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황궁의 경계는 삼엄했다. 하지만 모든 곳이 다 그럴 수는 없다.
내관 하나가 자신의 숙소로 들어가는데 칼날이 눈앞에서 번뜩였다.
내관이 재빨리 몸을 돌리며 칼날을 비껴치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헉!”
어느새 비도가 목에 닿았다. 푸른 옥을 박아 넣은 비도 때문에 어둠 속에 푸른 빛이 감도는 듯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요? 여기는 황궁이요. 내가 소리 지른다면….”
“너는 죽겠지.”
싸늘한 음성이다. 내관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기척을 감추고 다가올 자라면 황궁을 손쉽게 빠져나갈 것이다.
그가 목을 긋지 않은 것은 용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내관이 침착하게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뭐요?”
“오 년 전 신이기 휘하에 있었더군.”
“신이기? 아!”
내관이 짧게 탄성을 질렀다.
“맞소, 그는 내 상관이었소.”
“그의 윗선이 누구였나?”
“윗선이라니. 동창의 윗선이라면 병필태감 아니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군.”
싸늘한 목소리에 내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당장이라도 남자가 비도를 그을 것만 같았다.
“동창이라는 곳을 모르시오? 상관이 하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소?”
“심복이라면 알고 있었겠지.”
“나는 그의 심복이 아니오. 그의 심복은 따로 있었소.”
“그게 누군가?”
“우 태감이라는 자로 아직 동창에 속해 있소. 그는 신이기가 실종된 후 승승장구하였소.”
“확인해 보지.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다시 오겠다.”
-휙!
바람 소리가 나는 듯싶더니 목에 닿았던 푸른 비도가 사라졌다.
내관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더니 주위를 살피고는 거처로 들어갔다.
밤이 깊어 갈 무렵 내관의 방 창문이 열렸다.
이어 흑의 무복에 복면을 한 자가 나와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황궁의 순찰과 매복을 훤히 알고 있는 듯 무인지경으로 황궁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서문 거리 골목에 있는 아담한 저택에 도착한 그가 담을 넘었다. 내원으로 간 그가 문을 두드렸다.
“쿨럭, 쿨럭, 누군가?”
쇠된 기침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났다.
“접니다.”
흑의인이 속삭였다.
문이 열리고 늙은 환관이 나타났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인가?”
“신이기를 찾는 자가 또 나왔습니다.”
“뭐라고? 이젠 귀가 먹어 잘 들리지가 않아.”
늙은 내관이 자신의 침전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옷을 갈아입고 오겠네.”
늙은 내관이 안으로 들어가 침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잠시 후 늙은 내관이 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늙은 내관이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이제 말해 보게.”
“어르신, 신이기의 행적을 수소문하는 자가 황궁까지 찾아왔습니다.”
“신이기? 신이기가 누군가?”
늙은 내관은 아무래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양이었다.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이미 궁에서 나온 퇴물일 뿐이네. 나이가 들어 지난 일이 희미하니 자세히 말해 주면 좋겠군.”
흑의인… 아니, 찾아온 내관이 답답해하며 늙은 내관에게 다가가는데 갑자기 한 줄기 비침이 그의 턱을 꿰뚫고 정수리로 빠져나갔다.
“억!”
내관은 짧은 비명을 터뜨리고 몇 걸음 걷다가 쓰러지려 하였다.
“이보게, 갑자기 왜 이러나?”
늙은 내관이 쓰러지려는 내관을 붙잡아 누였다. 그의 눈은 사방을 훑어보고 있었다.
한 사람의 신형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내가 따라온 것을 알고 있었군.”
강소군이 늙은 내관을 보았다.
순간 늙은 내관이 벽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콰당!
사방 벽에서 쇠창살이 떨어지고 늙은 내관이 있던 자리가 푹 꺼졌다.
-쾅!
동시에 엄청난 폭음이 일었다.
늙은 내관은 지하통로로 나와 멀리 떨어진 집 지붕에 올라 자신의 집을 살폈다.
“이게 무슨 일이냐?”
“갑자기 집이 폭발하다니. 어르신은? 어르신은 어찌 되었느냐?”
사람들이 몰려오고 호들갑 떠는 소리가 들려 왔다.
늙은 내관은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는 걸 확인하고 몸을 날렸다.
그가 찾아간 곳은 외곽에 있는 작은 장원이었다.
강소군은 장원으로 들어가는 늙은 내관을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고 국장도 끝났다. 그러자 경성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국장과 즉위식을 핑계로 경성에 왔던 한왕과 조왕이 커다란 장원을 하나씩 차지하고 눌러앉았다.
조정은 젊은 황제와 한왕파, 조왕파로 갈렸다.
“어서 경성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자.”
“무슨 소리야. 나는 좀 더 머물다 갈 거야.”
남궁령이 반발하였다.
“지금 경성은 전장이나 마찬가지야. 우리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는 거라고.”
“내가 보기에는 평화롭기만 한데?”
남궁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남궁령이 좋은 수가 났다는 듯 펄쩍 뛰며 말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조 낭자 집으로 가자. 거기는 명문가니까 무슨 일이 나도 안전할 거야. 조 낭자가 오라버니에게 관심이 있는 거 알아?”
조 낭자는 남궁령이 경성에 와서 사귄 벗이다.
“그거야말로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거라고. 헛소리 말고 떠날 준비나 해.”
남궁세가도 가깝게 지내는 명문가들이 여럿이다. 그런데 그 어느 집도 지금은 가까이할 수가 없다. 나중에 변고가 생겨 역적으로 몰리면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그래서 남궁우는 명문가의 신세를 지기보다는 객잔 별채를 얻어 머물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권력을 마다하고 낙향한 것이 이해가 되는구나. 강호가 흉험하다 하는데 조정은 더하군.”
남궁우가 중얼거리며 후원 쪽을 쳐다봤다.
강소군의 객실이 있는 쪽이다. 그와 인연이 있는지 이번에도 같은 객잔에 묵고 있다.
그가 나타났을 때 남궁우는 적잖이 놀랐다.
천무방에서 무력대를 풀어 그를 쫓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중상을 입은 몸으로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왔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런데 강소군은 들어와서 식사 시간 외에는 자신의 방에 처박혀 있을 뿐이다.
‘상세를 아직 회복하지 못한 건가?’
남궁우가 착각한 것이다.
강소군은 밤마다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동창의 본전에 잠입하여 신이기의 기록을 뒤져 보았으나 이상하리만치 남아 있는 게 없었다.
다만, 함께 근무했던 자들이 몇 있었는데 그중 한 내관이 걸려들었다.
그러나 내관은 퇴궁한 늙은 내관을 찾자마자 죽었다.
‘그 정도 기관에 폭약까지 쓴다면 만만치 않은 자라는 건데.’
그런 늙은 내관도 다음 날 자신의 거처에서 시신이 되어 발견됐다는 소문이다.
강소군이 바로 장원에 따라 들어가지 않은 것도 꼬리를 자르는 수법 때문이었다.
‘수하를 헌신짝처럼 팽개치다니. 대체 어떤 놈들일까?’
강소군은 아버지의 죽음이 이들과 관련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렇듯 잔인하고 대담한 자들이기에 대정비각의 각주가 당한 것일 게다.
강소군은 밤마다 장원 주위로 가서 동향을 살폈다.
장원의 주인은 퇴직한 중급관리였다. 평소 드나드는 이들도 이상한 인물이 없었다.
강소군은 소득이 없자 은근히 초조했다.
그때 초씨 남매와 황오가 찾아왔다.
“장 아가씨는 도룡회 불모의 전인이 되었습니다. 경성으로 온 뒤 행적이 끊겼습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다.
“두 사람은 어찌할 건가?”
강소군이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도룡회는 황실, 아니 황제를 노리고 있는 곳이네. 아무래도 한왕의 사주를 받는 것 같더군.”
“생각보다 복잡한 조직이었습니다. 과거 조정에 당한 여러 문파가 모이고 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도 가세하여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오합지졸 같아 보였습니다. 천마도 우문극이 부상을 입고 잠적한 뒤 대제자가 뒤를 이었는데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는 것 같더군요.”
초씨 남매는 장영영의 안위를 우려하고 있었다.
황실에 대한 복수심에 가세하였을 것은 짐작이 가나 몸을 담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보였다.
“그렇다고 아주 무시할 수도 없지.”
강소군이 조운룡을 떠올리며 말했다.
“저희는… 일단 아가씨를 찾고 적당한 틈을 보아 몸을 빼내도록 할 생각입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 장군부의 일은 사실 그가 간여할 일이 아니다.
초씨 남매와 황오가 돌아가는 걸 보던 남궁령이 강소군이 머무는 후원 쪽을 보며 인상을 썼다.
‘뭔가 비밀이 많은 자야. 강호를 제패하려는 대마두일까?’
남궁령은 강소군에 대해서 자기도 모르게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툭하면 강소군의 동태를 살폈다.
“짐이나 싸라니까,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남궁우가 물었다.
“쉿, 혈마의 거처에 수상한 사람 셋이 다녀갔단 말이야.”
“수상한 사람.”
“젊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나이든 사내가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나왔다고.”
“그 사람도 사람인데 사람을 만나면 안 되는 거냐?”
“대마두잖아. 우리가 저자를 제압하면 좋을 텐데.”
“미친 소리!”
남궁우가 화들짝 놀라 남궁령의 어깨를 때렸다.
“행여 헛소리했다가 저자의 귀에 들어가면 너는 내게 경을 칠 줄 알아라.”
평소 사람 좋은 남궁우가 이때만큼은 정색을 하고 화를 냈다.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야?”
“너는 절대고수 한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냐?”
“알지, 큰 오빠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고수인데.”
“저 사람이 형님하고 맞붙으면 누가 이기고 질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행여 형님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
남궁령이 생각해 보니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저 사람이 혈마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천무방과의 교전 때문이었어. 하지만 마두라고 할 수는 없지.”
남궁우는 세가의 정보력을 동원해 강소군과 천무방과의 은원에 대해 대략 알아본 바가 있었다.
남궁세가의 소장주는 남궁악이었으나 실질적인 소장주 역할은 남궁우가 하고 있었다.
남궁악은 무공광으로 오로지 무공에 몰두하며 살았다. 그랬기에 남궁우가 아버지를 도와 남궁가의 대소사를 처리한 지 오래다.
이번 출행도 국장과 황제의 즉위식에 참석하는 것이었지만 북경 명문가들과의 우의를 확인하고 동향을 파악하는 게 주 임무였다.
‘저런 고수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아니, 적으로 삼지 않는 것만으로도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남궁우는 강소군과 우연을 가장해서라도 안면을 트고자 했는데 좀처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괜히 섣불리 접근했다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서 신중하다 보니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헉!”
남궁령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휙,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남궁우가 보니 강소군이 후원에서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원 앞에 있었기에 강소군의 길을 가로막는 형국이었다.
두 사람이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남궁세가의 직계가 이리 긴장하여 남에게 길을 비켜 준 것을 강호인들이 알았다면 뭐라 했을까.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못 했다. 두 사람의 뇌리에는 흑검 등을 죽이던 강소군의 모습이 생생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강소군이 지나치며 의아하다는 눈길로 묵례를 하고 갔다.
‘휘유.’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강소군이 몸을 돌려 다가왔다.
두 사람이 다시 딱딱하게 긴장하였다.
“혹, 팔상보탑이 어디 있는지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