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63화 (63/250)

63

노이칠을 찾아 중랑과 연화심의내력을 들은 유문광과 반여월은 두 사람을 제자로 들이고 싶어 하였다.

대정무각의 십각주들은 각기 출신도 맡은 일도 다양하였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제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점을 깊이 생각지 않았으나 강호 출신인 유문광과 반여월은 늘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중랑과 연화심은 이미 한 사람의 무인으로 설 나이이니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노이칠 역시 중랑과 연화심이 어깨에 진 짐을 알고 있기에 적극 나설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삼도문의 복수와 재건의 책임을 맡고 있다. 대정무각 각주의 제자가 된다면 그 일은 요원하게 되고 말 것이다.

노이칠은 생각이 유연한 자였다. 유문광과 반여월이 머물고 있는 청련지(淸漣池)로 중랑과 연화심, 심마백을 보내고 나머지는 인연에 맡기는 게 좋겠다고 여겼다.

“두 분을 따르라는 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깊이 생각할 것 없네. 두 사람이 거처하는 청련지는 극히 은밀한 곳으로 아는 이가 드물지. 그런 곳이라면 심 대협이 상세를 회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걸세.”

중랑도 유문광을 흠모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가 보여 준 검법은 강소군과 또 달랐다.

강소군이 상대를 죽이기 위한 패도의 검이라면 유문광은 검의 극의를 추구하는 검도의 길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강호행을 한다는 것 또한 옳은 일이 아닌 듯했다. 이유 없는 호의라는 건 있을 수 없는 낭인 세계에서 살아온 중랑이다.

유문광과 반여월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망설였다.

중랑이 침묵을 지킬 뿐 대답을 않자 노이칠이 말했다.

“천무방이 이번 일로 크게 타격을 받았다는 소문이 자자하지. 하지만 나는 천무방의 진정한 무력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보네. 적의 힘을 모를 때는 잠시 숨죽이고 지켜보는 지혜도 필요하다네.”

노이칠의 말에 중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를 주유하는 노이칠은 정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무엇보다 그의 됨됨이는 알고 있다.

그가 이렇듯 권하는데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심마백에게는 안전한 요양처가 필요했다.

“오히려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노이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큰 근심을 내려놓은 셈이다.

‘늙지도 않는 두 괴물이 이들을 맡아 준다면 구연강이 직접 와도 해치지 못할 것이다.’

연화심과 심마백의 안위에 대해 강소군과 장무강에게 장담했는데 당금 무림이 돌아가는 상황에서 청련지만큼 안전한 곳도 없을 터였다.

연화심이 나서서 포권하였다.

“번번이 노 대협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노이칠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식도 없고 제자도 없네. 이대로 살다 가면 그뿐이지. 정말 내가 쥐꼬리만큼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내생에서 갚게.”

***

다음 날 무사들이 마차를 한 대 끌고 왔다. 중랑과 연화심은 마차에 심마백을 태웠다.

“길은 마부가 아네.”

유문광이 말했다.

중랑이 의아하여 물었다.

“같이 가는 게 아니었습니까?”

“골칫덩이를 해결하고 가야지.”

유문광이 다가오는 주첨기를 슬쩍 보고 말했다.

주첨기는 연화심에게 다가와 말했다.

“연 낭자, 나 때문에 고초를 겪다니 정말 미안하게 됐네.”

주첨기는 육일청의 장원에서 연화심이 검술의 고수라는 걸 알게 되자 흠모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의 비빈은 구중궁궐 심처에서 사랑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혈안이다. 또한 이제까지 그가 아는 여자들은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고자 안달이었다.

그러나 연화심은 그가 태자라는 걸 안 뒤에도 일정한 선을 지키고 있다.

생사를 넘나들며 강호를 주유하는 미인이 남녀의 정에 초연하니 더욱 애가 달았다.

남녀 간의 일에 관심이 없는 연화심이 그런 주첨기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연화심이 예를 취하며 가볍게 말했다.

“태자께서 무사히 환궁하시기를 바랍니다.”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주첨기에게는 옥구슬이 구르는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연화심이 자신의 안위를 지극히 염려해 주는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이미 숱한 여인을 경험하였음에도 주첨기는 연화심에게 단단히 빠져들었다.

지금 백척간두에 선 자신의 신세만 아니었으면 어떻게든 옆에 붙여 두었을 것이다.

주첨기가 내심 탄식을 하고 노이칠에게 말했다.

“연 낭자에게 무사를 더 붙여 주게.”

그런 주첨기를 보는 유문광의 눈빛이 묘했다. 왠지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이다.

주첨기가 멀어지자 기어이 한마디 하였다.

“이런! 강호의 연정이 이리 깊으니 조만간 황실 내궁에 화투(花鬪)가 벌어지겠구나.”

노이칠이 한숨을 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유문광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었다.

저 늙지도 않는 서생은 공맹의 가르침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세속의 사랑에만 연연한다.

“어서 가라!”

노이칠은 괜히 마부를 닦달했다.

***

남경부 대의청.

상석에 앉은 남경대학사 방연소가 침중한 낯빛으로 염호추를 바라보았다.

금의위가 강부로 진입하지 못하고 원군을 요청하자 방연소가 대노하여 염호추를 불러들였다.

그 아래로 남경 육부의 수장이 양쪽으로 앉아 있었다.

형부 상서가 염호추를 향해 은근한 목소리로 질책하였다.

“감히 조정의 명을 거부하였다고? 언제부터 금의위가 죄인이 거부하면 알았다 하고 쳐다보기만 했나?”

염호추는 숙인 허리를 감히 쳐들지 못했다.

“강휘는 강 국공의 아들이자 황상 폐하의 조카입니다. 소인이 강부를 파하고 그를 잡으려면 황상 폐하의 윤허가 있어야 합니다.”

염호추의 말도 사실이었다.

공식적으로 황실 일족은 황제의 명이 아니면 체포, 구금하거나 신변을 제압할 수 없었다.

강휘가 명령서를 빼앗아 확인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염호추의 말에 형부 상서가 노기를 띠고 호통을 쳤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남직례성에서 대학사의 명이 곧 황제의 명을 대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냐?”

염호추는 숙인 허리를 쳐들지 않았으나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형부 상서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염호추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지금 형부 상서의 말에 수긍한다면 자신은 황제의 명을 수행하지 못한 죄인으로 목이 잘릴 판이다.

그렇다고 강부로 돌아가 강소군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가장 빨리 염왕을 만나는 길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도 저도 못한 상황에서 염호추는 자신의 삶을 도모할 한 가닥 실낱같은 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경 대학사의 명이 곧 황제의 친명은 아니지 않은가.

염호추는 등줄기에 땀이 홍건하였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방연소가 손을 들어 형부 상서를 제지하였다.

“그만하게.”

방연소가 직접 나서자 대청에 침묵이 흘렀다.

방연소는 염호추가 왜 이리 고지식하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염호추를 비롯한 일백의 금의위가 강소군에게 기선을 제압당해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심계가 깊은 자였다. 염호추가 이리 나오는 데는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방연소가 장탄식을 하였다.

“황실의 방계라는 이유로 군율을 어긴 죄를 물을 수 없다면 대체 이 나라의 법도가 어찌 될지 참으로 걱정이로구나.”

“대인, 군율을 문란하게 한 죄는 대역죄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서 황제께 고하고 강휘를 잡아들여야 합니다.”

형부 상서가 고했다. 방연소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염호추를 보고 손짓을 하였다.

“우선은 물러가라.”

염호추가 나가자 방연소가 남경 육부의 상서를 돌아보며 말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오. 본관은 황제께 강부의 전횡을 고하지 않을 수 없소.”

육부 상서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명분을 확실히 잡은 방연소가 형부 상서에게 말했다.

“형부에서 알아서 하시오. 본관은 당분간 등청하지 않을 것이오.”

방연소의 말은 황제의 칙명이 내려오지 않으면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이었다.

법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친족도 잡아들여야 한다는 노신의 충정으로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육부 상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대학사의 충정이 이 나라의 법도를 바로 세울 것입니다.”

방연소는 곧바로 퇴청하였다. 사인교를 타고 방부로 돌아오는 길에 방연소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근심 어린 그의 모습은 밤낮으로 국사를 돌보는 노신 그 자체였다. 지나던 백성들이 엎드려 절을 하였다.

방연소의 머릿속 생각은 달랐다.

‘주 공주가 죽은 지 몇 해가 지났는데 아직 황실에 그 힘이 남아 있다는 건가? 강휘 그놈이 선황의 총애를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 보군.’

방연소는 반드시 강소군을 죽일 생각이었다. 자신의 뒤를 이을 소중한 아들을 망가뜨린 놈이다.

방일옥은 볼이 뚫리고 코뼈가 주저앉아 예전의 용모를 찾기 어려웠다.

몸이 상한 건 둘째 문제다. 입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으나 이미 남경에는 방일옥이 강부의 공자에게 크게 당해 몸져누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방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방부(房府)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방일옥의 거처를 찾았다.

방일옥은 아직 침상에 누워 있었다. 흉수의 주먹에는 기이한 힘이 실려 근골만 상한 것이 아니라 내상까지 입었다.

방일옥은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는지 눈을 감고 자는 척하였다.

방연소는 모른 척 방을 나왔다. 방일옥의 심복이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방연소가 심복에게 물었다.

“소림에서는 아직 기별이 오지 않았느냐?”

“오늘 연락이 왔습니다. 이미 몇 분의 고승께서 이곳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방연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림에 시주한 금액은 전각 몇 채를 세우고도 남을 것이다.

“오는 길에 불편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게야.”

“이미 조치를 했습니다.”

심복이 고개를 숙였다.

방연소가 어두워지는 하늘 한쪽을 보았다.

강부가 있는 곳이다.

방연소의 근엄한 눈에 한 줄기 음험한 살기가 스쳤다.

***

매화향이 가득했다.

밤하늘에 핀 하얀 매화는 마치 하늘에 달린 눈송이 같았다. 고요한 매화를 바라보던 강소군이 술병을 들었다.

“앉게. 왜 그리 서 있나.”

강소군이 나직이 말했다.

초하경과 하란 남매는 감히 마주 앉을 수 없었다. 당연히 옆에 있는 황오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눈 내린 겨울에 그와 약속을 했다네. 매화꽃 피면 다시 한 잔을 하자고.”

말이 쓸쓸하였다.

“그가 오지 못하니 그의 사람이라도 대작해 줘야 하지 않겠나.”

강소군의 말에 담긴 회한이 너무나 크니 초씨 남매도 더 이상 사양하기 어려웠다.

초씨 남매와 황오 세 사람이 강소군과 마주 앉았다.

강소군이 술병을 내어 세 사람의 잔을 채웠다.

초하란이 술잔을 들고 예를 취하며 말했다.

“제가 어리석어 오해를 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초하란은 여인이나 거친 변방에서 자라 행동거지가 거침없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강소군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를 위해 칼을 든 그대들을 위해 한 잔을 청하네.”

모두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강소군이 다시 골고루 술을 따랐다.

“불의를 밝히려다 먼저 세상을 떠난 초 장군의 영혼을 위해 잔을 청하네.”

다시 술을 비웠다.

강소군은 다시 모두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 잔은 죽음의 잔이네.”

세 사람은 섬찟하여 강소군을 바라보았다.

강소군의 눈에서 한 줄기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