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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이 사라지자 흑의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백발 노인 등의 시신을 수습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낙서생이 나무 위에서 몸을 날리더니 싸움이 벌어진 장소로 다가갔다.
남궁우 역시 남궁령과 함께 낙서생이 선 곳으로 향했다.
“엄청난 싸움이었습니다. 그자가 혈마라니 놀랍군요. 이십 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이런 무위를 지니고 있다니.”
낙서생은 싸운 흔적을 돌아봤다. 흙이 파이고 바위가 깨지고 나무가 부러졌다. 폭풍우가 쓸고 간 듯 엉망이었다.
남궁령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그녀는 이렇게 참혹한 혈투를 처음 봤다. 피가 튀고 살이 찢겨 나가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녀는 목이 잘리고도 걸어가던 백발 노인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리고 토할 것만 같았다.
“죽은 사람들은 천무십객의 일객 흑검과 이객 우중혈, 삼객 망혼소였습니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고수들이었는데 황량한 토지묘의 귀신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낙서생은 식견이 풍부했다. 단번에 강소군과 싸운 자들을 알아보았다.
“그자도 부상이 꽤 심하겠더군요. 흑검에게 배를 찔리고 어깨를 찍혔으니 심각할 겁니다.”
“그렇더라도 정말 놀랍군요. 천무십객 중 세 사람을 단신으로 해치우다니요.”
“세 사람만이 아닙니다. 십객 중 아홉이 그에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혈마라 불릴 만하군요.”
“천무방에게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마인 같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남궁우도 객잔에서 본 강소군을 떠올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싸늘해 보이기는 했으나 악인 같지는 않았다.
“천무방 사람들이 왜 그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남궁령이 물었다.
“그가 천무방 삼공자를 죽였다더군요. 그래서 구연강까지 직접 나서서 잡으려 했는데 무력대 절반이나 잃고 고수들까지 무수히 희생되었는데 놓쳤답니다.”
세 사람은 걸어서 객잔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싸움을 함께 보고는 묘한 동지감을 느꼈는지 낙서생이 포권을 하였다.
“오늘 남궁세가의 이공자를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저야말로 강호에서 가장 식견이 높다는 분을 뵈어 반가웠습니다. 후일 강남으로 오시면 남궁가에 꼭 들리시기 바랍니다.”
“하하. 남궁세가의 초대를 받다니 정말 영광이군요. 꼭 찾아뵙지요.”
말을 마친 뒤 낙서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궁령이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 신법이 대단한 고수군요.”
남궁령은 객잔에서 자리를 양보한 걸 보고 낙서생과 일행을 경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명망에 눌려 알아서 자리를 내주었으니 이름 없는 무림인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사라지는 신법을 보니 자신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강호에서는 언제 어디서 고수를 만날지 모른다. 항상 예의를 다하지 않으면 언제 네 머리가 날아갈지 모른다.”
남궁우가 웃으며 겁을 주었다.
남궁령은 다시 목이 잘린 시체가 떠올랐고, 먹은 음식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남궁우가 무사들을 찾아 뭔가 지시를 하였다.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슨 일이야?”
남궁령이 물었다.
“나중에 알려 주지.”
두 사람은 객잔에 들어 방을 잡았다. 피가 튀는 혈전을 보고 나니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밤이 깊었을 때 무사들이 돌아왔다.
“인근 백 리까지 가 봤는데 그 자의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
남궁우는 무사들의 보고를 받고 속으로 생각했다.
‘의외로군. 부상이 꽤 심했을 텐데 백 리 밖을 벗어나다니.’
남궁우는 강소군이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기고 무사들을 풀었는데 소득이 없자 실망하였다.
***
경성 외곽의 장원.
사두마차 한 대가 와서 멈췄다. 뒤따르는 기병이 수백이었다.
장원의 문이 열리고 구연강이 나왔다.
호위병 하나가 마차의 문을 열자 체구가 거대한 중년인이 내렸다.
“왕야를 뵙습니다.”
구연강이 포권을 하였다. 중년인은 한왕 주고후였다.
한 사람은 무림의 패자였고 또 한 사람은 천하를 도모하려는 자였다.
주고후가 크게 웃었다.
“하하. 드디어 천무방주를 만나는구려. 이리 직접 마중을 나오다니 영광이오.”
“당연히 나와야지요. 들어가시지요.”
구연강이 직접 장원으로 안내하였다.
두 사람이 객청에 들자 시비가 차를 가지고 왔다.
“천무방이 경성에까지 진출하였을 줄은 몰랐소.”
장원은 천무방의 안가였다.
“그저 쉴 곳을 하나 장만한 것뿐입니다. 도룡회가 건재한데 어찌 이 땅을 넘보겠습니까?”
구연강은 도룡회의 배후에 한왕이 있는 걸 안다.
주고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말했다.
“이번 일이 잘되면 무림은 천무방이 장악하게 될 것이오.”
“도룡회가 순순히 따르겠습니까?”
“그리될 것이오.”
주고후가 장담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이번 거사에 천무방이 협조만 한다면 도룡회를 넘겨주겠소.”
주고후는 국장이 끝난 직후 바로 거병을 할 생각이었다.
“내가 직접 군사들을 끌고 경성 외곽에 진을 칠 것이오. 태자의 군사들이 몰려나오면 천무방의 고수들이 황궁으로 진입하여 태자를 잡아 주시오.”
“도룡회가 있지 않습니까?”
“도룡회주 우문극이 중상을 입고 잠적하였소. 그가 없는 도룡회로는 대정무각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오.”
구연강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근 본방도 강적을 만나 무력 손실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니 도룡회를 전면에 내세워 대정무각의 이목을 끌어주시지요.”
“하하. 그렇게 하겠소. 과연 천무방주께서는 시원시원하구려. 함께 천하를 도모해 봅시다.”
주고후는 구연강이 순순히 승낙하자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주고후가 돌아가자 뒷방에 있던 조개량이 걸어 나왔다.
“군사의 말대로 한왕의 청을 들어주었소.”
“이번에 도룡회와 대정무각이 다시 부딪치면 서로 간에 원한이 깊어 끝장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비어 있는 땅에 걸어 들어가면 될 것입니다.”
“한왕을 사로잡을 계획은 마련되어 있는가?”
“그건 염려 마십시오. 한왕이 고수라지만 천살 어르신이 나선다면 반드시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조정의 일에 개입한다는 게 어쨌든 꺼림칙하군.”
“정통성은 태자에게 있습니다. 한왕이 권력을 쥐면 천하의 영웅들이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방도 휩쓸리게 되겠지요. 한왕을 잡아 태자에게 넘기는 게 최선의 수입니다.”
구연강과 조개량은 이미 태자 주첨기와 손을 잡았다. 한왕이 거병하면 협조하는 척하다 배후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놈은 어찌 됐는가?”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흑검 등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놈도 중상을 입고 도주 중이라고 합니다.”
“결국 천무십객이 모두 당했군.”
“어차피 그들은 그럴 용도로 들인 것 아닙니까? 그놈에게 부상을 입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한 것입니다.”
“더 이상 무력 손실을 보면 안 된다. 절대 싸우지 말고 이쪽으로 몰기만 하라고 해. 그놈은 내가 직접 잡겠다.”
“신무와 참룡이 몰고 있습니다. 조만간 이쪽으로 올 것입니다.”
***
강소군은 상처를 꿰매고 금창약을 발랐다. 낙서생은 중상을 입었다고 봤으나 실제 강소군의 부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흑검은 과연 천무 일객다웠다. 그의 검이 복부를 찔러 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금룡기가 결집하며 기이한 반탄력이 생성되었다.
흑검은 회심의 일검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막히자 순간 주춤하였다. 그 간발의 차이로 강소군은 그의 목에 청옥비도를 꽂을 수 있었다.
강소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주위에 은신한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마치 자신들이 있음을 알아달라는 듯했다.
퇴로는 한 곳뿐이었다.
강소군은 그 길 끝에 죽음의 매복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걸 짐작했다.
하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강소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금룡기를 운용하였다.
***
“황제가 돌아가셨네. 아무래도 변고가 있을 것 같아 모두 출정을 하게 됐네.”
유문광은 산 아랫마을에 있던 대정무각의 숨은 힘을 모두 끌고 경성으로 갔다.
청련지에는 중랑과 연화심, 그리고 심마백만 남았다.
“대체 대형은 어디를 헤매고 있는 건가?”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심마백이 투덜거리다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헛것을 다 보나 보다. 장 대형 같은데?”
옆에 있던 중랑이 보니 두 사람이 청련지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무강과 위응환이었다.
중랑과 심마백을 본 두 사람이 신법을 펼쳐 달려왔다.
“마백, 이제 걸어다닐만 한가 보군.”
장무강이 크게 웃으며 심마백을 부둥켜 안았다.
“켁켁, 아이고. 형님, 그렇게 우악스럽게 껴안으면 어쩌란 말이요.”
핀잔을 주면서도 심마백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을 위해 머나먼 운남까지 갔던 의형제들이 무사히 돌아오니 마음이 놓였다.
“마백 형. 이게 다 지령복혈초야. 이제 그 음적의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 거야.”
위응환이 등에 진 봇짐을 내려놓았다.
소식을 듣고 연화심이 나왔다.
“연 낭자. 마백을 잘 돌봐주어서 고맙소.”
“장 대협을 다시 뵈니 정말 반갑네요.”
숱한 혈전을 치르며 가까워진 다섯 사람이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나니 혈육이 모인 듯 반가웠다.
중랑이 동약사 중유선이 준 약방문을 가지고 왔다. 약방대로 약재와 지령복혈초를 넣고 탕약을 끓였다.
탕약이 달여지자 심마백이 한 모금 마시고는 인상을 썼다.
“무슨 약이 이렇게 비리지?”
“다 큰 놈이 투정 부리기는. 일주일 정도 달여먹으면 된다고 하였으니 어서 다 마시라고. 이걸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장무강이 그릇을 잡고 심마백의 입에 탕약을 부어넣었다.
심마백이 탕약을 다 마시자 장무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마백아, 할 이야기가 있다.”
중랑이 연화심에게 눈짓을 했다. 산동삼호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빠지자는 뜻이었다.
“아니, 있어도 괜찮네. 자네는 남이 아니지 않은가.”
장무강이 중랑을 주저 앉혔다.
“마백아, 장 공자를 만났다.”
“장 공자라니요?”
“장선백 장군 말이다.”
“뭐라고요?”
심마백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장홍 대장군 소식도 들으셨소?”
장무강의 안색이 침중하였다.
“장홍 대장군과 장 공자는 선황의 추살을 피해 운남으로 가셨더구나. 그런데 장홍 대장군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으셨고, 결국 운남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
심마백이 탄식하였다.
장무강이 중랑과 연화심을 향해 말했다.
“두 사람도 눈치챘겠지만 우리는 장홍 대장군 휘하에 있었소. 선황제가 역모로 장 장군가를 폐족시키고 장연보 노장군을 사사했을 때 많은 장수들도 함께 죽임을 당했소.”
세 사람은 간신히 군문을 탈출하여 산동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장홍 대장군이 피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행적을 쫓다가 악양에서 놓치고 말았다.
이후 모홍객잔을 운영하며 장홍 대장군의 소식을 기다렸다.
“장 공자는 그럼 지금 운남에 계시오?”
“아니, 함께 중원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운남에서 세력을 키우셨더군.”
소식을 전하는 장무강의 안색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세력이라뇨?”
“과거 장 장군부의 고수들을 모아 번천맹을 세웠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