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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통에 찬 신음 소리가 들렸다. 무척 미약한 소리임이 기력이 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초 공자, 정신 차리십시오. 조금만 더 버티시면….”
약간 나이 든 목소리가 속삭였다.
초 공자라 불린 이는 정신이 혼미한 듯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우선 물 좀 드십시오. 저녁에 나가 먹을 걸 좀 가져오겠습니다.”
나이 든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곧이어 한탄이 이어졌다.
“초 장군께서 돌아가시고 아가씨도 어찌 됐는지 모르는데 공자마저 이리되다니. 하늘이 정말 원망스럽구나. 초씨 가문의 의기를 이리 외면한다는 말인가.”
잠시 후, 갑자기 불이 번쩍 일었다. 나이 든 사내가 화섭자에 불을 붙인 것이다.
마지막 남은 화섭자였다.
목소리에서 느껴졌듯이 나이 든 사내는 오십이 다 되어 보였다.
초 공자라 불린 젊은 사내는 입술이 이미 꺼멓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 악적이 그리 무공이 높았다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합니다.”
나이 든 사내의 이름은 황오였다.
초강립의 눈에 들어 초가의 사람으로 전장을 누빈 지 십여 년. 그는 자신을 알아준 주인을 잃고 이제 그 아들마저 속절없이 보내게 되자 자신의 무능력함에 절망하였다.
“황 조장, 나는 이미 틀린 것 같아. 하란을 찾아 줘.”
초 공자라 불린 이는 초하란의 쌍둥이 오빠 초하경이다.
황오는 분연히 일어났다. 이러다가 정말 약 한 번 쓰지 못하고 초하경을 보낼 판이다.
“잠시만 버티십시오. 의원을 데려오겠습니다.”
황오는 그리 말했으나 스스로도 자신을 하지 못했다.
바깥에서 지키고 있는 매복자들의 눈을 피해 장원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초하경이 죽는 걸 지켜보는 건 더욱 못 할 짓이었다. 차라리 매복을 돌파하다 죽는 게 속이 편할 것 같았다.
황오가 화섭자의 불이 꺼지기 전 개폐 장치를 찾아 기관 통로를 열고자 하는데 돌연 철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훅!”
황오가 재빨리 화섭자의 불을 껐다. 갑작스런 어둠에 황오의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밖 역시 지하통로의 일부다. 그러니 열린다 해도 어둠만 밀려 들어올 뿐이다.
그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초하경, 살아 있나?”
황오는 흠칫, 놀랐다. 장홍 대장군의 저택 비밀통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초하경의 이름을 알고 있다!
황오의 가슴에 한 줄기 희망이 솟았다.
“누구시오?”
황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강소군에게는 모든 게 보였다.
무총의 어둠 속에서 삼 년을 살았다. 어둠은 그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강소군은 한쪽에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제 스물두셋 정도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황오는 어둠 속의 움직임을 감지하였으나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방금 끈 화섭자를 다시 피워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오가 화섭자를 켜려 하자 강소군이 황오의 손을 막았다.
“매복이 많소. 화약 냄새는 생각보다 멀리 가니 켜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듣고 보니 그러한지라 황오는 화섭자를 켜려는 걸 포기하였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 장군 일가이십니까?”
그러나 나타난 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황오가 자신의 검을 뽑으려 하다 멈칫하였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을 발견한 것이다.
그 눈을 보는 순간, 황오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강소군은 고개를 돌려 초하경의 상세를 살폈다. 내상이 깊었다. 방일옥의 권은 소림 정통 공부였음이 분명했다.
강소군이 초하경을 앉히고 내공을 불어넣었다. 강소군의 금단진공이 들어가서 뒤틀린 경맥을 바로잡았다.
잠시 후 일어선 강소군이 혼절한 초하경을 어깨에 둘러업고 황오에게 일렀다.
“나갈 테니 가져갈 것을 챙기시오.”
“달리 챙길 것도 없습니다.”
황오는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벅 저벅.
앞서가는 소리를 듣고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장원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나왔다.
“주위에 매복이 있습니다.”
황오가 말했다. 이미 수차례 정탐을 한 바 있다. 매복만 없었다면 이 무덤 같은 비밀통로를 진즉 벗어났을 것이다.
강소군이 메고 있던 초하경을 황오에게 넘겨주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뒤를 놓치지만 마시오.”
황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의외로 젊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됐든 자신의 주인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
“컥!”
가슴을 찔린 사내가 짧은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중랑은 곧바로 검을 회수하여 머리 위로 날아오는 도를 막았다.
-쨍!
도를 흘리는 동시에 상대의 복부를 갈랐다.
-쫘악!
검에 실린 경기에 배가 크게 갈리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중랑은 몸을 옆으로 회전하며 검을 쳐들었다.
검 끝에 희끗한 검기가 맺혔다. 마치 별무리처럼 보이는 검기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크윽!”
도를 휘두르던 악공 하나가 다시 쓰러졌다.
‘저놈이 고수였을 줄이야.’
육일청은 마음이 다급했다. 주첨기를 손쉽게 잡을 줄 알았는데 같이 온 여인의 호위가 보기 드문 고수였다.
고수 하나가 이처럼 큰 변수가 될 줄은 몰랐다. 이중 삼중으로 준비해 둔 살수들이 덧없이 피를 뿌리고 쓰러져 갔다.
주첨기와 여인 또한 만만치 않은 실력이었다. 살수들이 다가가는 족족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
이대로 가다간 살수들만이 아니라 육일청 본인도 파멸할 판이었다.
‘다 죽인다!’
육일청이 결심을 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모두 죽여라!”
육일청은 황태자고 뭐고 일단 죽이고 뒷수습을 하는 쪽을 택했다.
권력의 길은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를 지나는 길이다.
육일청은 한왕과 함께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명만 쫓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였다. 한왕은 황태자를 사로잡아 보내라 했지만 상황이 이러면 시신을 보내도 탓하지 못할 것을 아는 자였다. 그런 대담함이 있었기에 모반에 동참한 것이다.
일이 벌어진 이상 일단 죽여 놓고 뒷수습을 하는 게 확실했다.
육일청도 목숨을 내놓고 벌인 거사다. 악에 받쳐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죽이지 못하면 모두 죽는다!”
군사들 또한 이 일의 중요성을 아는지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었다.
중랑은 군사들이 몰려들 때 주위를 돌아보았다.
주첨기의 호위무사들은 모두 죽었다. 남은 것은 주첨기와 연화심, 그리고 중랑뿐이었다.
연화심은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은 상황이다. 주첨기는 자신의 안위만 돌볼 뿐이다.
중랑은 이 자리가 황태자를 사냥하는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싸움에 우리가 있을 이유가 없다.’
육일청의 목표가 주첨기였으니 그를 내주고 연화심을 데리고 빠져나갈 결심을 굳혔다.
중랑이 달려드는 적을 쳐내며 연화심의 곁으로 가는데 주첨기가 눈치를 채고 역시 연화심 옆으로 붙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원군이 있다.”
주첨기는 어려서부터 수많은 전장을 겪고 사람을 다뤄왔다. 중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한마디를 하고 달려드는 적을 쳐냈다.
중랑은 일단 연화심 옆에 붙어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였다. 장창을 들고 일사불란하게 합을 맞춰 찔러대는 걸 보니 잘 조련된 군사들 같았다.
-챙!
수십 명이 달려들어 난전이 벌어졌는데 밤하늘에 한 줄기 호성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쇠뇌가 날아들었다.
-쉬쉬식!
개떼처럼 달려들던 군사들이 날아든 화살에 쓰러져 갔다.
뒤이어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허공에서 내려오더니 무사들을 쓸어갔다.
“이제 오는군.”
주첨기가 검을 내리며 연화심과 중랑을 돌아보았다. 중랑은 안심하지 못하고 연화심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들어 경계하였다.
밤하늘에서 나타난 이들은 육일청의 군사들을 도륙하였다. 대정무각 육각의 살수들이었다.
대정무각 육각의 살수는 확실히 뛰어났다. 하지만 육일청이 동원한 군사는 수가 많았다.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사방에서 밀려드는 군사들은 줄지 않았다.
“육일청! 네놈의 암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주첨기가 육일청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육일청은 멀리 문루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태자께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계시는구려. 오늘 거사에 모두 일곱 겹의 수를 두었소. 태자와 방조하는 무리가 과연 그 수를 모두 돌파할 수 있을지 두고 보겠소.”
“이따위 허접한 계책으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믿느냐? 너야말로 아둔하기 짝이 없구나!”
주첨기가 태연하게 외쳤으나 내심 당황하였다.
‘저놈이 오늘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구나. 합비가 돌아선 것을 부황은 모를 터인데.’
아니, 어쩌면 남직례가 통째로 한왕의 수중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 곤란해진다.
태조는 수도 남경을 방어하기 위해 강소와 안휘를 통합하여 남직례로 칭하고 직접 통치를 해 왔다.
선황제가 지금은 경성으로 천도를 하였고, 남직례는 남경 조정에서 관할하고 있다. 남경 조정의 우두머리는 방연소다.
‘그렇다면 방연소가 모반에 동참했다는 것인가?’
주첨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말 그렇다면 간단한 일이 아니구나.’
주첨기는 합비에 머물며 남직례군에게 여러 차례 전령을 보냈으나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여기에서 고립되면 그거야말로 죽을 길이다!’
주첨기는 상황을 파악하고 돌파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 대정무각의 무사들이 당도하였는지 외곽에서도 싸움이 벌어졌다.
주첨기가 크게 호통을 쳤다.
“어서 네놈의 수를 펼쳐 보아라. 내가 친히 돌파하겠다!”
주첨기가 검을 휘두르며 난전으로 뛰어들었다.
“태자를 보호하라!”
언제 나타났는지 대정무각 육각주 염가가 육각의 무사들을 지휘하였다.
염가와 육각의 호위대상은 주첨기였다. 자연히 중랑과 연화심은 적의 무리에 고립되었다.
중랑은 연화심을 끌고 주첨기가 돌진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널따란 장원 연무장에서 주첨기와 육각의 무사들이 한 무리를 이뤄 싸우고, 뒤쪽에 중랑과 연화심이 외로이 싸우는 형국이었다.
“하하하!”
그때 밤하늘에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날아오는데 중년 남녀였다. 남자는 문사 차림이었고 여인은 우아한 궁장을 하였다.
중년 문사는 땅에 내려서자마자 한 바퀴 회전하는데 등에서 검이 솟았다. 중년 문사가 치솟은 검을 손으로 잡아챘다.
-휘리리릭!
중년 문사의 검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광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커억!”
중년 문사가 내려선 곳 주위 수십 명의 적들이 쓰러지거나 튕겨 나갔다.
뒤이어 날아온 중년 여인이 허리를 묶은 채대를 펼쳤다.
-파파파팍!
부드러운 비단이 거센 바람에 찢기는 소리가 나며 군사들을 쓸었다.
놀랍게도 비단으로 만든 채대는 도검처럼 단단하게 변해 군사들의 목을 잘라 냈다.
느닷없이 나타난 중년 남녀의 무위는 실로 놀라웠다.
두 사람을 본 염가가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는 대체 뭐 하다 이제 온 것이냐?”
“연락을 받자마자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왔건만 보자마자 책망을 하시오?”
중랑은 중년 남녀 역시 대정무각 사람임을 알았다.
‘대정무각에는 정말 고수가 많구나.’
두 사람의 무위는 확실히 놀라웠다.
중년 남녀가 나타나자 싸움의 판도가 바뀌었다. 육일청의 군사는 여전히 많았으나 장원 외곽에서 상관청유와 노이칠이 이끄는 대정무각이 공격하고 있고 안에서 염가와 육각의 살수, 그리고 새로이 나타난 두 고수가 대응을 하니 포위망이 급격히 무너졌다.
중랑은 연화심을 이끌고 중년 남녀가 싸우는 쪽으로 이동하였다. 전세가 유리한 이상 일단 합류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중랑과 연화심이 본격적으로 가세하자 육일청의 군사들은 더욱 타격이 컸다.
“좋은 검이로구나!”
싸우는 와중에 중랑의 검을 본 중년 문사가 호쾌하게 엄지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