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가서 차를 한잔하는 게 어때요?”
반여월이 계속하여 질문을 하는 유문광을 막았다.
천무방에게 쫓긴다면 내력이 심상치 않으니 함부로 캐묻는 건 예가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유문광이 아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출출하군. 가서 함께 저녁을 하는 게 어떤가?”
유문광은 아무래도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
강소군은 강부의 대문을 나섰다. 대문 앞에는 금의위가 진을 치고 있었다.
강소군이 나오자 앞에 선 자가 두루마리를 펼치고는 명을 전했다.
“동북군 소속 백부장 강휘는 무단으로 군영을 이탈한 바, 남경부로 압송하여 죄를 묻는다.”
우두머리는 서른 중반이 조금 넘어 보였는데 눈매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나는 금의위 백호 염호추다. 상부의 명에 따라 체포할 테니 순순히 응하라.”
강소군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헉!”
염호추는 손이 따끔하며 일시 마비되어 명령서를 놓쳤다. 명령서는 강소군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허공섭물?’
염호추는 등줄기가 서늘하였다.
동북군 일개 백부장이 허공섭물을 펼치는 고수일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강소군이 펼친 허공섭물은 뒤에 있던 금의위들에게도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말이 허공섭물이지 이를 펼치는 걸 본 이가 몇이나 될까. 그저 전설상의 무위라고 여겼는데 눈앞에서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조정과 강호에서 악명 높은 금의위였으나 강소군이 차원이 다른 고수라는 걸 알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소군이 명령서를 펼쳤다.
‘역시!’
명령서의 직인은 남경부 대학사 방연소였다.
‘심기가 깊은 늙은이로군.’
아들 방일옥을 패대기쳤는데 방연소는 이상할 정도로 잠잠히 있었다.
이제 보니 강휘를 뒷조사하여 군영을 이탈한 죄를 찾고 조정의 명을 빌어 잡으려는 것이다.
“수일 내로 찾아갈 것이라 전하라.”
강소군이 명령서를 금의위 염호추에게 던지며 말했다.
염호추는 이제까지 이런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금의위가 나서면 모두가 벌벌 떨며 순순히 포박을 당하거나 도주하거나 저항하다 죽었다.
“무, 무슨 짓이오. 조정의 명을 무시하다니.”
강소군이 돌아서다 말고 염호추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거친 살기가 몰아쳤다.
“방연소에게 전해. 목을 씻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라고.”
염호추는 크게 당황하였다.
방연소는 황제를 대신하여 남경부를 다스리고 있다. 그의 명은 황제의 명이나 다름없다.
강소군의 말은 그 목을 치겠다는 뜻이니 이는 황제에게 거역한다는 말과 진배없다.
“모반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염호추가 검자루를 잡으며 외쳤으나 떨리는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강소군의 전신에서 피어나는 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핏빛 기운은 단순한 살기가 아니었다. 마치 실체가 있는 기운처럼 염호추와 금의위를 덮었다.
“으….”
염호추와 금의위는 심신이 크게 흔들리고 살점이 베이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염호추가 주춤 물러났다.
‘이, 이게 가능한가?’
염호추를 비롯하여 여기 모인 금의위는 온갖 난전을 겪으며 간신히 금의위에 오른 고수들이다. 그런 고수들이 강소군의 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위축되었으니 경악할 일이었다.
강소군이 돌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모반이라고? 내가 황상을 만나 직접 물어보지. 과연 방연소를 잡아 죽이는 게 모반인지.”
강소군은 싸늘한 웃음을 남기고는 들어가 버렸다. 하인들이 황급히 대문을 닫았다.
염호추는 귀신에게 홀린 듯 정신이 나간 얼굴로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는 강소군의 살기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그 그림자가 자신의 목덜미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 목을 어루만졌다.
“어찌할까요?”
십부장 중 하나가 물었다. 그의 얼굴도 사색이 되어 있었다.
내공이 고강한 염호추가 죽음을 느꼈으니 십부장 이하 금의위들이 겪은 공포는 더했을 것이다.
염호추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명을 받은 이상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살기를 다시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그 살기를 다시 마주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란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지키고 있을 테니 천호께 보고하고 원군을 요청하라.”
십부장이 총총히 사라졌다.
염호추는 강부에서 삼십여 장이나 물러나 길마다 막고 대기하였다.
***
천무방 천무전.
구연강은 집무실로 들어오는 조개량을 무심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조개량이 예를 취하고 말했다.
“이제 돌아왔습니다. 명을 수행하지 못한 벌을 청하고자 합니다.”
강소군과 연화심을 놓친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과연 그것뿐인가?”
구연강이 물었다.
조개량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다.
“이번 원정에서 수많은 고수를 잃었다. 천무방이 이리 무력한 곳이었던가? 자네에게 계속하여 군사의 자리를 맡겨도 될지 모르겠군.”
조개량이 허리를 더 숙였다. 조개량이 말이 없자 구연강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강소군이라는 놈의 무공이 예상을 뛰어넘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응천대와 흑마대, 천성대와 암천대. 살귀대와 귀영대까지 줄줄이 당하고 천무십객 중 일곱이나 죽었다!”
구연강의 분노가 점차 거세져 갔다.
“그만한 무력이면 도룡회나 대정무각과도 일전을 벌일 만했다. 그런데 아무런 성과조차 얻지 못했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면 용병(用兵)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조개량이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의 얼굴은 담담했다.
“방주님께 미처 아뢰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이번 원정은 삼공자의 원한을 갚는 게 목적이었으나 군사인 제게는 도룡회와 대정무각을 끌어내기 위한 수이기도 했습니다.”
“뭐라고?”
“작년 여름 요천루주가 죽었습니다. 천하사패 중 하나가 사라졌으나 무림은 큰 변동이 없었습니다. 솥은 세 발로도 설 수 있으니 말이지요.”
구연강은 눈을 부릅뜨고 조개량을 노려보았다. 조개량은 숙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허나 언제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게다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선황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정과 무림이 동시에 요동친 시기였지요.”
조개량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방주님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조정의 세력이 무림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가. 간단하게 말하라.”
“도룡회나 대정무각 둘 중 하나 아니면 둘 모두가 조정과 관련된 세력입니다.”
“…”
“실제로 대정무각이 현 황실을 비호하는 무력임이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도룡회는 그와 적대적인 세력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조정의 세력인 것과 이번 원정의 실패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이번 일은 용병의 실패란 말이다!”
구연강은 조개량이 교묘한 말로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자 호통을 쳤다.
조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용병의 실패가 맞습니다. 허나 이는 일부러 당한 고육지계였습니다.”
“뭐라고? 허어!”
구연강은 기가 막혔다. 수족 같았던 무력대 대주들이 줄줄이 죽거나 병신이 되고 수많은 무사들을 잃었다.
구연강에게는 비밀리에 키우는 무력이 있었지만 바깥에서 보기에 천무방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무력을 잃었다.
“바로 그것입니다. 천무방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부풀려 실제 이상의 타격을 입은 것처럼 보이는 게 중요합니다.”
“무슨 소리냐? 적에게 우리가 입은 피해를 부풀려 알리라니. 미친 것이냐?”
“솥이 세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리의 힘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한 다리가 무너지면 다른 두 다리로는 지탱하기 어렵지요.”
조개량이 지도가 걸린 벽으로 가더니 한쪽을 짚었다.
“대정무각과 도룡회는 각기 조정의 세력을 대신하여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그 둘이 진작에 격돌하지 않은 건 여기 우리 천무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연강은 말없이 지도를 봤다.
“이제 천무방이 큰 타격을 입고 칩거에 들어갑니다. 두 세력은 이를 기회로 보고 곧바로 격돌할 것입니다.”
“그걸 장담할 수 있단 말이냐?”
“천무방이 다시 세력을 키우기 전에 상대를 끝내야 하는 한판 승부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조개량이 담담히 웃었다.
“그들은 우리가 비밀리에 키운 무력을 알지 못합니다. 둘이 싸우다 양패구상을 당할 때 강호에서 밀어내 버리면 그만입니다.”
***
“축하드리오. 군사.”
구양수가 발을 꼬고 의자에 앉아 한 발을 흔들거리며 말했다. 얼굴에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이 맺혀 있다.
“이번 원정 실패로 군사가 꼼짝없이 내쳐지는 줄 알았지 뭐요. 그런데 몇 마디 말로 아버지의 마음을 휘어잡다니. 정말 대단하오.”
구양수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조개량은 천무방의 이공자 구양수가 심계가 깊다는 걸 일찍이 알고 있었다.
한량들과 어울려 기방 출입을 하고 행동거지 또한 경망스러워 보였으나 절대 틈을 보이면 안 되는 인물이었다.
“제 충심을 믿어 주신 것뿐이지요.”
조개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구양수가 화들짝 자세를 가다듬으며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호오, 그렇군요. 충심. 충심이라. 아버지가 황제라도 된다는 말이오? 자칫하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릴지도 모르겠군.”
충(忠)이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황제에게만 쓰는 단어다.
“이공자께서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신기수사라 불리는 조개량도 이 난봉꾼에 비틀린 성격을 지닌 구양수가 어디로 튈지 몰라 조심하였다.
구양수가 시선을 돌려 조개량의 뒤에 걸린 지도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번 일로 천무방이 강호에서 톡톡히 창피를 당하게 됐지요. 선봉이라는 응천대부터 한 놈에게 줄줄이 깨져 나갔으니. 게다가 참으로 많은 고수들이 죽었지 않습니까?”
구양수는 눈을 감고 죽은 이들의 면면을 떠올리듯 하나하나 이름을 되뇌었다.
“우원송, 고경염, 흑귀, 살귀대장 등등. 정말 아까운 고수들이었소.”
구양수가 말하다 말고 눈을 떴다. 게슴츠레한 눈에 묘한 광망이 어렸다.
“그런데 그거 아시오?”
조개량은 구양수의 눈이 뱀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만 보니 죽은 이들이 아버지와 함께 숱한 싸움을 치러 온 심복들이라는 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악적이 그리 뛰어난 무공을 지녔을 줄이야.”
조개량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심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이놈이 내 속셈을 알고 있는 것일까?’
조개량은 숙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천무방의 영웅들로 기록될 것이오. 방주님이 천하를 제패하는 날 함께 영광을 누리겠지요.”
“하하하.”
구양수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제패?”
구양수가 호들갑스럽게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휘적휘적 조개량의 집무실을 걸어 나갔다.
구양수가 나가다 말고 한마디 더 했다.
“천하제패의 그날.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을지 정말 궁금하군.”
구양수가 떠난 후, 조개량은 어둠이 내리는 집무실에 오래도록 불도 켜지 않고 앉아 있었다.
***
노이칠이 중랑이 머무는 초가로 찾아왔다.
“여기에서 계속 머물 수가 없네. 태자를 모시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걸세. 상황이 좋지 않아 함께하자고 권하기 어렵겠군.”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주신 도움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노이칠은 준비해 온 말이 있었다.
“실은 칠각주가 자네를 좋게 본 모양이네. 팔각주 역시 연 낭자를 마음에 들어 하고.”
중랑이 흠칫, 노이칠을 쳐다봤다.
“그 두 사람은 대정무각에서도 예외적인 존재라네. 솔직히 말해 강호 야인에 가깝지.”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이칠이 제의하였다.
“연 낭자와 심 대협을 데리고 그 두 사람을 따라가는 게 어떻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