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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모여 있는 이들은 한시바삐 자리가 파하기만 바랄 뿐이었다.
마치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말 한 마디 잘못 오가면 바로 전쟁이 벌어질 판이다.
주고수의 군사와 권문세가 일족의 사병이 합세한 병력은 금군과 대동소이했다. 일전을 벌이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권문세가 일족은 남경으로 돌아가 후일을 도모할 생각뿐이었다.
주첨기 역시 다음 수를 찾기로 하고 오늘은 물러설 참이었다.
그런데 방연소가 느닷없이 강소군을 물고 늘어지니 모두 좋지 않은 눈길을 보냈다.
방연소는 개의치 않았다. 남경부에서 방부는 황제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비록 호부가 견제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방부를 한 수 위로 쳐준다.
방연소는 방부의 사병도 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의심이 많은 방연소는 만일을 대비해 사례회가 열리는 장소 인근에 사병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첨기가 갑작스레 행동을 하는 바람에 자칫 위험에 처할 뻔했다.
‘이 나라가 너희 것인 줄 아느냐?’
방연소는 하마터면 죽을 뻔하자 독심을 품었다.
강소군을 이 자리에서 잡아 아들의 복수를 하는 한편 주첨기에게 경고를 할 속셈이었다.
강부가 황실의 외척이나 이미 권력에서 멀어진 집안이다. 권문세가 일족이 일제히 호응을 하면 잡을 수 있다고 봤다.
방연소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다.
“강 공자는 군문을 이탈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병대장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태자전하를 위해 할 뻔했습니다.”
“위해 하다니?”
주첨기는 강소군에게 미련이 있었다. 어렸을 적 태후전에서 함께 뛰놀았을 때는 말 잘 듣는 동생이었다.
또한 강소군이 대정무각의 각주들도 무시 못 하는 고수라는 사실도 알았다.
주첨기는 장홍 대장군 일가 사건으로 강소군이 불만을 품고 있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곁을 지켜 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다. 강소군을 얻는다면 그가 황제로서 군림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화살을 하늘로 쏘아 하마터면 태자께서 다치실 뻔한 걸 모두가 보지 않았습니까?”
방연소가 태연하게 말했다.
“태자전하를 위험에 처하게 한 일은 묵과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호부의 수장이 거들었다. 남경부 양대 세력으로 방부와 늘 맞서던 호부가 웬일로 방연소를 지지했다.
주첨기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휘아와 나는 함께 변방의 적과 싸웠던 장수요. 전장에서 하던 놀이를 한 것뿐인데 모두를 놀라게 한 모양이구려.”
주첨기가 웃어넘기려 했으나 방연소가 다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나라에 법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백성이 말을 듣지 않는 법입니다. 죄가 있으면 황실의 외척이라 해도 당연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강소군이 앞으로 나섰다.
“내게 무슨 죄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군.”
방연소의 눈에 음험한 빛이 스쳤다.
“첫째, 군문을 무단이탈하였고 둘째, 법을 집행하는 관병대장을 해하였지요.”
“흐음. 거기에 방일옥이라는 놈을 때려 준 죄는 추가하지 않는 걸 보니 사적 복수는 아니라는 것이로군.”
강소군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강소군이 노대신에게 하대하니 모두가 불편해하였다. 심지어 주첨기도 의아해했다.
‘휘아가 어쩌다 성정이 이리 변했을까?’
강소군이 품에서 첩지를 꺼내 방연소에게 던졌다.
첩지를 받아든 방연소가 읽다 말고 안색이 변했다.
첩지는 동북변방군 대장군이 내린 명령서였다.
「백부장 강휘는 백 명의 군졸을 이끌고 일천에 이르는 적과 싸워 이겼다. 그 와중에 홀로 적진에 낙오하였으나 고군분투하여 명군의 이름을 높인 공로가 크다. 또한 오랫동안 적진에서 싸우느라 심신이 쇠약하였으니 귀향 조치를 한다.」
강부 총관 모상은 용의주도한 자였다.
강소군이 돌아왔을 때 어딘가 이상함을 알았다. 동북변방군에 사람을 보내 강휘의 귀향명령서를 받아 두었다.
“으흠, 오해가 있었나 보구려. 하지만 두 번째….”
“관병대장 말이오?”
강소군이 말을 잘랐다.
“그는 감히 정식 공문도 없이 강부의 문턱을 넘어 나를 취조하려 했지. 더욱이 나를 방일옥 암습 사건의 배후로 의심하더군. 강부가 아니라도 여기 그 어느 집안도 그런 모욕은 참지 못할 것이다.”
강소군이 한 말의 핵심은 호극검이 사적으로 와서 무례를 범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그가 정식 공문을 가지고 오면 그때는 아는 대로 순순히 말해 주지.”
강소군은 방연소를 주시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방일옥은 괜찮은가? 나는 그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고 교훈을 주었는데 새겨들은 것 같지 않더군.”
“그게 무슨 소리요? 자식의 교육은 부모가 시키는 법. 어찌 감히….”
방연소는 흥분하여 감히, 라는 말을 내뱉었다가 흠칫, 집어삼켰다.
“그래서 자식의 죄는 부모가 책임을 지는 법이지. 하지만 연로한 대학사에게 책임을 묻고 싶지는 않군. 하지만 방일옥이 남의 목숨을 취하고자 할 때 자기 목도 내놓을 각오를 했는지 묻고 싶군.”
강소군의 말에 방연소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강소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지 못할 방연소가 아니다.
“호부 역시 마찬가지요. 호부의 사람을 다치게 할 때 뒷감당을 각오했는지 묻고 싶소.”
혈기왕성한 호일도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호부의 수장이 말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힘이 부족하면 목숨을 내놓는 일도 다반사인데 한 대 얻어맞은 게 호부에게는 그리 큰일인가?”
“하하. 그렇다면 강부도 마찬가지 아니오? 힘이 부족하면 맞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호일도는 귀하게 자란 데다 검의 명문 남궁세가에서 무공을 익혀 천하에 겁나는 게 없었다.
호일도는 남궁세가의 소장주 창천무룡 남궁악으로부터 큰 신임을 받고 있다.
창천무룡이 누군가.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무인이다.
호일도의 눈에 강휘는 변방의 일개 장수일 뿐이다. 호부를 모욕한 강휘를 이 자리에서 톡톡히 욕보일 심산이었다.
주첨기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강호를 진동시키는 혈마가 누군지 모른다는 말인가? 이들 권문세가들은 자신들의 세도만 믿고 함부로 날뛰니 크게 다치겠군.’
주첨기는 오늘 이 자리에서 억지를 쓰더라도 권문세가 일족을 죽이려 했다.
돌연 주고수가 나타나 훼방을 놓아 심기가 불편했는데 상황이 강소군과 남경부 권문세가 간의 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주첨기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어떻게든 남경부 권력을 휘어잡고 있는 토호 출신의 권문세가들이 약해지면 그로서는 이득이었다.
주첨기가 나서서 말했다.
“오늘 사례회는 엉망이 되었군. 하지만 뒤끝을 남기고 돌아갈 수는 없지.”
주첨기가 호일도와 강소군을 향해 말했다.
“호부와 강부가 자존심을 걸고 싸운다면 내가 보증인이 되어 주지.”
호일도가 재빨리 주첨기에게 포권을 하였다.
“태자님께서 비무를 주관하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네가 무덤을 파는구나.’
주첨기가 속으로 비웃으며 강소군에게 말했다.
“강부에 도전을 한다는구나. 어찌하겠느냐?”
강소군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강부를 경시하는 자를 그대로 둘 수 없지요.”
“하하하! 좋지 좋아! 우연잖게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의 비무를 보게 되다니. 이거 참 흥미롭군.”
주고수도 나서서 비무를 독려했다. 강소군의 무위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대가 졸지에 비무대로 바뀌었다.
강소군이 호일도 쪽을 보니 한 무리의 귀공자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부 말고도 또 도전하고 싶은 자가 있나?”
강소군이 권문세가 일족의 귀공자들에게 말했다.
“기회가 있다면 나도 도전해 보겠소.”
언제 어느 자리든 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다. 더구나 이들은 각자의 집안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귀공자들이다.
강소군을 보니 백부장이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무공의 고수라면 양쪽 태양혈이 불룩 튀어나와 그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강소군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러니 무공에 자신이 있다는 귀공자 몇몇이 나섰다.
조중예도 나서려는데 아버지 이부상서 조옥이 옷깃을 붙잡았다. 조중예가 아버지를 돌아보니 나서지 말라는 눈짓이다.
조중예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자네들에게 돌아갈 기회는 없을 걸세. 내가 저 건방진 자를 단단히 혼내 줄 것이니.”
호일도가 강소군에게 도전한 귀공자들에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모두 올라와라.”
강소군이 비무대가 된 사대에 올라 말했다.
“저런, 오만방자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방일옥을 제압했으니 한 수가 있는 게 분명해.”
비무대 아래서 의견이 분분했다.
호일도가 검을 들고 나는 듯이 비무대로 올랐다.
“무기를 들어라!”
호일도가 강소군이 빈손인 걸 보고 호기롭게 외쳤다.
“죽고 싶으냐? 내 손에 무기가 들리면 너는 죽는다.”
강소군이 손을 저었다. 무기도 필요 없다는 뜻이다.
호일도의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자식, 죽여 버리고 만다.’
태자가 공증하는 자리이나 검에는 눈이 없으니 실수를 가장하여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호일도는 남경 세도가 사이에서 늘 방일옥과 함께 맞수로 거론되었다.
한 사람은 소림의 속가제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남궁세가의 제자였으니 화제가 될 만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실제로 싸워 본 적은 없다.
호일도는 늘 자신이 방일옥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입증하고 싶어 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강소군이 돌연 방일옥을 때려눕혔다. 그러니 강소군을 제압하면 자신이 방일옥의 위라는 게 자연 입증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호일도는 이번 한 수로 방부보다 호부가 위라는 걸 각인시키고 호극검의 복수도 할 참이었다.
그러니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흐흐흐. 과연 강부의 공자는 오만방자하구나. 좋다!”
호일도가 한 발을 내디디며 검을 뽑았다. 비스듬히 검을 치켜든 건 남궁세가의 창룡검법의 기수식이다.
강소군도 남궁세가의 검법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들은 바 있다.
남궁세가의 절학 창궁무애검법은 직계 혈족에게만 내려온다. 그러나 창룡검법 또한 창궁무애검법에 필적할 만한 절학으로 꼽혔다.
남궁악의 별호가 창천무룡인 것은 창룡검법만으로 무수한 고수를 꺾었기 때문이었다.
-쉬이익!
호일도가 한 발을 내딛더니 순식간에 강소군과의 거리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