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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 알죠, 알다마다요. 그걸 누가 모르겠어요.”
남궁령이 과장된 웃음을 흘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네가 알고 있었구나.”
남궁우가 썩은 미소를 지었다. 남궁령이 사방으로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도 입을 잘만 놀렸다.
“그럼요. 어제도 다녀왔는 걸요.”
‘으이구. 이 녀석아. 모른다고 해야지.’
남궁우의 썩은 미소가 짙어졌다.
강소군은 그런 남궁 남매의 태도가 의아했다.
흑검 등을 해치울 때 누군가 보는 이들이 있었던 것은 안다. 하지만 구경꾼이 남궁 남매와 낙서생이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천무방의 추적자들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남매가 잔뜩 경직된 얼굴로 억지로 웃는 이유를 몰랐다.
강소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포권을 하였다.
“아! 나는 강소군이라고 하오. 경성 지리에 서툴러서 여쭤본 것이오.”
강소군이 예를 취하자 남궁우와 남궁령이 화들짝 허리를 굽혔다.
“아. 그러시군요. 저희는 남궁가에서 온 남궁우….”
“남궁령이에요.”
남궁령의 머리는 땅에 처박힐 것만 같았다.
‘…?’
객잔에서 본 남궁 남매는 남궁세가의 직계답게 기품이 있고 당당했다. 심지어 남궁령이라는 소녀는 오만방자한 구석까지 있었다.
강소군은 과거 명문가 규수들의 거만함을 무수히 봤기에 당연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오해였다. 무척 싹싹한 것이 명문가의 직계들이 흔히 지닌 오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소군이 씨익, 웃었다.
오랫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온 강소군이다. 그가 웃으니 남궁 남매보다 더 이상했다.
‘헉! 뭐야? 비웃는 거야?’
남궁령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 강소군을 보고 뭔가 틀어진 게 아닐까 싶어 가슴이 떨렸다.
남궁우는 혈마와 남궁가가 얽힌 일이 있나 다시 한 번 머릿속 정보를 확인하였다.
두 사람은 강소군의 이상한 웃음이 사실은 자기 나름의 예의를 표한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그만큼 어색했던 것이다.
사실 강소군은 지난 몇 년을 극한 상태에서 살았다.
무총에서 삼 년 동안 혈기에 물든 마인들과 싸우며 살았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 항상 감각을 예민하게 세워야 했다. 당연히 인간적인 교류 따위는 없었다.
무총을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홀로 미망 속을 떠다니는 동안 그는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하였다.
무총을 나왔지만 그의 전신 감각은 여전히 전투 중이었다.
그가 적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었던 것도 여전히 전투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경에서의 폭주와 장영영과의 만남 이후 점차 그의 인성이 깨어났다. 적어도 타인과 교류를 할 정도는 된 것이다.
강소군은 남궁 남매가 웃으니 자신 역시 웃음으로 화답한 것이다.
두 웃음 모두 이상하기는 했지만.
‘이런. 정신 차려라. 남궁우.’
남궁우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직계다. 바로 자신의 추태를 깨달았다.
강소군이 너무 갑작스레 다가와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남궁세가의 직계이자 한 사람의 무인으로 상대방의 무위에 눌려 허둥지둥하다니.
‘네가 그러고서도 남궁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남궁우가 허리를 펴고 기운을 진정시켰다.
순식간에 평소 기품 있는 태도를 되찾고 나니 방금 전 행동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먼저 강소군이 묻는 것부터 답하려 했다.
그런데 남궁령이 먼저 말했다.
“아아. 팔상보탑 가는 길. 설명하기 복잡한데. 어쩌지? 제가 안내할까요?”
남궁령은 팔상보탑을 가 봤다. 명문가 규수들과 여기저기 유람을 하고 다닌 남궁령이다.
하지만 경성은 그녀 역시 처음이라 길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령아야!”
남궁령의 말에 화들짝 놀라 돌아본 남궁우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으앙.’
남궁령은 말을 하고는 바로 후회했다.
끔찍한 대마두와 동행을 먼저 제의하다니.
‘생각을 먼저 하고 말을 해.’
남궁우가 늘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평소 생각보다 입을 먼저 놀린 대가를 이렇게 치르게 됐다.
“고맙소.”
사양할 줄 알았던 강소군이 짤막하게 말하며 예를 표하고 돌아섰다.
강소군 역시 남경 명문가 강부에서 귀공자로 자랐다. 남의 호의를 사양할 줄 몰랐다.
남궁령이 해쓱한 얼굴로 자신의 오라버니를 바라봤다.
‘이 미친 것아!’
남궁우가 눈짓으로 윽박지르고는 말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너 혼자 안내한다는 말이냐. 같이 가자.”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대로로 나왔다.
반 발짝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남궁 남매를 슬쩍 본 강소군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별 뜻은 없었던 것 같군.’
강소군은 남궁 남매가 자신의 거처를 기웃거리던 걸 알고 있었다.
여느 무림인이 아닌 남궁세가다. 그들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 의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울상을 하고 따라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뜻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멀리 팔상보탑이 보이자 강소군이 돌아섰다.
“저기가 팔상보탑인가 보군요. 두 분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강소군은 남궁 남매에게 별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확인하였으니 돌려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여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제 소녀에서 여인이 된 남궁령이 어떤 인간인지는 몰랐다.
남궁령은 진중하다는 남궁세가에서 별종으로 소문난 말썽꾸러기였다. 게다가 남궁세가의 대담함은 잘도 이어받았다.
‘이 사람도 결국 피가 도는 인간이잖아?’
남궁령은 잠시 함께 걸으며 강소군이 생각보다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본연의 성격이 나왔다.
“하하하. 도움을 주려면 끝까지 주어야죠. 그게 강호의 의리 아니겠어요?”
아직 소녀티가 역력한 남궁령의 입에서 강호의 의리가 나오니 생경스러웠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더니. 하지만 이자와 연분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긴 하잖아?’
남궁우도 강소군과 안면을 틀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생각지 못한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게다가 자신이 도움을 주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하하. 저도 팔상보탑을 가 보지 못했으니 이 기회에 한번 가 보도록 하지요.”
강소군이 내심 웃었다.
남궁 남매는 때가 묻지 않았다.
거침없는 행동에서 명문가 자제 특유의 자신감이 과하기는 하지만 그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남궁령이 강소군의 옆에 붙더니 물었다.
“강 대협은 출신 문파가 어디에요?”
“나는 대협이 아니오.”
“그럼 강 소협?”
“협사가 아니라는 뜻이오.”
“아하! 그렇구나. 그렇긴 하겠네요.”
남궁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그렇긴 하겠다니, 무슨 뜻이오?”
“혈마와 협사가 어울리지 않긴 하죠.”
옆에서 듣던 남궁우가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아.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 생각 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남궁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에서 강소군이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그 무시무시한 창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강소군이 걸음을 멈추더니 남궁령을 바라봤다.
“…?”
남궁령이 작은 키는 아니지만 강소군에 비할 바는 아니다.
지난 몇 년간 굳었던 강소군의 눈빛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강소군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본 게 아님에도 남궁령에게는 무심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헉!’
남궁령은 자신의 입을 치고 싶었다.
강소군이 씁쓸하게 웃었다.
혈마.
이름부터 피가 뚝뚝 흐르는 마두의 별호다.
혈마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강소군의 생각은 다른 시공간으로 들어갔다.
‘혈마야!’
‘혈마의 저주다!’
무총에서 무수히 들었던 소리다. 적과 싸우다 무총 깊숙한 석실까지 쫓겼다.
지하에 그렇게 넓은 석실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수백 명이 들어가고도 남았다.
석실 한쪽 벽에 거대한 석상이 있었다. 고대 갑옷과 투구를 입은 석상은 마치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불행은 쫓아온 적과 교전을 하다 일어났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석상 아래가 피로 물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무도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석상에서 굉음이 일더니 입에서 핏빛 기운이 흘러나온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처럼 실체가 있는 핏빛 기운이었다. 무공이 약한 군사들은 바로 혈기에 제압되어 이지를 상실하듯 날뛰었다.
무공이 강한 이들은 내공으로 혈기를 감당하려 했으나 결국은 시간문제였다.
대부분 며칠을 버텼고 아주 뛰어난 자들만 두어 달 버틸 수 있었다.
남궁령의 입에서 혈마라는 소리가 나오자 그때 생각이 절로 떠오른 것이다.
강소군이 생각에 빠져 물끄러미 자신을 보자 남궁령이 애써 변명하였다.
“앗하하하. 그게 대협의… 아니, 소협도 아니고… 이익,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에요!”
자꾸 말문이 막히자 남궁령이 되레 성질을 냈다.
그 소리에 강소군이 정신을 차렸다.
“별거 아니오.”
강소군이 동문서답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는 아직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렀다.
‘응?’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남궁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강소군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헉! 또 왜요?”
“내가 마두 같아 보이오?”
“…!”
강소군은 묻고 난 뒤 남궁령의 표정이 해쓱해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한 질문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그렇게 말없이 행동하는 게 남들에게는 거만하거나 제멋대로 하는 괴짜로 보일 수 있다는 건 생각지 않았다. 이미 오래도록 몸에 밴 습관은 어쩔 수 없었다.
남궁령이 황급히 뒤를 따랐고 그 뒤로 남궁우가 붙으며 변명을 하였다.
“하하. 강 형께서 오해를 하신 겁니다. 세상에는 엉뚱한 별호가 붙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긴 했다.
처음 강호에서 이름을 날릴 때 붙는 별호는 그의 실체와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세월이 가며 점차 그 사람의 실체가 반영된 진정한 별호로 바뀌는 게 보통이다.
남궁우가 살갑게 다가오자 강소군도 자기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상관없소.”
이 또한 듣기에 따라 삐딱한 대답이다.
하지만 절대고수가 그러면 달라진다.
‘역시 절대고수라는 건가. 도무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군.’
남궁우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강소군이 말없이 앞서 걷자 남궁우가 남궁령의 소매를 잡아 자신 옆으로 당겼다.
‘또 헛소리하면….’
남궁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남궁령이 혀를 날름하고는 강소군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사이 팔상보탑에 이르렀다. 팔상보탑은 만천사 팔상전 앞에 있는 거대한 전탑이었다.
경내에 들어가기도 전, 짙은 향 내음이 풍겨왔다. 안으로 들어서니 여기저기 피운 향초 연기로 눈이 매울 정도였다.
“엄청나지요? 여기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뤄진대요.”
남궁령은 팔상보탑에 몰려든 인파를 보고 한마디 하였다. 선남선녀를 비롯해 전장으로 아들을 보낸 늙은 어미, 사업 성공을 비는 상인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었다.
“강 공자! 으헤헤. 강 공자라고 부르면 되지요? 소원을 빌어 보세요.”
남궁령은 확실히 걸물이었다. 방금 전 어색했던 순간은 그새 잊었다.
남궁우은 머리가 아파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질렀다.
‘으헤헤?’
저 웃음소리는 부모님과 형, 그리고 자신과 있을 때만 들을 수 있다.
채신머리없다고 어머니가 질색을 하기에 남들 앞에서는 조심을 한다고 하는데 가끔 기분 좋을 때는 남궁령 자신도 모르게 터진다.
지금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남궁우가 남궁령의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생각을 안다면 거품을 품고 뒤로 넘어졌을 것이다.
‘강호 대마두면 어떠냐. 나도 이제 절대고수를 두 사람이나 안다고.’
‘이러다 사랑에 빠지면 어쩌지? 흑백 양도를 넘나드는 비운의 남녀! 나는 정도의 운명을 위해 사랑하는 이의 심장에 검을 찔러야 하는 운명!’
‘하지만 이 사람은 너무 재미가 없잖아. 어쩌면 산속에서 수련만 하다 살짝 정신이….’
남궁령은 강호기담과 야사를 너무 많이 듣고 읽으며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