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75화 (7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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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였다. 마치 태풍이 지나고 일상이 찾아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모상은 불안하였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정상이 아니야.’

모상의 근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소군이 말했다.

“태자는 귀가 아주 큽니다. 간언(諫言)만 듣고 함부로 나서지 않을 겁니다.”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닙니다.”

“조만간 태자가 부를 것입니다. 그때 가서 해명하지요.”

강소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인이 달려와 말했다.

“태자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모상은 기가 막힌 얼굴로 강소군을 보았다.

“어찌 아셨습니까?”

“태자가 입성하여 자기 할 일 처리하고 이제 시간이 나니 보자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강소군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태자부에서 온 사람이 첩지를 읽었다.

태자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해 활쏘기대회를 여는데 강소군도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태자부 사람이 돌아간 뒤 모상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역시 태자는 문무를 겸비한 분이군요. 잘됐습니다. 이번 활쏘기대회에서 태자와 좋은 말씀 나누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럴 기회가 있을지나 모르겠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황께서 태자와 공자님 두 분을 각별히 총애하였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두 분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까. 이 기회에 우의를 확인하시죠.”

모상이 강소군이 주첨기의 청을 거절하여 서로 좋지 않게 헤어진 걸 안다면 까무라칠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모상은 득의만면하여 말했다.

“태자의 곁을 공자님이 보필하면 누가 감히 두 분 사이에 끼어들겠습니까?”

“글쎄요. 이번 활쏘기대회는 아마도 피가 튀기는 사냥 대회가 아닐까 싶은데요.”

“사냥이 아니라 사례회(射禮會)입니다. 공자님 솜씨면 분명 장원을 하실 겁니다.”

모상이 말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니야.”

모상이 부랴부랴 사라졌다.

강소군은 그런 모상의 뒷모습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사례회라….”

강소군은 장영영을 만난 뒤 며칠 신열이 올라 자리에 누웠다.

경지에 이른 고수가 비를 맞았다고 앓아누울 리는 없었다.

일종의 심마였다. 고열로 혼미한 가운데 며칠을 잤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장면들이 무수히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다. 저번 폭주 이후 다시 한 번 머릿속이 차갑게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강소군은 장영영을 보자 장선백 역시 살아 있다는 확신을 굳혔다.

‘살아 있으면 된 거다.’

강소군은 마음 정리를 하였다. 초씨 남매를 불러 장영영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장영영이 살아 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어디 계십니까?”

초하란은 장영영과 각별한 사이다. 당장이라도 달려갈 기세다.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알려 주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직접 만나셨다는 말입니까?”

초하경이 의아한 시선으로 강소군을 쳐다봤다.

두 사람 사이를 아는데 직접 만나고도 어디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니 이상했던 것이다.

강소군은 초하경의 물음을 건너뛰었다.

“내 생각에는 도룡회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두 사람이 가서 알아봐 줬으면 하는데.”

“도룡회라니요. 아가씨께서 강호로 나가셨다는 건가요?”

강소군은 강부로 돌아온 뒤 일부러 자신의 귀환이 널리 퍼지도록 몇 가지 사건을 일으켰다.

실제로 지금 남경은 오만방자한 강부의 공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장영영이 자신을 찾아올 수는 없었다. 이는 장영영이 쭉 남경에 있던 것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강소군은 장영영이 자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곰곰 생각을 더듬은 끝에 도룡회라고 추정하였다.

강소군은 도룡회 고수를 피해 고개를 넘을 때 초막 쪽에 온 신경을 쏟았다. 도강을 날리는 고수가 펼칠 다음 수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다행히 그는 다시 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초막에서 나오다 낮은 탄성을 지르는 걸 들었다. 당시에는 무심코 넘겼는데 그게 마음에 남았다.

곰곰 생각하며 그 여인이 장영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면을 했다는 건 신분 노출을 우려한다는 것이다. 남경은 대정무각의 영역이니 도룡회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저희가 가서 확인하겠습니다.”

강소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의 마음은 헛헛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확인해서 뭘 한다는 말인가. 그녀가 복면도 벗지 않은 것은 이제 남이라는 뜻을 고한 것이다.

그래도 초씨 남매에게 장영영의 소식은 전해야 했다.

***

“검을 만병지왕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지. 두 사람의 검법만 봐도 그래. 한 검법에서 나왔는데 해석에 따라 이리 다르다는 게 묘하지 않나?”

유문광은 청련지로 돌아오자마자 중랑과 비무를 하였다.

중랑이 초절정의 경지로 접어들었으나 유문광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이어 유문광은 연화심과도 비무를 하였다.

두 사람과 연이어 비무를 하고 난 뒤 유문광이 말했다.

“천성검법이라고 했던가? 내가 보기에는 무당의 한 유파 같군.”

중랑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혈적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

“무당의 검은 깨달음에 따라 그 양상이 확연히 다르지. 도가의 검이 대개 그렇다네. 그러니 두 사람이 같은 검법임에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거겠지.”

“선배님의 검이야말로 극치를 넘어선 듯합니다.”

중랑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유문광과 같은 검법의 고수를 이전에는 본 적이 없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군. 나의 검은 유가의 검이라네. 유가의 검은 단순하면서도 격조를 좀 따지지.”

유문광이 보란 듯이 천천히 검을 세웠다. 이어 길게 찌르더니 다시 당겼다. 일 초가 한없이 느려 마치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천천히 펼쳐지던 검법이 어느 순간 빨라졌다.

검풍이 일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검이 보이지 않았다.

-쉭!

어느 순간 유문광의 검이 또다시 멈췄다. 한바탕 격렬한 검무를 추었으나 유문광의 호흡은 처음 그대로 자연스러웠다.

고수가 자신의 검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아무리 대단한 검법이라도 초식이 노출되면 상대는 허점을 노릴 수 있다.

그럼에도 유문광은 자신의 검을 보여 주었다. 그 안에 담긴 자신의 검해(劍解)를 느껴 보라는 뜻이다.

“초식을 버린다는 건 검초에 담긴 의미를 체득했다는 뜻이지. 중랑, 네가 초식을 완전히 버리려면 일검의 의미를 알아야 할 거야.”

유문광이 예를 취한 중랑에게 말했다. 이어 연화심에게 시선을 주었다.

“연 낭자의 검은 초식의 완벽함을 추구하지. 완벽해질 때 역시 초식이 사라질 걸세. 그때 비로소 검을 만날 수 있지.”

중랑과 연화심이 정중히 예를 취했다. 사제의 연은 맺지 않았으나 유문광이 직접 가르침을 내린 것과 진배없었다.

청련지의 나날은 단순했다.

심마백은 이제 스스로 거동을 할 수 있었다.

“부끄럽군. 고작 음적 한 놈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 꼴이 되다니.”

“혈적의 내공이 그리 강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중랑이 위로하였다.

심마백이 창을 잡자 연화심이 말렸다.

“아직 내공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무리하시면 오히려 탈이 난다고 했어요.”

“창은 기술이지. 기술은 끊임없이 단련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말아.”

심마백 지난 오 년간 모홍객잔의 숙수로 살았다. 그랬다가 근자에 연달아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을 벌였다.

창으로 상대할 자가 없다는 자부심은 강소군의 창을 보며 깨졌다.

게다가 혈적의 작은 피리에 실린 공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을 뻔했다.

심마백은 이를 갈았다.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심마백은 자면서도 창을 놓지 않았다.

내공은 잃었으나 창을 다루는 솜씨는 오히려 더욱 세심해졌다.

그렇게 세 사람은 청련지에서 수련에 열중하였다.

***

사례회는 남경성에서 십 리 떨어진 조산에서 열렸다.

강소군은 모상이 따라오겠다는 걸 말리고 홀로 사례회장으로 갔다.

사례회장은 많은 이들로 붐볐다. 천막이 대여섯 개 쳐졌고 남경 관군이 엄중하게 경계를 섰다.

주첨기는 커다란 천막 안에 있었다. 천막 안에는 방연소를 비롯한 남경의 권문세가 수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초청장을 보내긴 했다만 올 줄은 몰랐다.”

주첨기는 쫓길 당시와는 달리 여유가 있었다.

주첨기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강소군이 더 이상 강휘가 아니라고 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태자께서 부르시는데 감히 오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강소군이 정중히 예를 올렸다.

“들리는 소문이 좋지는 않더군.”

주첨기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연소 등 권문세가의 일족들이 강소군을 보는 눈길은 싸늘했다.

주첨기는 할 말이 많은 듯했으나 이 자리에 모인 이들도 많았다. 강소군에게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나중에 얘기하자꾸나. 이리 앉아라.”

“아닙니다. 남경부 관직도 없는 제가 낄 자리가 아닌 듯하군요.”

주첨기가 앉으라 했으나 강소군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천막을 나갔다.

천막 안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간언(間言)을 하였다.

“저런, 감히 태자님의 말을 거역하다니 엄중히 문책하셔야 합니다.”

“강부의 공자가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지요. 그런데 전장에서 광증을 얻었다는 소문을 나돌아 믿지 않았으나 오늘 보니 정말 걱정이 됩니다.”

“강부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태자께서 유심히 들여다보셔야 할 것입니다.”

듣기 좋은 말로 가장하였으나 실은 강부와 강소군을 깎아내리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주첨기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강소군이 남경부 관료 앞에서 자신의 말을 무시할 줄 몰랐다.

강소군이 천막을 나오는데 한 무리의 귀공자들이 길을 막았다.

“귀하가 강휘요?”

하나같이 잘 차려입은 무복은 보통 비싼 옷감이 아니었다.

무복이 아니라 예복이라 하는 게 마땅했다. 심지어 허리에 장신구까지 달고 온 이도 있었다.

강소군이 귀공자들을 훑어보곤 물었다.

“뭔가?”

“뭔가라니? 정말 듣던 대로 오만방자하구나.”

가장 앞에 서 있는 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강소군을 노려봤다.

“나는 호부의 호일도라고 한다. 호극검은 나의 숙부뻘이 되지.”

호일도는 호부의 직계로 방계 호극검보다 항렬은 낮았으나 신분은 극히 존귀하였다.

“그래서?”

“숙부가 강부에 가서 모욕을 당했으니 조카 된 도리로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지.”

호일도는 호극검이 한 수에 당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또한 그는 호극검보다 무공에 있어서 한 수 위라고 자신해 왔다.

그는 집안끼리 각별한 남궁세가에서 검을 배워 왔다. 남궁세가의 검은 천하에서 알아준다.

그때, 한쪽에서 칠 척 장신의 장수가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주첨기의 호위대장 이정무는 극히 신경이 예민한 상태였다.

남경부 철없는 명문가 귀공자들이 태자가 주최한 사례회를 망치게 둘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곧 사례회가 열릴 것이오. 자리에 앉아 주시오.”

이정무의 전신에서 전장의 장수만이 지니는 특유의 기세가 흘렀다.

호일도가 내심 아쉬워하며 강소군에게 말했다.

“다시 보자고.”

강소군은 말없이 사대(射臺) 옆에 마련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윽고 주첨기와 남경부 관료, 그리고 권문세가의 일족들이 천막에서 나와 사대 옆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휘! 이리 와 앉거라.”

주첨기가 멀찍이 떨어진 강소군을 불렀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주첨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의 안색이 불편하게 변하였다.

활쏘기 과녁은 백 보, 삼백 보, 오백 보에 놓여 있었다.

누구든 사대에 올라 과녁당 다섯 발씩 쏘아 가장 점수가 높은 자가 이기는 방식이었다.

“시작하라!”

주첨기가 손을 젓자 호일도가 먼저 올랐다.

“호부의 호일도라 합니다. 감히 선을 잡겠습니다.”

호일도가 우아한 동작으로 활을 잡더니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이어 연달아 열다섯 발을 쏘았다.

“오!”

화살은 정확히 모두 과녁의 중심에 꽂혔다. 열다섯 발을 명중시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빠르기에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역시 호부의 장자로군. 검법으로도 일절이라지?”

호일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사대를 내려왔다.

“흥!”

한 사람이 코웃음을 치더니 사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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