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72화 (7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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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 조왕을 찾아갔다고? 비빌 언덕을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구나.”

방연소가 코웃음을 쳤다.

“소자가 그놈의 목을 직접 벨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지켜봐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방일옥은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승승장구한 권력가 집안의 장자로 황자 부럽지 않았던 방일옥이다. 게다가 소림사의 무승을 직접 초빙하여 진재절학을 이어받았다.

문무를 겸비하여 능히 일국을 통치할 재목으로 모두가 숭앙했던 그의 위신이 한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강부는 한때 남경의 권문세도가에서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강일부는 출신은 볼 게 없었으나 뛰어난 문재로 선황의 눈에 들었다. 결국은 장공주 주옥영과 혼인을 하여 부마도위에 오른 뒤 국공의 칭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강일부의 돌연한 죽음과 함께 강부는 몰락하였다.

영안공주마저 죽고 유일한 아들 강휘까지 전장에서 실종되어 전사자 처리가 되는 바람에 폐부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강부가 폐부되지 않은 건 순전히 총관 모상의 노력 덕분이었다.

모상은 강휘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으니 장원을 폐할 수 없다고 진정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모상의 바람대로 몇 년 만에 강휘가 나타났으나 곧바로 사라졌다. 세간에는 적에게 포로로 잡혀 고문을 당한 후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미친놈이 어찌할지 예측 못 한 것이 실수다!’

방일옥은 자신이 방심하여 기습을 당한 것이라고 믿었다.

‘자객 때문에 흥분했던 거야. 그래서 놈의 암수에 어이없이 당한 거라고.’

그러지 않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방연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놈이 소림승까지 제압했다. 힘으로 해결할 놈이 아니다. 그놈은 아비에게 맡겨라.”

“제 복수입니다. 제 손으로 해야 합니다.”

“네 복수 이전에 방부의 명예가 달린 일이다. 명예롭게 해결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아버님. 제가 언제 실망시켜 드린 적 있습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아들이 우기자 방연소가 물끄러미 보았다.

냉랭한 아버지의 시선을 방일옥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바깥에서 맞고 들어온 주제에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시선이다.

늘 신뢰를 받던 아들에서 한순간에 못난 자식이 되고 말았다.

방일옥이 고개를 떨구었다.

방연소가 한숨을 쉬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네가 당한 일은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지금은 시국이 살얼음판이다. 놈은 순리대로 처결될 것이니 잠자코 있어라.”

고개를 숙인 채 아비의 말을 듣는 방일옥의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방연소의 말은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명의를 부르고 온갖 약을 발랐으나 볼이 뚫린 흉터는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평생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방부를 지켜보고 있다. 그놈이 대놓고 방부를 모욕하였으니 이대로 있는 것도 치욕이다. 허나 무력으로 응수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아버님!”

방일옥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시끄럽다.”

방연소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놈은 아비가 처리할 것이다. 너는 몸을 추스르고 관직에 나갈 준비나 하거라.”

***

“좋은 차로군요.”

강소군이 차를 음미하고 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벌써 차 맛을 아는구나. 나는 네 나이에 술을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차를 찾게 되더구나.”

주고수가 온화한 얼굴로 차를 따랐다.

조왕부의 별원.

봄볕이 따스하게 내린 정원에 연초록색 빛이 돌았다.

오늘따라 봄바람도 잦아 천지가 조용하였다.

두 사람은 정원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 차를 마셨다.

“대체 어디 가서 뭘 하다 이제야 온 것이냐. 강부는 네가 지켜야 하니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이다.”

주고수가 집안 어른답게 가볍게 꾸짖었다.

강소군이 찻잔을 들고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조왕부 정원은 숙부께서 직접 가꾸신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단아하기 그지없습니다.”

강소군이 말을 돌리자 주고수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가벼운 질책이었으나 응당 고개를 숙이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어야 했다.

그런데 강소군은 엉뚱한 화제로 돌렸다. 집안 어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자기 속을 감춰 온 사람답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원 하나 가꾸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느냐? 할 일 없는 숙부의 취미일 뿐이다.”

강소군은 여전히 시선을 정원에 둔 채 말했다.

“말씀 잘하셨습니다. 나라를 경영할 기량이 있는 분이 정원 손질이나 하고 계시니 답답하시겠지요.”

주고수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강소군이 도발을 하고 있다.

‘이놈이 속셈을 지니고 찾아왔구나!’

주고수도 만만치 않았다. 가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년에 있었던 일로 여전히 오해를 받고 있으니 답답하기는 하구나.”

주고수의 심복 맹덕의 역모가 발각되었을 때 주체의 분노는 대단했다.

당시 태자였던 현 황제가 간청하지 않았다면 주고수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이후 선황에 의해 팽덕에 유폐되었다.

“그렇다고 가만 계실 분은 아닌 걸로 압니다만. 팽덕에서 남경으로 오신 것은 큰 뜻을 펼치려 함이 아닙니까?”

주고수가 시선을 내리깔며 찻잔을 들었다.

“네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나는 그저 오랫동안 머물던 장원이 그리워 돌아온 것이다.”

강소군은 더 대꾸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태자를 만났습니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담담하게 이었다.

“사냥을 당하고 있더군요.”

주고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둘째 숙부께서 아무래도 천하를 직접 관장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작정을 하고 잡으려 하더군요.”

주고수가 정색을 하고 엄중히 말했다.

“둘째 형님이 모반이라도 한다는 게냐? 말조심해야 할 것이다.”

“태조 할아버지께서 명을 세우신 지 겨우 오십여 년 지났을 뿐입니다. 북방의 전란은 여전하고 나라의 기틀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는데 황제는 문약하니 둘째 숙부가 뜻을 품은 게 어찌 잘못이라고만 하겠습니까?”

강소군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선황께서 이미 전례를 세우신 바 있는데 굳이 군신의 도를 내세워 역모 운운한다는 것도 우습군요.”

강소군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선황 주체는 조카를 내몰고 황위를 차지한 바 있다.

주고수가 기어이 큰소리를 냈다.

“이놈!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황실이 그리 우습게 보이는 거냐?”

강소군이 주고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말은 둘째 숙부가 천하의 패권을 쥐고자 하는 걸 탓할 수 없다는 겁니다.”

“네놈이 역모에 가담했구나! 그 한마디로 너도 참수될 것임을 모르느냐?”

“셋째 숙부께서 제 말을 전한다면 그리될 수도 있겠지요.”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주고수는 강소군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뜻이 대체 무엇이냐? 어찌하여 숙부를 시험하는 것이냐?”

“그야 숙부님의 뜻을 알아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역모에 가담이라도 하란 말이냐?”

“글쎄요. 둘째 숙부의 거사에 동참해 봐야 남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면 나보고 직접 거병이라도 하란 말이냐?”

“그러실 의향이 있는지 여쭤보고자 왔습니다.”

강소군의 말은 너무나 대담한 것이었다. 대놓고 역모를 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주고수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네가 어렸을 적에 참 순수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짓궂을지는 몰랐구나. 네가 황실을 걱정하여 나의 의중을 떠보려 했다면 내 대답은 한 가지다.”

주고수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을 것이고 직접 거병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이 작은 정원을 돌보는 일로 만족한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고수의 눈에 한 줄기 음험한 빛이 스쳤다. 외조카에 불과한 강소군의 말이 지나치니 용납하기 어려웠다.

“네가 세상을 떠돌더니 황실 존장에 대한 예의를 잃은 모양이구나.”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숙부의 조카가 아니라 선황의 명을 받아 이러는 것뿐입니다.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선황의 명이라니?”

강소군이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 펼쳐 보였다.

“선황께서는 현 황제께서 즉위하신 후 친왕들로 인해 황실이 불안할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밀지를 내리셨지요.”

“흥! 그게 무슨 말이냐? 실종된 네가 어떻게 밀지를 받는다는 말이냐?”

“제가 아니라 아버님께 내리셨더군요. 아버님이 받은 명을 아들인 제가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고수가 보니 정말 선황의 친필과 낙관이 찍혀 있었다.

“혹 역모를 꾀하면 죽여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숙부가 역심을 품으셨다면 이 자리에서 선황의 명을 받들어 처단했을 겁니다.”

강소군의 눈빛은 싸늘하였다. 주고수는 등골이 오싹하였다.

‘이놈이? 그냥 나를 떠보려 온 게 아니었구나!’

주고수는 그러나 암중의 호위를 믿었다.

강소군이 천장 한쪽을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숙부께서 역심이 없으시니 다행입니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으흠. 오늘 자리는 무척 불쾌하였구나. 멀리 나가지 않겠다.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일로 보자꾸나.”

주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불쾌하셨을 수밖에 없겠지요. 허나 제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강소군은 말을 마치고 일어났다.

강소군이 정원을 나오자 초하경이 뒤따라 붙었다.

“어찌하여 조왕을 자극하셨습니까?”

“숨은 뜻이 있는데 보이지 않으니 건드려 봐야 할 게 아니냐.”

강소군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앞서 걸어 나갔다.

강소군이 간 뒤 조왕이 천장 구석을 향해 말했다.

“그가 당신의 기척을 알아낸 것 같소?”

천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듯합니다. 강 공자가 소림승을 물리쳤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확실히 고수가 맞습니다.”

“당신이 나서면 어떻게 될 것 같소?”

“….”

대답이 없었다.

“불쾌하셨다면 미안하구려.”

조왕이 말했다. 숨어 있는 자는 당대의 고수다.

조왕이 삼고초려하여 데려온 자로 평소 귀빈의 거처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왕은 오늘 강소군의 의중을 몰라 호위를 물리는 대신 그를 감춰 둔 것이다.

“본인은 은신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천장의 사람이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이만 가셔도 좋습니다.”

은신에 소질이 없다지만 그래도 대단한 고수였다.

주고수 역시 무공을 익힌 고수였건만 사라지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놈이 거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주고수의 눈빛이 냉랭하게 빛났다.

‘명줄이 긴 놈이군.’

주고수가 장원 어딘가로 가더니 직접 전서구를 꺼냈다.

-푸드득!

전서구 세 마리가 날아올랐다.

방향은 천무방이 있는 곳이었다.

***

“얍!”

조그만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잖아. 힘을 빼야지.”

초하경이 진연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제 여섯 살 난 진연이 초하경을 졸라 무공을 익히는 중이다.

강소군이 정원을 나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초하경이 강소군을 보고 읍을 하고는 말했다.

“자질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강소군이 다가왔다.

“무공을 익히려는 것이냐?”

“네.”

“왜 무공을 익히고 싶은 것이냐?”

“아버지의 복수를 할 겁니다.”

진연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초 아저씨가 잘 가르쳐줄 것이다.”

강소군이 진연의 어깨를 다독이는데 모상이 왔다.

“관병대장 호극검이 왔습니다. 공자님을 뵙겠답니다.”

호극검은 객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소군이 들어서자 예를 취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오?”

“방 공자 습격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방일옥 말이로군.”

“공자께서 방 공자를 이유 없이 폭행하였다고 하더군요. 암습 직후에 말입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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