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두 사람 사이로 안개비가 흘렀다.
지난 세월만큼 흐른 뒤에야 장영영이 입을 열었다.
“살아 있었군요.”
‘살아 있었구나.’
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놀라울 수 있다는 걸 강소군은 깨달았다.
무총에서 수많은 생명이 무참히 죽어갈 때, 산 것과 죽은 것은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단 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강소군은 세상이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살아 있었어.’
장영영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너머 얼굴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호수를 바라보며 장영영을 떠올리려 했을 때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강소군의 뇌리에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수많은 죽음의 얼굴만 가득했을 뿐이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그 시절 그 얼굴을 기억하려 해도 악귀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얼굴만 다가올 뿐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다가오자 옛 얼굴들이 떠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선백.
강소군이 천천히 손을 내밀어 면사를 걷으려 했다.
장영영의 손이 이를 막았다.
‘왜?’
강소군이 눈빛으로 물었다.
장영영은 눈을 내리깔고 강소군의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강소군은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 아니다!
강소군이 손을 내렸다.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졌다.
장영영의 우의에 맺힌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한참 보던 강소군이 문득 물었다.
“선백은?”
강소군이 묻자 장영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이 묻고 있다.
자신의 가족은 어디 있냐고.
강소군은 비를 뿌리는 하늘을 보았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지기임에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지난 삼 년 떠돈 세월에 대한 회한이 밀려왔다. 미망에 사로잡혀 부질없이 떠돌았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장영영이 불쑥 고개를 들고 말했다.
“살아 있으니 됐어요.”
면사도 벗지 않았다.
장영영은 이별을 고한 것이다.
이제까지 사별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통한에 사로잡혀 자책을 해 왔는데.
살아서 이별을 고하다니.
강소군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정혼은 깨지지 않았다.
“아니, 지나간 일이에요. 선황이 우리 집안에 대역죄를 내리는 순간. 우리 둘 인연도 끝났어요.”
장영영이 말했다.
그러곤 가 버렸다.
강소군은 멍하니 서서 온종일 비를 맞았다.
그랬다.
대역죄라는 것은 허울 좋은 말에 불과했다.
실은 한 집안이 다른 집안을 말살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의 정혼은 그때 깨지고 말았다.
장선백과의 우정도 끝난 것이다.
아니, 이제 두 집안은 원수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칼을 겨누는.
***
비천신검 상관무영
탈명마장 추고
환사
봉황수
천수무흔 구연강
천마도 우문극
천중일검 백정무
사일신창 겸일극
일권삼각 봉무량
창천무룡 남궁악
십대고수.
언제부터인가 십대고수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 이전에는 없던 일이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고수라는 뜻이다. 각각이 무의 극에 달한 이들이라는데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요천루주 풍가채가 죽고 그 자리에 봉황수가 들어갔다. 무림에 알려지지 않은 별호다. 그런데도 천하사패보다 서열이 위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십대고수를 선정하고 서열을 매기고 있다.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강호의 식자들은 의문을 제기하지만 어느 사이 십대고수라는 말은 당연시 받아들여졌다.
십대고수 한 사람 한 사람이 만인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중과부적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 고수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기준으로 그들을 선정하고 서열을 매겼을까.
십대고수의 천적은 십대고수뿐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한 번도 확인된 바가 없다.
그들이 서로 겨뤄 본 적이 없으니 서열조차 의미가 없다는 이도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십대고수가 격돌했다.
그것도 천하사패 아니, 이제는 천하삼패라 불리는 대정무각과 도룡회의 수장들이 겨뤘다.
서열 육 위 우문극과 칠 위 백정무.
두 사람이 온종일 싸운 결과는 양패구상.
놀라운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동시에 십대고수 간에 겨루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견이 난무하였다.
그리고 마치 십대고수들 간에 겨룸이 있기를 바라는 듯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
야트막한 산 아래 초옥.
화룡도 조운룡이 눈물을 뿌렸다.
“사부님!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산도 벨 수 있는 사부가 침상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조용해라! 이놈아. 누가 들으면 내가 죽은 줄 알겠다.”
제자를 꾸짖는 우문극의 목소리는 미약하였다. 그래서 조운룡은 더욱 참담하였다.
“백정무 그놈도 성치 않을 것이야. 마지막에 목을 따지 못한 게 아쉽구나.”
우문극이 말하다 말고 쿨럭, 기침을 하였다. 내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조운룡의 눈이 번뜩였다.
“천중일검! 그놈의 목은 제가 따겠습니다.”
목소리에 엄청난 분노가 실렸다.
“시끄럽다. 무인 간의 정당한 대결이었다. 뒤끝을 보였다간 내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부를 욕보일 셈이냐?”
우문극이 정색을 하고 야단쳤다.
그리고 애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너희를 부른 건 화룡문의 앞날 때문이다.”
우문극의 말에 염기창과 석병도, 조운룡이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세 제자를 바라보는 우문극의 눈에 감회가 어렸다.
“지난날 화룡문은 주원장을 도와 원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많은 문도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화룡문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우문극의 목소리는 숙연하였다.
“무의 길을 가는 자는 천하창생을 이롭게 한다는 본문 조사의 뜻을 따라 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주원장은 나라를 세운 후 수많은 무림인을 주살하였다.”
주원장은 무림의 도움을 적잖이 받았으나 건국 후 음으로 양으로 수많은 무림인과 문파를 척살하고 멸문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 화룡문은 가장 먼저 화를 당했다. 내 사부님을 비롯한 문도들이 하룻밤에 화를 입고 멸문의 위기에 처했다.”
사문의 비화를 듣는 조운룡 등은 숙연하였다.
“이제 화룡문의 진전은 너희 세 사람이 이어가야 한다. 나는 이제 무림을 떠나려 한다.”
“사부님!”
조운룡 등 제자들이 일제히 엎드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상세는 곧 회복되실 겁니다. 게다가 도룡회는 어찌한단 말입니까?”
화룡문이 멸문당할 당시 유일하게 살아난 우문극은 절치부심하여 도룡회를 세웠다.
용을 벤다는 의미의 도룡회에는 조정에 의해 멸문을 당하거나 죽은 무림인들의 후예들이 모였다.
“너희가 있잖느냐.”
우문극은 천중일검 백정무와 겨루며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싸우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
“화룡문이 멸문할 당시 본문의 도법 일부를 잃었다. 그동안 이를 복원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해 왔으나 이번 싸움에서 여전히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우문극의 표정은 침중하였다.
“나는 무림을 떠나 상세를 회복하며 본문에서 실전된 도법을 되찾는 데 전념할 것이다. 그게 마지막 남은 나의 사명이다.”
“그건 저희와 함께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우문극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화룡문의 기원은 곤륜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곤륜을 찾아가 도법을 살펴보고 화룡문의 실전된 도법을 복원할 것이다.”
조운룡 등은 사부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았다.
우문극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의 상세는 간단치 않다. 양패구상이라 하나 실은 내가 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정무 역시 검이 부러지고 내상을 입었습니다.”
우문극이 고개를 저었다.
“일 초! 일 초의 차이였다. 그때 백정무는 나의 팔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수를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십대고수 간의 결전 비화를 듣는 제자들의 표정은 엄숙하였다.
무인이 스스로 졌다고 자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제자 앞에서 사실을 밝히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우문극은 호걸이었다.
“아마도 내상을 회복하는 데 이삼 년은 걸릴 것 같구나. 하지만 며칠만 쉬면 운신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테니 천천히 상세를 회복하면 된다.”
“그러면 제가 사부님을 모시고 곤륜으로 가겠습니다.”
조운룡이 나섰다.
“아니다. 네놈은 천방지축 날뛰기만 하지 세심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놈 아니냐.”
우문극은 이미 마음속으로 정리해둔 바가 있었다.
“도룡회는 여러 문파가 모였다. 나의 무공을 높이 사서 회주로 추대하였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새로이 회주를 뽑아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기창아, 네가 임시로 회주를 맡아라. 새로운 회주를 선출하는 일이 우선적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염기창이 고개를 숙였다.
“너희 세 사람 중에 막내 운룡이의 성취가 가장 높다는 건 모두 알 것이다. 나는 화룡문의 문주직을 운룡이에게 맡길 생각이다.”
염기창과 석병도가 조운룡을 봤다. 우문극이 화룡도를 조운룡에게 넘겨줄 때부터 예견해 왔던 일이다.
“아닙니다. 문파는 무공이 아니라 위계와 질서가 중요합니다. 대사형께서 맡으셔야 합니다.”
조운룡이 머리를 조아리고 고사하였다.
조운룡은 사실 사부가 자신에게 화룡문을 맡길 것이라는 생각에 강호행을 나선 것이다.
그는 사형들을 제치고 자신이 문주가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때, 염기창이 나서서 조운룡을 꾸짖었다.
“사부님의 말씀을 거역할 것이냐?”
우문극이 탄식을 하였다.
“원래대로라면 그래야 하지. 하지만 화룡문의 명맥이 위태롭지 않느냐? 화룡도법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이가 문주의 자리를 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문극이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병도는 나와 함께 곤륜으로 가자꾸나. 천하가 어지러우니 가는 길이 쉽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석병도가 순순히 고개를 조아렸다.
***
외출에서 돌아온 강소군은 며칠간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하였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정말 미친 게 아닐까?”
모상은 중얼거리며 종종걸음으로 강소군의 거처로 향했다. 강소군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모상이 강소군의 거처에 이르러 한숨을 쉬었다.
“태자가 남경에 왔다는데…. 가서 봐야 하는데 왜 이러고 있는 거야?”
태자가 남경에 입성하여 남경 육부 대소신료와 조례를 가졌다.
모상은 그 자리에서 강부를 모함하는 말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시비를 통해 태자의 입성을 전했으나 강소군은 여전히 두문불출이다.
참다못해 모상이 직접 찾아왔는데 시비가 막았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어요.”
“내가 총관이란 말이다.”
“아무도…라고 말씀하셔서… 안 되는데요.”
입장 난처한 시비가 말꼬리를 흐렸다.
“저리 비켜라.”
모상이 가로막는 시비를 젖히고 들어서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강소군이 나왔다. 멀쩡한 모습이다.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모상의 말에 불만이 역력했다.
“총관은 무슨 일이오?”
“지금 강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풍전등화라니요?”
“태자 전하가 남경부 조례를 관장하시고 계십니다. 방부와 호부가 경쟁하듯 매일 저녁 연회를 열고 있고요.”
“그래서요?”
“정말 모른 척하실 겁니까? 지금 남경 세도가들이 강부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뭐라고 합니까?”
“황제를 무시하고 국법을 농단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놈들이 떼로 태자에게 간언이라도 하면….”
“이상하군요. 강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놈들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하이고. 정말 미친 게 틀림없어. 그리 영민하던 강 공자가 어쩌다 이리됐을까?’
모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소군의 엄포가 먹힐 거라면 애초에 남경의 세도가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남경의 세도가들은 모두 지방에서 한 지역을 장악한 호족들이다. 역대 황제도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하하. 해 본 소리입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