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76화 (7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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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온 사람은 호일도 또래의 귀공자였다. 단상에 오른 귀공자가 주첨기에게 예를 취했다.

“조중예라고 합니다.”

주첨기 옆에 있던 이가 귓속말로 말했다.

“이부상서 조옥의 아들입니다.”

조중예는 가지고 온 활에 화살을 걸더니 역시 연달아 열다섯 발의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모두 과녁 중앙에 적중하였다.

“오!”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감탄하였다. 빠르기가 호일도 못지않았다.

조중예가 예를 취하고 사대를 내려갔다.

뒤이어 남경부에서 한가락 하는 권문세가 일족의 자제들이 올라 화살을 쏘았으나 호일도와 조중예의 기록을 깨뜨리지 못했다.

“방부의 공자가 무공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왜 오지 않았소?”

주첨기가 방연소에게 물었다.

“송구하게도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방연소가 이를 갈며 강소군을 쳐다봤다. 방일옥은 이제 남경부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신세다.

“아쉽게 됐군요.”

주첨기가 말을 마치고 일어나더니 사대에 올랐다. 태자를 상징하는 황포를 입은 그의 전신에서 위엄이 흘렀다.

그 역시 활에 화살을 걸고 연달아 쏘았다. 열다섯 발 모두 과녁에 명중하였다.

“역시 태자님이십니다!”

아첨꾼들의 칭찬이 빗발쳤다.

“가만있는 과녁을 맞히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주첨기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과녁 쪽에 사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주첨기의 호위군들이 양쪽을 막고 있어 사슴은 도망갈 곳이 없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기만 할 뿐이다.

“누가 저 사슴을 쏘겠느냐?”

사대 아래 앉은 수많은 사람들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침묵이 사례회장에 흘렀다.

사슴을 쏜다는 건 천하를 도모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주첨기가 남경으로 오는 도중 기습을 받아 이리저리 쫓겨 다녔다는 걸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안다.

한왕군과 도룡회에 쫓겨 다녔으나 사실 남경부 누군가 내응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주첨기는 저 앞에서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뛰어다니는 사슴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첨기는 지금 반역자를 색출하려 하는 것이다. 모인 사람들은 오늘 사례회 자리의 의미를 깨닫고 사색이 되었다.

“저 사슴을 맞추는 자를 오늘의 장원으로 하지.”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주첨기가 조중예를 보고 말했다.

“네가 한번 쏴 보지 않겠느냐?”

조중예가 예를 취하고 말했다.

“소인은 그저 건강을 위해 과녁에 활을 쏘았을 뿐입니다. 살아 있는 과녁은 맞춰 본 적이 없어 자신이 없습니다. 감히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조중예가 물러나니 주첨기가 호일도를 쳐다보았다.

호일도 역시 감히 활을 들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주첨기가 일일이 장내의 사람을 돌아보는데 한결같이 시선을 피했다.

“네가 쏘아 봐라.”

주첨기가 강소군을 향해 말했다.

강소군이 천천히 일어나 사대에 올랐다.

주첨기에게서 활을 받고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모두가 강소군을 지켜봤다. 강소군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슴이 눈에 들어왔다.

-피융.

화살이 활시위를 벗어났다.

화살은 사슴이 아니라 하늘로 향했다. 그것도 똑바로 올라갔다.

“저런 미친놈을 봤나?”

“감히 태자를 우롱하다니.”

강소군이 하늘로 올라간 화살을 보며 말했다.

“저 화살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니 내려오는 속도가 만만치 않아 땅에 이를 때면 방패도 뚫어 버릴 정도가 되지요.”

강소군이 장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에게 떨어질지 궁금하군요. 동북변방군에서는 이런 놀이를 하다 정수리에 화살이 꽂혀 죽는 이가 있었지요.”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일제히 하늘을 쳐다봤다.

주첨기가 강소군을 노려보다 크게 웃었다.

“하하하? 하늘의 뜻에 맡기겠다는 것이냐? 대체 누구의 정수리에 떨어질지 궁금하군.”

주첨기는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태연하게 서 있었다.

-쉬이익!

이윽고 화살이 내려왔다. 사람들은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피했다.

방연소 등 몇몇 사람만 자리를 지켰다.

-퍽!

화살은 강소군의 면전을 스치고 발치에 꽂혔다.

“사슴을 잡지는 못했군요.”

강소군이 예를 취하고 물러가려 하자 주첨기가 불러 세웠다.

“잠깐 기다려 봐라.”

주첨기가 사대 앞쪽으로 가더니 장내를 돌아보고 말했다.

“남경부에 반역의 무리가 있다!”

그 한마디에 사례회장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주첨기는 사례회를 빌미로 남경부 권문세가 일족들을 끌고 나와 징치할 작정이었다.

“금군은 명을 받들라!”

“존명!”

우렁찬 소리와 함께 수백 명에 이르는 군사들이 나타났다.

권문세가 일족들의 안색이 흙빛이 되었다. 그들 각각이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으나 사례회에 동원할 수는 없었다. 그저 호위로 몇 명씩만 데려왔으니 주첨기가 명만 내리면 금군에 의해 모두 죽을 처지가 됐다.

방연소가 태연한 걸음으로 나오더니 예를 취하며 말했다. 남경부를 관장하는 대학사로 가만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남경부에 반역도가 있다면 반드시 잡아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반역도를 지목하여 주십시오.”

“내가 남경으로 오는 길에 역도의 무리를 만났다. 급하게 전령을 보냈는데 남경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

주첨기가 장내를 둘러보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가 위기에 처했는데 소식을 듣고도 모른 척한 것! 그것만으로도 죄가 될 것이다.”

주첨기의 말에 모두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억울합니다! 소신들은 몰랐습니다!”

방연소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죄송하오나 남경부는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태자의 전령은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군사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건 확인해 보면 드러날 일이오.”

주첨기가 호위대장 이정무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포박하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도 좋다!”

주첨기의 말에 소란이 일었다.

아무리 황태자이지만 남경 권문세가 일족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첨기에게 속셈이 있음을 알고도 설마 하여 사병을 데리고 오지 않은 권문세가 수장들은 크게 후회하였다.

‘황제가 남경부를 폐하려는구나!’

방연소는 대뜸 주첨기의 의도를 깨달았다. 하지만 서슬 퍼런 금군의 위협에 어쩔 수 없었다.

“따라와라.”

주첨기가 강소군을 자신의 천막으로 불러들였다.

“무리한 명이라고 생각하느냐?”

강소군은 주첨기가 남경부 권문세가 일족을 모조리 죽인다 해도 관심이 없었다.

“너도 황실의 일원이니 작금의 상황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첨기가 생색내듯 말했다.

“폐하께서는 남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기실 생각이다. 그전에 남경에 빌붙어 있는 토호들을 모조리 정리하라는 명이다.”

주첨기가 남경으로 온 이유였다.

명이 들어선 지 오십 년. 나라를 세우는 건 작은 일이 아니다. 남쪽 변방 오지는 이제야 황조가 바뀌었음을 안 곳도 있다. 오히려 지역을 관장하는 토호의 힘이 황권보다 강한 곳도 많았다.

태조 이래 황제들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공신을 처단했다. 이제는 토호들을 숙청할 시기가 된 것이다.

“그 말이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중도에 기습을 받았다. 나는 한왕과 남경부 토호들이 결탁했다고 본다.”

“….”

강소군은 말없이 듣기만 하였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남경부 토호의 세가 크더군. 이참에 저들을 모두 처단할 생각이다.”

남경부 권문세가 일족을 처형하면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주첨기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효웅이었다. 스스로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을 유인한 후 남경부 권문세가 일족을 동조 세력으로 몰아 대대적인 숙청을 하려는 것이 애초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네게 기회를 주겠다. 나를 따르겠느냐?”

“….”

강소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결국 장홍 대장군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로군요.”

“군사들 사이에 그는 황제 이상의 명망을 누렸다. 그게 화를 부른 것이지.”

주첨기는 이제 쫓겨 다니는 처지가 아니다.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대답은 이미 하였습니다.”

주첨기가 벌컥, 화를 냈다.

“강휘로 살지 않겠다는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으냐? 강부에 와서 네가 한 일이 뭐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듯합니다만.”

“그러면 대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이냐?”

“태자 형님의 뜻대로 저들이 순순히 죽어 주겠습니까?”

“흥! 이 자리에서 목을 치면 어떻게 다시 붙인다는 말이냐? 곧바로 군을 동원해 저들의 근거지를 토벌할 것이다.”

“이 자리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더군요.”

“…?”

“조왕을 잊으셨습니까?”

주첨기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폐되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에서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주고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태자께서 사례회를 여는데 어찌 숙부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인가?”

주첨기의 안색이 급변했다.

주첨기가 황급히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주고수가 말을 타고 왔는데 그 뒤로 수백의 군사들이 따랐다. 조왕부의 군사들이다.

게다가 그 뒤로 권문세가 일족의 사병들이 보였다. 일부 권문세가 일족은 사병을 사례회장 주변에 대기시켜 놓은 것이다.

“태자가 사례회를 하는 줄도 모르고 사냥을 나왔다네. 마침 사슴 한 마리가 이리로 도망쳤는데 혹 보지 못했는가?”

주고수는 마상에서 내리지도 않았다. 주첨기가 인상을 썼다.

“숙부님을 뵙습니다.”

“아참. 태자의 인사를 마상에서 받다니 이거 예가 아니군. 하지만 사냥 중이니 너무 황실의 법도를 따지는 말게나.”

주고수가 웃으며 말했다.

은연중 주첨기의 금군과 주고수의 사병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아니, 이분들은 남경부의 고관대작들 아니신가? 그런데 안색들이 왜 그 모양이오?”

방연소가 나서더니 과녁 부근에 서성이는 사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왕께서 말씀하신 사슴이 저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례회장에 사슴 한 마리가 뛰어들어 태자님의 행사를 방해하였지 뭡니까? 그래서 모두가 황망해하던 중이었습니다.”

방연소는 역시 너구리였다. 피를 보지 않고 오늘 일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태자님께서 남경으로 오시다 변을 당하셨는데 모처럼 주관하시는 사례회장에 사슴까지 뛰어들어 심기가 몹시 상하셨습니다. 신들이 죄를 청하던 참입니다.”

“맞습니다.”

평소 서로 앙숙이던 권문세가 일족들도 황실과 대치할 때는 한편이 된다.

이제 사병들까지 나타났으니 여유를 찾고 짐짓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를 취했다.

주첨기는 상황을 돌아봤다. 양쪽의 전력이 비슷했다. 하지만 토호 가운데는 한나절 거리에 본거지가 있는 이도 있다. 원군이라도 오면 상황이 불리해진다.

주첨기가 속으로 이를 갈며 주고수를 노려 보았다.

‘진작에 처치했어야 했는데.’

주첨기는 내심 갈등하였다. 이 자리를 이렇게 끝내면 권문세가 일족들이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역모를 꾀할 것이다. 하지만 물러날 때를 알아야 했다.

강소군은 방연소 등 권문세가 일족을 훑어보았다. 그가 사례회에 굳이 참석한 것은 남경부의 누가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 알고자 함이었다.

‘남경부에는 황실이 설 자리가 없구나.’

선황이 서북변방에서 전쟁을 치르다 죽고 황제가 바뀌는 사이 남경부 토호들의 권력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원래 건국 수도였던 남경이다. 물자를 비롯한 자원이 몰렸던 곳이니 경성보다 경제력도 높았다.

주첨기가 마침내 물러났다.

“숙부님께서 팽덕에 계신 줄 알았지 뭡니까? 이리 강건하신 줄 알았다면 함께 사냥을 청할 걸 그랬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면 어떤가?”

“오늘은 사례회이니 어렵겠군요. 마침 사례회도 끝났으니 술이나 한잔하시지요.”

주첨기가 주고수에게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주고수가 말에서 내렸다. 호위들이 옆에 달라붙었다.

강소군은 남경부가 어찌 돌아가는지 실상을 직접 봤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말에 올라 장내를 벗어나려는데 방연소가 가로막았다.

“강 공자, 어디를 가십니까? 태자님께 범한 죄는 받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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