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59화 (59/250)

59

초하란은 강소군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았다. 큰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닫고 있을 뿐이다.

한참 후 초하란이 되물었다.

“저를 어찌하실 셈이신지요?”

자신이 강소군의 수중에 떨어진 처지라는 걸 초하란은 상기하고 물었다.

강소군은 초하란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초하란의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강소군은 장홍 대장군을 죽음으로 내친 선황제의 외손자이다.

장영영과 정혼을 하였다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정략결혼이었고 그런 혼사가 깨지는 건 비일비재하였다.

강소군이 초하란을 본 것은 장선백의 군영에서였다. 그때 초하란은 장선백의 전령이었다.

초씨 일가는 철저히 장씨 장군가 사람들이었다.

강소군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너를 어찌할 것이라 생각하느냐?”

“….”

“다친 사람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고 해 두자.”

“그렇다면 저를 보내 주세요.”

“지금 방씨 일가 사병들이 사방을 뒤지고 다니고 있다. 네 일행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모양이더군. 지금 나가면 위험할 것이다.”

초하란이 강소군을 쳐다봤다. 여전히 불신이 깃든 눈빛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없다. 네 일행이 걱정된다면 내가 구해 줄 수도 있다.”

“왜 제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거죠?”

“나와 선백의 사이를 알지 않느냐?”

“알지요. 영영 아가씨와 정혼하신 사이라는 것도. 하지만 장씨 일가가 무너질 때 어디 계셨지요?”

강소군은 굳이 변명하고자 하지 않았다.

“장홍 대장군과 일가는 나라를 위해 전장을 지켰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리석은 선황제가 간신의 혓바닥에 놀아나 충신을 죽이고 말았지요.”

초하란의 말투는 독했다.

“장 장군 일가가 핍박을 받을 때 평소 가깝다던 이들은 못 본 척했습니다. 장씨 일가와 가솔들이 죽어가는 동안 한마디 간언하는 자가 없더군요.”

강소군은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초하란의 말이 비수처럼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가 있었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변명한다는 것도 구차하였다.

초하란은 말하다 말고 새삼 분노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버지는 사람의 마음이 금수보다 못하다고 한탄하셨지요.”

초하란이 눈물을 닦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금수로 살아가느니 사람으로 죽겠다고 평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 내가 이렇게 눈물로 보내 드려선 안 되죠.”

감정의 기복이 심한 것이 초하란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강소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몸부터 추슬러라. 두어 달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초하란은 고개를 돌려 강소군의 시선을 피하고는 지나가듯 물었다.

“아버지 시신은 온전한가요?”

강소군은 차마 진실을 말해 줄 수 없었다.

초강립은 바로 목이 잘려 머리가 성밖에 걸려 있었다.

강소군은 한밤중에 머리를 거두었고 시신을 찾아 수습한 뒤 매장하였다.

“안장하였다.”

강소군의 짤막한 말에 초하란은 더 묻지 않았다.

강소군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니 진운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방연소의 움직임이 잠잠합니다.”

진운초는 방일옥이 크게 당했으니 방연소가 보복을 할 것을 염려하였다.

실제로 사람을 보내 진운초에게 강소군의 정체를 물어왔다.

진운초는 알려 줄 이유가 없다고 거부하였으나 방연소가 강소군의 정체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진운초는 걱정이 되었다.

“방연소는 심계가 깊은 자입니다. 게다가 남경부 우두머리로 권력을 쥐고 있지요. 반드시 보복을 해 올 것인데 잠잠한 걸 보니 아무래도 독한 음모를 꾸미는 것 같습니다.”

강소군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알아본 것은 어찌 됐습니까?”

“두 사람은 당시 동창의 독주 고승의 명을 받고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고승?”

“지금은 사례감으로 있지요. 고 태감은 선황제에 이어 현 황제를 보필하고 있는데 권력이 대단하여 대신들도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더군요.”

진운초는 말을 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장홍 대장군의 세력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더군요.”

“신이기란 자의 당시 행적은 알아보셨습니까?”

“신이기는 고 태감의 심복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산동에서 주로 활동하였다는데 무척 악명이 높은 자였습니다.”

“산동?”

“당시 산동은 선황제의 골칫거리였지요. 민란이 일어난 데다 한왕이 안주에 있었으니 동창과 금의위가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신이기는 산동 동창의 우두머리였던 것 같습니다. 막부심은 그의 지휘를 따르는 금의위 고수였고요.”

강소군은 그래도 홍옥비도가 신이기의 수중에 있었던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이기는 산동삼호를 추적하였다. 그리고 홍옥비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영이 산동으로 갔다는 걸까?’

산동은 장씨 일가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다. 하지만 쫓기다 보면 원치 않는 곳으로 갈 수도 있다.

진운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봐야겠습니다. 며칠 전 자객 때문에 남경부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그자들의 정체는 밝혀졌소?”

진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자는 초강립이라는 자로 장홍 대장군 수하 장수였습니다. 수배령이 내려진 자였는데 남경부에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왜 방일옥은 해치려 했을까요? 방일옥이 장씨 일가의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까?”

진운초가 한숨을 쉬었다.

“장홍 대장군 일가의 변고는 흑막에 가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장 장군을 모함한 세력이 아직도 조정에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

“단순히 몇몇 사람의 모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마님께서 제게 사건의 내막을 좀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소군이 실종된 상태였으나 어찌 됐든 정혼을 한 집안의 일이니 어머니가 나섰을 것이다.

“일개 호위대장이었던 제가 알아낼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지요. 나중에 마님께서 직접 알아보시기까지 하셨는데 어느 순간 제게 중단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머니 주 공주도 어찌할 수 없는 권력이 움직였다는 뜻이다.

“장홍 대장군이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면복권을 청하는 자들이 몇 있었습니다. 모두 의문의 죽임을 당했지요. 그 이후 장 대장군 일가를 위해 나서는 이가 없었습니다.”

강소군은 잠시 충격을 받은 듯 가만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제까지 장홍 대장군을 모함한 이를 한왕으로 알고 있었다.

한왕 역시 그에게는 숙부가 된다. 그가 장선백과 영영의 복수를 하려면 숙부에게 칼을 겨눠야 한다.

그런데 진운초의 말을 들으니 더 깊은 흑막이 있는 모양이었다.

“초강립이 방일옥을 죽이려 한 이유는 분명 장홍 대장군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

연회는 합비 지부 육일청의 별원에서 열렸다. 주첨기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지부와 몇몇 고관들만 모였다.

주첨기는 연화심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다. 연화심의 뒤를 중랑이 호위무사로 따랐다.

‘이런 미인이 합비에 있었나?’

연화심을 본 육일청은 입이 딱 벌어졌다.

연화심은 지난해 여름부터 올 봄까지 육 개월 사이에 몰라보게 바뀌었다.

고초를 겪으며 몸과 마음이 성숙해지자 꽃이 피듯 미모가 피어났다. 게다가 큰 상처를 입고 난 뒤라 낯빛이 창백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하였다.

또한 냉랭한 표정 때문에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이분께서는….”

육일청이 비빈이라도 같이 온 줄 알고 예우에 대해 물으려 하자 주첨기가 손을 저었다.

“오해하지 말게. 최근 큰일을 당하여 상심이 크다기에 함께 자리를 하자고 청한 분이네.”

“그렇군요. 잘 오셨습니다. 연회에는 미인이 있어야 빛이 나지요.”

연화심의 뒤에 있던 중랑은 예를 취하는 육일청의 눈에 한 줄기 음험한 빛이 흐르는 걸 보았다.

중랑은 낭인 생활을 하며 감각을 단련하여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삼도문에서 연화심의 호위로 있으며 잠시 무디어졌으나 최근 몇 달 사이 고전을 겪으며 낭인 시절의 감각이 살아났다.

‘이 연회, 수상하다!’

육일청도 중랑이 신경 쓰이는 듯 슬쩍 훑어봤다.

중랑은 연화심의 검까지 차고 와서 쌍검을 쓰는 검객으로 보였다. 육일청이 지나는 말처럼 물었다.

“이분은 쌍검을 쓰시는 분이군요. 기세가 날카로운 걸 보면 예사 분이 아니신 것 같군요.”

주첨기는 중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연화심의 호위로만 알 뿐이다.

“제 의오라버니이십니다.”

연화심이 간단히 소개하였다.

주첨기가 의외라는 듯 중랑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 또한 무공을 익힌 고수라 보는 안목이 있다. 이제 보니 휘하 장수들보다 기세가 뛰어나 보였다.

‘좋은 검수다. 연 낭자의 내력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

주첨기가 연화심을 다시 봤다.

연회가 시작되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며 흥을 돋웠다.

‘화심아. 합비 지부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조심해야 한다.’

중랑이 연화심에게 전음으로 일렀다.

육일청이 술을 권하는데 연화심은 입에 대었다가 놓았다.

육일청은 이를 놓치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미인께서는 술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모양이오.”

“실은 얼마 전 부상을 입어 아직 회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조심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육일청의 눈에 다시금 음험한 빛이 스쳤다.

연회가 한창 깊어갈 때 육일청이 말했다.

“연회에 여흥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평소 검무를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검무에 능한 재주꾼들이 있어 불러 놨습니다.”

육일청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네 명의 여인이 검을 들고 들어왔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화려한 무장의 복장을 하고 서니 볼만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자 여인들이 그에 맞춰 검무를 추었다.

-쉭! 쉬식!

합(合)을 맞춰 검을 휘두르니 연회장에 검광이 번뜩였다. 검은 화려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좋구나!”

주첨기가 감탄하였다.

그러나 중랑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쨍그랑!

어느 순간 육일청이 들고 있던 술잔을 놓쳤다.

“이런….”

육일청이 술잔을 집어 드는 척하다가 옆으로 뒹굴었다.

그게 신호였다.

검무를 추던 여인들이 일제히 주첨기를 향해 날아들었다.

“흥!”

주첨기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앞에 놓인 식탁을 걷어찼다.

주첨기가 뒤로 손을 내밀자 호위들이 검을 건네고 앞으로 나섰다.

-쉬쉬식!

악공들이 언제 꺼냈는지 쇠뇌를 겨눠 주첨기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큭!”

주첨기의 앞을 막고 있던 호위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태자를 생포해라!”

육일청이 외쳤다.

연회에 참석했던 고관들이 뒤로 빠지고 그들의 호위로 왔던 무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육일청은 주첨기를 향해 읍을 하며 말했다.

“태자께서 순순히 따라 주시면 피를 흘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육일청! 네가 모반을 하려는 것이냐?”

육일청이 허리를 펴고 여유를 부렸다.

“하하, 이 나라는 강자의 것입니다. 선황께서도 조카의 강산을 힘으로 취하여 그 본을 보였는데 지금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중랑은 연화심을 끌고 대청 한쪽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검을 받아.”

중랑이 연화심의 검을 건네주었다.

“태자를 제외한 자들은 모두 죽여라. 아, 저 여인은 생포해라.”

육일청이 연화심을 가리켰다. 눈빛에 흑심이 가득했다.

***

장씨 일가의 장원은 폐허가 된 지 오래다. 전각은 무너지고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였다.

강소군은 언덕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어둠에 잠긴 장원을 내려다봤다.

강소군의 눈에 곳곳에 숨어 있는 자들이 보였다. 복면자객 일행이 혹시라도 폐장원으로 숨어들지 모르기에 매복을 깔아 둔 것이다.

강소군이 몸을 날려 어둠을 타고 장원으로 스며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