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64화 (6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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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경은 강소군의 등 뒤에 붉은 그림자가 어린 듯하여 섬뜩하였다.

‘죽음의 잔?’

초하란이 벌떡 일어났다. 허벅지에 부목을 대었기에 잠시 비틀하였으나 잔을 내밀어 외쳤다.

“그들에게 죽음을!”

초하경과 황오도 얼떨결에 일어나 잔을 들었다.

강소군은 말없이 잔을 비우고는 그대로 내리쳤다.

-쨍그랑!

이는 되돌릴 수 없는 행위였다.

초씨 남매와 황오도 술잔을 비우고 내리쳤다.

강소군이 돌아서 가 버렸다.

초하경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느낌이었다.

잠시 후.

초씨 남매와 황오가 정원을 떠났다. 모두가 떠난 봄밤 정원에 매화향만 그득했다.

***

“이렇게 생긴 사람 못 봤나? 스물 중반 정도로 보일 거야. 무척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거든. 창을 가지고 다니지.”

조운룡이 용모파기를 보이며 물었다.

어린 점소이가 식탁을 닦다 말고 다가오더니 슬쩍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못 봤는데요.”

점소이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려 하자 조운룡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좀 성의를 가지고 봐 봐. 정말 못 봤어?”

남경성 밖 허름한 객잔을 뒤지고 다닌 지 벌써 며칠째다.

점소이가 움찔, 하고는 용모파기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하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손님, 정말 이런 분은 오지 않으셨어요. 우리 객잔은 상인이나 일꾼들이 주로 묶는다고요. 무림인은 오지 않아요.”

점소이는 행여 화를 입을까 조리 있게 설명하였다.

조운룡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을 쉬고 객잔을 나오는데 안에서 점소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놈 아냐? 무림인이 왜 이런 데를 와. 이 넓은 남경에서 그따위 용모파기로 어떻게 사람을 찾는다고. 발로 그린 것도 아니고.”

조운룡이 우뚝 멈췄다. 용모파기를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후!”

하늘을 쳐다보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린 점소이를 상대로 화풀이할 수는 없다.

‘분명 이런 객잔에 묵고 있을 텐데.’

강소군을 쫓아다니며 나름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허름한 객잔을 주로 찾았다.

하지만 남경은 넓었고 허름한 객잔은 수도 없이 많았다.

“혈마라는 이름만 나면 뭐해? 알아보는 이가 없는데.”

강소군이 천무방과 싸우고 천무십객을 죽인 일이 강호에 퍼지며 혈마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었다.

사람들이 혈마 운운하기에 조운룡은 새로운 마두가 나타난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혈마는 키가 구 척이고 지옥창을 들고 다닌다고 했다.

전신이 핏빛에 물들어 있고 두 눈에서는 혈광을 뿜는다니 들은 대로라면 지옥의 마왕 그 자체를 연상케 하였다.

그 혈마가 천무방 무력대와 천무십객을 죽였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강소군을 지칭하는 걸 알았다.

조운룡이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관병들이 우르르 몰려와 포위하고 창을 겨눴다.

조운룡은 영문을 몰라 서 있을 뿐이다.

관병 대장이 나서서 물었다.

“노인을 보여라.”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네놈이 수상하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남경에는 관병과 군졸들이 쫙 깔려 있는 상태다.

대학사의 아들이 암습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자객 중 일부가 도주하였기에 순찰을 강화하고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데 수상한 이가 있다고 하여 온 것이다.

커다란 칼을 차고 변두리 허름한 객잔에서 사람을 찾고 다닌 지 며칠 됐으니 관의 이목을 끌 법도 했다.

노인은 관에서 발부한 여행증명서다. 조운룡에게 노인이 있을 턱이 없다.

관병 대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칼을 뽑았다.

“호패를 내놔라.”

조운룡에게는 호패도 없었다.

“확실히 수상한 놈이로군.”

관병 대장이 손짓을 하자 한 사람이 쏜살같이 사라졌다. 지원군을 부르려는 게 틀림없었다.

조운룡은 관군에 대한 적대감이 있다. 다만 관과 잘못 엮이면 평생 고생한다는 걸 잘 안다.

낯빛을 가다듬고 공손하게 말했다.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저 사람을 찾으러 왔을 뿐이오.”

관병 대장은 나름 머리를 굴려 넘겨짚었다.

“네놈 패거리는 어딨지?”

“패거리라니요?”

“함께 온 놈 말이야.”

“그게 오다가 헤어져서 찾고 있다지 않았소.”

관병 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틀림없군. 이놈이다!’

방일옥을 암습한 복면자객 중 하나가 대도를 썼다고 들었다.

조운룡이 등에 맨 것도 보기 드문 대도다.

관병 대장은 눈앞의 젊은이가 복면자객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도주하다 일행을 잃고 찾아다니는 것이리라.

‘이놈만 잡으면!’

공을 세우는 것이다. 게다가 지긋지긋한 비상 순찰도 해제될 것이다. 자객 때문에 벌써 며칠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순순히 포박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냐?”

조운룡은 기가 막혔다. 말 몇 마디 나누자마자 포박을 받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니.

“이봐. 호패가 없는 게 죽을죄라도 된다는 거야?”

조운룡의 말이 거칠어지자 관병 대장이 칼을 뽑아 겨눴다.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관병들이 겨눈 창에 힘이 들어갔다.

조운룡이 등에 맨 도를 뽑았다. 관병 대장의 눈에 음험한 빛이 스쳤다.

“저놈이 저항한다. 방 공자를 암살하려던 흉악한 자이니 죽여도 좋다!”

관병 대장은 닳고 닳은 인간이었다.

‘이놈은 호패도 노인도 없는 뜨내기다. 잡아서 문초했는데 자객이 아니라면 골치 아프지. 차라리 죽이는 게 낫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복면자객이라고 뒤집어씌워도 항변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뜨내기 무사였다면 대장의 예상대로 일이 처리됐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화룡도 조운룡이다.

-쉬이익!

조운룡이 몸을 회전하며 화룡도를 한바탕 휘저었다.

-터터턱!

화룡도가 관병들의 창대를 스치고 가자 우수수 잘려 나갔다.

단 일수에 포위한 관병들의 창이 잘려 나가자 관병 대장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이제야 고수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창수(槍手)들이 놀라 뒤로 물러나자 대장이 뒤를 받치는 도수(刀手)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뭣들 하는 거냐? 쳐라!”

도수들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서는데 조운룡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놈부터 와라!”

조운룡은 소리만 지른 게 아니라 몸을 날려 관병 대장을 잡으려 하였다.

관병 대장이 뒤로 냉큼 물러나며 악을 썼다.

“흉수를 잡아라!”

관병들이 죽기 살기로 도를 휘둘렀다.

조운룡은 쏟아지는 도를 걷어 내며 대장을 향해 달려갔다.

“에잇!”

관병 대장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자 도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무공이 제법이었는지 도에서 거센 바람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조운룡의 도에는 강기가 배어 있다.

-쨍강!

관병 대장의 도가 순식간에 잘려나가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조운룡의 도에 관모가 날아가고 머리카락이 잘렸다.

관병 대장은 석상처럼 굳었다. 그의 어깨 위에 화룡도가 놓여 있으니 당연했다.

“목을 그어 줄까? 아니면 사람 잘못 보는 눈을 파 줄까?”

조운룡의 말에 관병 대장은 사색이 되었다.

“네, 네가 감히….”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운룡은 굳이 관병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겁을 줘서 물러나게만 할 참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멈춰라!”

호통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관병과 섞여 오는 이들은 방부의 사병들이었다. 개중에는 무림의 고수도 있는지 달려오는 신법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 보니 앞서 지원군을 부르러 간 것이 방부에 고하러 갔던 모양이다.

“제기랄!”

조운룡이 몸을 날렸다.

한 발을 내디디면 쓰윽 미끄러져 가는 이상한 신법이 펼쳐졌다.

“쫓아라!”

***

금의위는 물러났지만 총관 모상은 여러모로 마음이 불안하였다.

‘국공께서 살아 계셨다면 감히 누가 강부를 경시한다는 말인가. 어서 공자께서 공직에 나가셔야 하는데.’

금의위라면 울던 아이도 그친다는 말이 있을 만큼 무서운 자들이다.

멀쩡한 이들도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나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자칫하면 강부가 폐부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차라리 모셔오지 말 걸 그랬나? 아니다. 황제가 조카를 내치지는 않겠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복잡한 마음을 달래는데 문지기가 찾아와 고했다.

“웬 중이 찾아와 공자님을 뵙겠다고 합니다.”

“중이 공자님을 찾는다고?”

숭유억불정책으로 중을 천시하는 세상이다.

‘그 사이 중하고도 인연을 맺었나?’

모상이 나가 보니 범상한 중들이 아니다.

황포에 붉은 가사를 두른 중년 스님과 그보다는 젊어 보이는 무승 둘이 대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승이 모상을 향해 반장을 하며 말했다.

“소림사에서 온 정관이라고 합니다. 강부의 공자를 뵙고자 하오.”

“헉, 소림사?”

모상이 숨을 들이켰다. 그 역시 소림사가 어떤 곳인지 잘 안다.

“정관대사께서는 무슨 일로 공자님을 찾는지요.”

모상이 의심스런 눈길로 물었다. 세월이 수상하니 모든 게 조심스럽다.

“강 공자의 무학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어 견식을 넓혀 보고자 합니다.”

무슨 뜻인지 모상이 모를 리 없다. 다만 무슨 의도인지 알 길이 없었다.

“공자께서는 마침 출타 중이십니다. 접객당으로 일단 모시지요.”

모상이 하인에게 접객당으로 안내하라 이르고는 강소군에게 달려갔다.

“강 공자, 소림사에서 중이 왔는데 무공을 겨뤄 보자는 뜻 같습니다.”

강소군이 읽던 책을 덮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대번 알았다.

방일옥이 소림의 무공을 썼는데 수법이 고명한 걸로 봐서 관계가 깊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산에서 직접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

‘방연소의 위세가 과연 대단하군.’

금의위를 동원한 데 이어 소림사까지 움직이다니.

강소군은 초씨 남매가 회복되면 보내고 나서 방연소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오는 손님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총관은 걱정 말고 일 보세요.”

강소군이 접객당으로 갔다.

“아미타불. 빈승은 소림 정관이라고 합니다.”

정관은 굵은 눈썹에 다부진 체격을 지녔다. 옆에 있는 두 명의 젊은 중도 기세가 진중하였다.

“먼 길을 오셨군요. 이리 앉으셔서 차를 나누시지요.”

강소군이 예를 표하고 자리를 내주었다. 시비가 차를 가져왔다.

강소군이 차를 따르는데 명가의 기품이 흘렀다.

정관은 내심 강소군을 살피며 감탄하였다.

‘듣던 바와 다르지 않은가. 자객을 쓸 사람 같지는 않은데?’

방일옥은 암습을 한 자객들을 쫓아 객잔을 뒤지는데 상대가 느닷없이 자신을 공격하여 중상을 입혔다고 했다. 심지어 자객과 한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전했다.

정관은 그런 예단을 가지고 노기를 품고 왔는데 상대가 정중히 차를 내고 예의를 다해 물으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정관이 차를 마시고는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말을 돌리지 않겠습니다. 방일옥은 소림 속가제자이나 성취가 뛰어나 본산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요.”

“….”

강소군은 찻잔에 시선을 주고 듣기만 하였다.

“방부와 강부 모두 남경의 명문가라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어떤 오해가 있었는지 몰라도 화해를 주선하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화해를 주선할 생각입니까?”

“사람을 상하게 하였으니 심심한 위로와 전정한 사과의 말씀 몇 마디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관이 점잖게 말했다.

“그게 방부의 뜻입니까?”

“방 대학사는 사리에 밝은 분입니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사소한 다툼이니 서로 좋게 마무리 짓는다면 환영할 것입니다.”

강소군이 정관을 주시하며 말했다.

“스님께서는 방부를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표정 없이 담담하게 말하니 어딘가 모르게 오싹하였다.

세 사람은 섬찟하여 강소군을 바라보았다.

강소군의 눈에서 한 줄기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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