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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공자란 놈들은 하나같이 싸가지가 없다니까.’
호극검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세도가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안하무인이다.
하지만 그 역시 뒷배가 탄탄한 인물이다. 위축될 이유가 없었다.
강부가 과거 대단했다지만 지금은 몰락하여 실권도 없다. 그런데 어린놈이 대뜸 반말하니 빈정이 상했다.
“금의위는 그냥 갔을지 몰라도 나 호극검은 남경부 치안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겠소.”
호극검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감정이 상했으니 말이 곱지 않았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자객이 암습한 직후란 말이지. 군문을 무단이탈한 강 공자가 하필 왜 그 자리에 있었을까? 설명을 들어야 할 게 많은 것 같소.”
강소군이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마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호부(㚼府)의 위세가 대단하다더니 과연 그렇군. 감히 강부에 와서 큰소리를 내다니. 이래서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득세한다는 말이 있나 보네.”
호극검의 잔에는 차를 따르지도 않았다. 대놓고 무시한 것이다.
호극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태어나서 이런 무시를 당한 것은 처음이다.
강부가 아니라 친왕부라고 해도 그를 이렇게 대접하지 못할 것이다.
호극검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강휘! 너는 장수로서 군문을 이탈한 죄인이다. 강부의 체면을 보아 압송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렇게 오만방자하다니! 내가 친히 너를 끌고 가 대리사에서 죄를 청할 것이다!”
강소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호극검이라고 했나? 너는 방일옥과 겨뤄 이길 수 있느냐?”
“이 미친놈이?”
호극검은 이제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나이로 보나 현 관직으로 보나 그가 위이다.
강소군은 실종되기 전 동북변방군의 백부장에 불과했다.
호극검이 칼을 빼 들었다.
순간 객청에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강소군이 천천히 일어나는데 그의 뒤에서 핏빛 기운이 솟구쳤다.
호극검은 머리보다는 몸을 쓰는 자였다. 강소군이 뿜어낸 기운이 살기라는 걸 직감하고 대도를 세웠다.
“조정에 대항할 것이냐?”
“하하하.”
강소군이 뒷짐을 진 채 크게 웃었다.
“너 따위가 조정이라고? 집안 배경 덕분에 용렬한 재주를 빌미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놈이 감히 조정을 칭하다니.”
-짝!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호극검의 안면에 강소군의 손바닥이 작렬하였다.
“커흑!”
호극검은 엄청난 충격에 그대로 나뒹굴었다.
바깥에서 귀를 기울이고 동정을 살피던 모상은 간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강부는 끝장이구나!’
호극검은 남경부 치안을 맡고 있는 대장이다. 형부시랑의 조카이기도 하지만 남경부 권문세가 호부 일족이기도 하다.
조사를 하러 온 관병대장을 패대기쳤으니 강소군은 국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권문세가 간에 서로 지켜주는 체면을 깨 버린 것이다.
권문세가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서로의 체면을 지켜주며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한다. 강소군은 이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챙!
호극검을 따라온 관병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감히 강부에서 칼을 뽑아!”
관병들은 서슬 퍼런 강소군의 기세에 주춤거렸다.
“꿇어라!”
엄청난 기운에 그만 관병들이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강, 강 공자, 후환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관병 중 하나가 말하자 강소군이 다시 크게 웃었다.
“후환? 후환이라고 했나? 하하하.”
강소군이 웃음을 그치더니 말했다.
“남경부는 물론이고 경성 조정에서 감히 강부를 무시할 놈이 있다면 오라고 해라!”
바깥에서 듣고 있는 모상이 울상을 지었다. 권문세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이 아닌가.
“방일옥은 처음이니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다시 강부에 대드는 놈이 있다면 그때는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다!”
강소군은 오만방자하였다.
“꺼져라!”
관병들이 정신을 잃은 호극검을 둘러업고 황급히 강부를 나갔다.
***
호극검이 강부를 찾았다가 얻어맞고 실려 왔다는 소문은 빠르게 남경 권문세도가 사이에 퍼졌다.
“국법을 무시하다니!”
“미쳐서 돌아왔다더니 확실히 그런 모양이구나.”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니 죽음을 재촉하는구나.”
“정식으로 명을 내려 죄를 물어야 할 것 같군.”
남경부에 도처에 웅크리고 있는 권력가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개탄하거나 분개하였다.
대놓고 무시당한 호부는 뒤집어졌다. 호부의 젊은 공자들은 당장이라도 강부로 달려올 기세였다. 연로한 호부의 주인이 막지 않았다면 벌써 사병을 보내 강부를 짓밟고도 남았다.
모상도 죽을 맛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방일옥이나 소림승을 패대기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남경부 관병을 지휘하는 대장의 뺨을 때려 패대기친 것이다.
이런 예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방부와 함께 권력을 양분한다는 호부의 일족이다.
처음 금의위가 물러났을 때는 죽은 국공 부부의 체면을 보아준 것이라 여기고 넘어갔던 권문세가들도 일제히 들고 일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강소군은 마치 모든 세가를 적으로 돌리려는 듯했다.
‘정말 미친 게 아닐까?’
모상은 그런 생각까지 하였다. 생각다 못해 강소군을 찾아갔다.
“공자님!”
“왜 그러십니까?”
강소군은 모상이 흥분한 걸 보고도 태연히 물었다.
“지금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뭐가요?”
“남경의 권문세가를 모두 적으로 돌리시려는 겁니까?”
“그러면 안 됩니까?”
강소군이 태연히 물었다.
“독불장군은 없는 법입니다. 과거 국공께서도 장홍 대장군 등 충심이 깊은 명문가들과 우의를 맺고 그 힘으로 국정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방부와 이미 척을 졌는데 또다시 호부를 적으로 삼으면 곤란합니다. 사과를 하셔야 합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공자님!”
모상은 틈만 나면 강소군을 설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강소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자네들은 뭐 하는가? 한마디 좀 거들면 안 되나?”
다급한 모상이 초씨 남매까지 닦달하였다.
“얹혀 있는 저희가 공자님 하는 일에 어쩌겠습니까?”
초씨 남매도 권력의 세계를 알고 있기에 강소군의 행보에 대해 염려를 하였다.
권문세가들이 연합한다면 강소군을 죽이고 강부를 폐하는 건 일도 아니다.
선황의 총애를 받던 장홍 대장군도 몇몇 무리의 간언에 의해 내쳐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은 강소군에게 간언을 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저 지켜만 봐야 했다.
***
“흐흐흐. 그놈이 죽을 구덩이를 팠구나.”
방연소가 내심 흡족해하였다.
강소군의 죄상은 낱낱이 적혀 황궁으로 보내졌다. 황제의 칙서가 내려오면 강소군은 죽은 목숨이다.
‘혹시나 하여 호극검을 보냈는데 기대 이상으로 날뛰다니.’
방연소는 느긋한 마음이었다. 권력의 중추에 오르기까지 수십 년 인내하였는데 몇 달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방일옥은 달랐다.
“이제 그 녀석을 죽인다 해도 그 누구도 시비 걸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방일옥은 돈을 풀어 은밀히 고수를 모았다. 단순한 낭인들이 아니라 무림에서 이름난 이들로만 고르고 골랐다.
방일옥은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
곡우.
봄비가 내렸다.
마치 안개처럼 내리는 비였다.
초록빛 짙어 가는 버드나무는 봄비에 축축 늘어졌다.
강소군은 호숫가 노천주막에 앉아 있었다. 비가림막을 쳤으나 오가는 이가 없었다.
“오늘이 곡우랍니다. 아주 기쁜 비입죠.”
자기 잘못도 아닌데 나이 지긋한 노천주막 주인이 전전긍긍하며 하늘 대신 변명하였다.
노천주막 주인은 몸이 불편한 듯했다. 약간 절뚝거리며 술과 함께 말린 과일과 고기를 가져와 놓았다.
“귀하신 분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술이 변하지만 않았으면 되오.”
강소군이 술병을 들더니 자신 앞에 한 잔 따르고 맞은편에 또 한 잔을 따랐다.
그윽한 빛이 도는 술잔을 보며 강소군은 눈을 감았다. 비 내음과 함께 퍼지는 술향기에 아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술을 따르고 마시지 않으니 노천주막 주인이 이상스레 여겼다.
“다른 분이 더 오십니까?”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강소군이 알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주인은 갑작스레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순간 수혈이 집혀 쓰러졌다.
빗속에 서 있는 세 사람은 죽립을 깊게 눌러 썼다.
“술 한 잔 마실 여유는 주겠는가?”
강소군이 잔을 들며 말했다.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신분을 노출하기 싫은 눈치였다.
강소군은 호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술을 음미하였다.
‘이런 날이 있었던 듯싶은데.’
비가 오는 호수. 그리고 적은 세 사람. 장소는 다르지만 언젠가 겪었던 상황이다.
강소군은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으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피를 보고 싶지 않은 날이다. 아니, 피를 보고 싶지 않은 장소다. 세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강소군이 묵묵히 호수만 바라보자 죽립인 중 하나가 말해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소. 미안하게 됐소.”
죽립인의 손이 왼쪽에 찬 검에 닿는가 싶더니 빛이 번뜩였다.
-쉬익!
검은 허공을 갈랐다.
‘헉!’
죽립인이 숨을 들이켰다.
강소군은 그 자리에 있는데 검에 걸리는 게 없었다.
죽립인은 검이 빗나가자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물렸다. 자신의 일격을 피할 자라면 바로 반격을 가할 것이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동작에서 대단한 검수임을 알 수 있었다.
선공을 한 죽립인이 물러나자 양옆에 있던 죽립인들이 벼락같이 나서며 검을 내리쳤다.
-쌔애액!
검기가 허공을 가르는 예리한 소성이 먼저 강소군을 덮쳤다.
강소군의 손이 검기 사이를 파고들었다.
“크윽!”
“컥!”
짧은 신음성과 함께 두 사람이 일 장이나 튕겨 나갔다.
먼저 물러났던 죽립인이 몸을 날리며 검을 앞세웠다.
검 끝에서 검기가 쭉 뻗어 나왔다. 검기는 상하좌우 사방으로 찢어지며 강소군을 감쌌다.
-퍽!
비산하던 검기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크윽!”
마지막 남은 죽립인도 튕겨 나갔다.
세 사람은 죽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들은 강소군을 향해 포권을 향했다.
“고수를 몰라보고 실례를 범했소.”
여전히 죽립을 쓴 채였다. 말을 하는데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죽립인이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손속에 사정을 둔 점 감사하오. 실력이 부족함을 알고 이만 물러가겠소.”
죽립인이 함께 온 이들을 추슬러 물러났다. 가기 전에 한마디 더 했다.
“다음에 오는 이들은 우리보다 한 수 위요. 조심하시오.”
세 사람은 빗속으로 사라졌다.
강소군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자신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잔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호수로 향하던 순간, 버드나무 뒤에 선 한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강소군이 그대로 굳었다.
‘영영!’
두 눈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소군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공간이 뒤틀려 오래전 어느 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곡우.
장영영과 호수로 나왔다. 이 노천주막에서 술을 마셨다.
강소군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왔다!’
그런데 왜 나타나지 않는 걸까?
강소군은 자신이 환영을 본 게 아닐까 하여 다시 버드나무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두 눈은 사라졌지만 버드나무 뒤에 누군가 있었다.
“영영?”
강소군의 마른 목소리가 비를 타고 은은하게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