지 올라가니 별실이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면 오실 겁니다.”

유생이 사라진 뒤 술과 음식이 들어왔다.

잠시 후 쉰이 약간 넘어 보이는 장년인이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는 순간 별실이 꽉 차는 느낌이 들어다.

정광이 번뜩이는 눈과 약간 얇은 입술, 단정한 턱수염이 눈에 들어오긴 했으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천중일검 백정무.

천하사패 대정무각의 일각주이자 십대고수의 일인.

그에게 붙는 어마어마한 수식어를 연상케 할 만한 것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소군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백정무가 가볍게 답례를 하였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백정무는 자리에 앉은 뒤 가만 강소군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부친을 많이 닮았군. 하지만 눈매는 어머니를 연상케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듣지 않나?”

담담한 목소리 저 깊은 곳에 짙은 감회가 느껴졌다.

“나를 기억하겠나?”

“같은 소리를 하신 적이 있었지요.”

강소군은 백정무를 보자 어린 시절 어느 여름밤이 생각났다.

늦은 밤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잠에서 깬 그가 무슨 일인지 아버지의 거처로 갔다.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가 인사를 시켰고 그가 한마디 하였다.

‘자네를 많이 닮았군. 하지만 눈매는 영안공주를 연상케 하네.’

‘무슨 소리! 내가 이리 잘생겼다는 말인가?’

‘아니면 어찌 영안공주께서 자네를 콕 찍어 폐하를 졸랐겠나.’

“하하. 오래전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뵙고서야 기억이 났습니다.”

“부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네. 사실 그간 미심쩍어하면서도 자네 어머니의 뜻을 존중해 조심해 왔지.”

강소군의 모친 영안공주는 아들마저 잃을까 염려하여 지인들에게 남편의 부고를 병사(病死)로 알렸다.

“미안하네.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모친의 죽음은 막았을지도 몰랐는데 안타깝군.”

“모르는 일입니다. 어쩌면 더 일찍 화를 당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백정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지. 그런데 자네 또한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듯하군. 누가 먼저 말을 하는 게 좋겠는가?”

“먼저 말씀하시지요. 경청하겠습니다.”

백정무가 자신과 강소군의 잔에 술을 따랐다.

“선황, 아니 이제 또 황제가 세상을 떠났으니 그리 부르는 것도 마땅치는 않군. 하지만 내게는 아직까지 선황이라는 호칭이 익숙하니 양해하게.”

“저도 그렇습니다. 외숙부 황제의 죽음이 너무 뜻밖이니까요.”

강소군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정무각과 인연이 있었다고 들었네. 우리가 어찌 생겨났는지 아는가?”

“들었습니다.”

강소군이 상관청유에게 들은 바로는 부친 강일부와 백정무가 영락제의 명을 받고 만든 무림 조직이었다.

목적은 혹시라도 조정 권력과 결탁하여 황실을 위협할 수 있는 강호세력을 막기 위함이었다.

백정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실의 절반만 사실이라고 볼 수 있지.”

백정무가 술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대정무각은 천황성(千皇城)를 상대하기 위해 세운 것이네. 혹 들어본 적이 있는가?”

“천황성? 제가 과문하여 오늘 처음 듣습니다. 어디 있는 성입니까?”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천 명의 황제가 있는 성이라는 뜻이다. 황궁이 있는데 누가 감히 천황성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자네만이 아니라 천황성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무네. 실제로 이 땅에 있는 성은 아니지. 하지만 사실상 이 땅의 운명을 지배하는 곳이라고 할까?”

백정무는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았다. 담담하게 말을 이을 뿐이다.

“그들의 기원은 아직 모른다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고대부터 이어왔다더군. 그동안 숱한 황조가 바뀌었는데 그들은 변치 않고 이 땅을 지배해 왔다는 거지.”

“….”

강소군으로서는 믿기 힘든 말이었다.

“나도 처음 선황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믿기 힘들었네. 자네 부친도 마찬가지였지.”

선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은밀하게 찾아온 자가 있었다.

천황성에서 온 사자(使者)가 건넨 서찰에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선황은 우리가 믿지 못하자 직접 그 서찰을 보여 줬네.”

서찰에는 ‘천황성은 천지개벽과 함께 존재해 왔으며 숱한 황조를 지켜보았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 천황성의 뜻에 반하는 황조는 삼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 하였네.”

“천황성이 원하는 바가 뭡니까?”

“황제는 하늘이 내린 천자로 군림하되 지배하지는 않는다는 것!”

강소군은 그 뜻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한마디에 담긴 내용은 사실 작은 게 아니지.”

강소군이 곰곰 생각하고는 물었다.

“성현은 백성의 뜻이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천황성은 그 뜻을 권고한 것입니까?”

“그게 아니네.”

백정무가 딱 잘라 말하고 물었다.

“이 땅에 백성의 뜻을 존중한 황조가 있었던가?”

강소군이 돌이켜 봤지만 사실상 없었다.

“그럼에도 수백 년을 이어온 황조가 하나둘인가? 삼대를 넘기지 못할 것이란 그들의 경고는 그럼 허풍이란 말이 되지.”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황성이 원하는 것은 봉건체제라네. 수많은 제후국이 독자적인 권력을 누리는 것이지.”

“그건 더욱 이해할 수 없군요. 고대 주나라 시대로 돌아가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백정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에 와서 제후국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천황성이 요구한 것은 권력의 분산이네. 사실 이름과 방식만 바뀌었지 각 지방에는 지난날 왕과 같은 권세를 지닌 호족들이 할거하고 있지 않은가?”

강소군은 그제야 천황성의 뜻을 이해하였다.

“역사는 세 가지 권력이 작동하며 바뀌어 왔네. 황실, 권문세가와 호족, 그리고 백성! 대개 백성을 놓고 황실과 권문세가와 호족이 다툼을 벌여 왔지 않은가.”

사실이다. 백성은 부의 원천이다. 생산과 전쟁, 노역 등 모든 자원이 백성으로부터 나온다.

백성이 양이라면 양을 지배하는 권한을 두고 늑대들끼리 수없이 다퉈 온 게 역사다.

강소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천황성은 황실이 지닌 중앙권력을 최소화하고 각 지방의 권문세가와 호족이 백성을 직접 지배하는 권력체제를 요구한 것이로군요.”

백정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소군은 그래도 믿기 어려웠다.

“그건 하나의 이념일 뿐입니다. 그 이념을 고대부터 이어왔다니 정말 믿을 수 없군요. 과연 천황성은 실체가 있습니까?”

“선황도 천황성의 경고를 받고 믿지 않았지. 하지만 은밀히 지난 역대 황조의 기록을 살펴보신 모양이네. 태조께서도 같은 경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지.”

백정무가 탄식을 하였다.

“천황성은 모든 황제에게 경고한 게 아니라 중앙권력을 강화하려는 황제의 경우에만 사자를 보내 온 것 같네.”

백정무가 술을 들이켰다.

“공교롭게도 역사를 보면 개혁군주들은 대개 짧게는 당대, 길게는 삼대를 넘기지 못하고 핏줄이 바뀌거나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네.”

“….”

강소군은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느 순간 강소군이 자신 앞에 놓인 술을 들어 훌쩍 마셨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백 숙부께서 저를 시험하고 계시는 것이로군요.”

강소군의 말에 백정무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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