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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았나.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고.”
철권호가 두 손을 맞잡아 깍지 끼더니 우두둑 꺾었다.
“제대로 한번 해보지.”
강소군은 금단진공을 운용하였다.
지난번 폭주 이후 전신에 퍼져 있던 혈룡기가 금단진공과 서서히 융합되어 가고 있다.
오랫동안 그의 육신을 지배하려 들던 혈룡기가 어쩐 일인지 그의 기운과 동화되어 갔다.
금단진공으로 쌓은 내공은 두터웠으나 혈룡기와 같은 맹렬함이 부족했다.
반대로, 혈룡기는 폭발적인 강맹한 힘을 지녔으나 제어를 하기 어려웠다.
금단진공과 혈룡기가 융합되어 가며 장단점이 동시에 나타났다. 중후장대한 내공이 형성되고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 무척이나 더디다는 게 단점이었다.
새로이 형성되는 기운은 금단진공도 혈룡기도 아니었다.
강소군은 이를 금룡기라고 칭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금룡기는 완전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육신이 내공을 감당하지 못했다.
강소군은 어려서부터 육신의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새로이 형성되는 금룡기를 제대로 운용하기에는 벅찼다.
금룡기는 이제 고작 삼성에 이르렀지만 육신은 한계에 다다라 제대로 펼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삼성만으로도 강소군은 내공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강소군이 한 손을 뒤로하고 수결을 맺은 뒤 다른 한 손을 가슴 앞에 비스듬히 세웠다.
무당 장법의 기수식이다.
-콰광!
철권호가 한 발을 내딛자 비무대가 박살이 났다. 거센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지켜보는 이들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비무대가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졌으나 강소군은 이미 여파에서 벗어난 후였다. 그는 마치 깃털처럼 천천히 내려섰다.
철권호가 다시 한 발을 길게 내디디며 쌍권을 질렀다.
왼손은 강소군의 얼굴을 노리고 오른손은 심장을 가격하기 위해 쭉 뻗었다.
그야말로 정직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두 주먹이 나아가는 힘과 속도는 그야말로 광폭 그 자체라 할 만큼 난폭하고 빨랐다. 이 한 쌍의 주먹에는 상대가 운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기세가 담겨 있었다.
강소군은 두 마리 쌍룡이 쏘아져 오는 듯한 권세를 경시할 수 없었다.
한 발을 비스듬히 빼며 세웠던 손을 휘저어 위로 날아드는 권을 감고 아래로 들어오는 권은 흘렸다.
권세가 흐트러지는 순간 철권호가 다시 한 발을 내디디며 권을 연달아 질렀다.
철권호의 권은 갈수록 빨라졌다.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두 사람 사이에 주먹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다.
강소군은 주먹 그림자 속에서 권세를 흘려내고 있었는데 동작이 크지 않았다. 옷자락이 권세에 휘말려 사정없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강소군의 팔은 태극의 도형을 따라 원을 그렸다.
“합!”
철권호는 강소군의 양손에 어린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중후하면서도 강맹한 기운이 그의 권세를 흐트러뜨려 적중하는 공격이 없었다.
철권호는 전신의 내력을 폭발시켜 권에 담았다.
순간 그의 주먹이 갑자기 서너 배 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권강이다!”
“오!”
사람들은 홀린 듯 비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들 모두가 이런 싸움은 듣도 보도 못했다.
강소군의 손이 빠르게 회전하였다. 양손이 마치 원을 그리듯 빠르게 회전을 하더니 철권호의 손에서 터져 나온 권강을 감싸 옆으로 흘렸다.
권강의 기세가 너무나 강맹하여 멀리 흘려보내지 못했다. 권강은 반 장 거리의 땅에 꽂혔다.
-쾅!
권강이 떨어진 자리가 폭발하며 삼 장 높이까지 흙이 치솟더니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강소군과 철권호는 흙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흙연기가 걷히자 철권호와 강소군 둘이 마주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좋군. 이만하지.”
철권호는 자신의 권강을 막을 자는 십대고수 정도라고 생각해 왔다.
강소군이 권강을 흘려보내자 상대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들었다.
“손에 사정을 두어 감사하오.”
강소군 역시 요천루주 이후 처음으로 벅찬 상대를 만났다. 요천루주의 사이한 무공과 달리 광명정대한 철권호의 권은 진짜였다.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네.”
철권호가 슬쩍 주고수 쪽을 보더니 장내에서 사라졌다.
강소군이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피했다.
방금 강소군과 철권호가 보여 준 것은 그야말로 매화자의 이야기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천외천의 경지였다. 감히 눈을 마주할 자가 없었다.
강소군도 말없이 장내를 벗어나 말에 오르더니 사라졌다.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어.”
강소군이 가고 나자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를 듣는 방연소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
철권호의 권강을 흘려내기는 했으나 함께 들이닥친 권기까지 해소할 수는 없었다.
강소군은 가벼운 내상을 입고 며칠간 자신의 거처에서 정양을 해야 했다.
내상이 회복되자 강소군이 모상을 찾았다.
“총관께서는 접객당에 계십니다.”
하인의 말에 접객당으로 가니 앞마당에 궤짝과 상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상자를 하나하나 열어 검사하던 총관 모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강부가 다시 대문을 열었음을 축하하는 선물입니다.”
“선물이라고요?”
“권문세가의 속성이 뭐겠습니까? 힘이 있는 쪽으로 붙는 거지요. 지금 남경부에 공자의 명성이 대단합니다.”
강부의 공자가 철권호와 막상막하를 이루는 고수라는 소문이 퍼지며 남경부에서 이름 좀 있다는 세가들이 선물을 보내 왔다.
남경부의 권력은 방부와 호부가 양분하고 있다. 방부는 조정의 권력이 강하고 호부는 지지하는 세가들이 많았다.
이 둘 사이에 끼지 못하는 세가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강부의 주인이 돌아와 대문을 열자 온갖 선물을 보내 왔다.
사례회에서 드러난 것은 태자가 강부를 신임하고 있고 강소군이 무공의 고수라는 사실이었다.
힘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고 그 모인 사람이 다시 힘이 되어 권력으로 화한다.
남경부에서 방부와 호부에 속하지 않은 세가들이 강부를 전면에 내세워 또 하나의 권력을 만들어 내려 하는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십 분의 일도 안 됩니다.”
모상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공자께서 관직에 나가시면 저승에 계신 국공 부부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텐데….”
모상은 강소군에게 관직을 맡으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다. 관부에 이름을 걸친 것과 야인으로 있는 건 차이가 컸다.
강소군이 웃으며 말했다.
“차차 기회가 있을 겁니다. 진 포두의 사인은 밝혀졌습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이 일을 마치고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모상이 하인들에게 선물을 창고로 옮기라고 지시하고는 강소군과 함께 내원으로 갔다.
하인도 물리고 둘이 남자 모상이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의원이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사인을 알아냈습니다.”
강소군이 문서를 받아 펼쳤다. 모상이 설명하였다.
“화혈고라는 충이었습니다.”
“화혈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하더군요. 호흡을 통해 폐로 들어가서 장부를 갉아먹는다는군요.”
“….”
“사막 어딘가에 있는 오지에서 볼 수 있는 벌레라고 합니다.”
“사막이라고 했습니까?”
강소군이 되물었다. 사막의 독충이 남경에 나타나다니 의외였다.
모상이 이를 갈았다.
“국공 부부와 진 포두에 이르기까지 십여 년에 걸쳐 일어난 일입니다. 흉수가 꽤나 오랫동안 남경에 머물렀다는 뜻이지요. 방연소가 틀림없습니다.”
모상은 방부를 의심하였다. 진운초는 남경 조정에 흐르는 암류의 배후를 방연소로 보고 조사를 해 왔다. 그랬기에 방부에 대한 조사는 따로 숨겨 두었던 것이다.
강소군은 모상과 생각이 달랐다. 진운초가 남긴 기록을 수차례 읽어 봤다.
남경부 권력을 두고 방부와 호부가 다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언급한 조정의 암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권문세가의 권력다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진 포두가 방부를 조사한 지 몇 년 됐지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손을 쓸 이유가 있을까요?”
강소군은 왠지 자신이 조사하라고 시킨 동창과 금의위가 마음에 걸렸다.
진운초가 새로이 맡은 임무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둘을 연결하기에는 근거가 너무 희박했다.
“진 포두는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지요. 하지만 결국은 방부에 노출이 되고 만 거죠.”
모상이 답했다.
하지만 강소군은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하였다.
“일단 비슷한 죽음이 지난 십여 년 사이에 있었는지 알아봐야겠군요. 누가 이 수법에 당했는지 안다면 흉수의 윤곽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주공의 사인을 밝혔으니 알아볼 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모상은 용의주도하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모상의 심복이 황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경성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황제께서 붕어하셨답니다.”
***
황제가 즉위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온 세상의 이목이 태자 주첨기에게 쏠렸다.
남경에 머물던 태자가 황급히 경성으로 떠났다.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황실의 일원으로 국장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이 욕할 것입니다”
모상은 강소군이 경성으로 가서 국장에 참여하기를 바랐다. 태자가 황제로 즉위하면 가까이 지냈던 강소군을 중용하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강소군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락가락하는 게 분명해.’
모상은 강소군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이 달아 발만 구르는데 뜻하지 않은 객이 찾아왔다.
대정무각의 오각주 상관청유였다.
“강 공자, 갑자기 찾아와 놀라셨을 것이오.”
강소군의 뇌리에 자연히 연화심과 중랑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나도 강 공자의 신분을 알았을 때 무척 놀랐소. 진즉 본명을 밝혔더라면 사소한 오해는 없었을 것인데.”
상관청유는 육안 상관부에서 강소군을 압박하여 떠나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였다.
“마음에 둘 것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실은 찾아갈 게 있어서 왔소.”
“찾아가다니요?”
“대정무각에 십각이 있음을 알 것이오. 세상도 그리 알고 있소.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일각이 하나 더 있소. 대정무각은 원래 십일각이었소.”
상관청유가 모상을 바라보았다. 모상이 대신 말했다.
“대정비각, 돌아가신 국공께서는 사실 대정비각의 각주셨습니다.”
강소군은 어리둥절해하였다.
아버지는 공주의 부마이자 황제의 측근이었다. 그런데 대정비각의 각주라니.
“대정비각은 조정에 있습니다. 누가 비각의 일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각주셨던 국공께서만 알고 계시죠.”
강소군이 모상을 바라보았다. 모상은 단순한 총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저도 비각의 일원이지만 강부의 총관으로 보좌하는 역할이 전부였습니다. 비각은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되기에 모든 일은 국공께서 직접 처리하셨지요. 제가 아는 건 극히 일부입니다.”
강소군은 갑작스런 사실에 내심 놀랐다.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청유를 상대하는 게 우선이다.
“찾으실 물건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국공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비각이 말 그대로 수면 아래로 잠적하고 말았소. 비각을 다시 움직이려면 조직도와 명단이 필요하오.”
강부에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상관청유는 대정비각을 되찾으러 온 것이다.
황제가 연달아 죽고 아직 어리다 할 수 있는 태자가 즉위하면 격렬한 권력투쟁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더욱이 한왕이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다.
황실을 비호하는 대정무각으로서는 비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강소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안타깝지만 도움이 안 되겠군요. 제게는 비각의 명단이 없습니다.”
상관청유의 안색이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