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진운초는 강소군의 반응에 크게 놀랐다.
강소군은 지난날 그가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외모가 거칠게 변했다 싶었는데 성격 또한 바뀐 모양이다.
전후사정 따지지도 않고 몇 마디 섞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젓가락을 튕겨 방일옥의 볼을 뚫어 버렸다.
-쉬쉬식!
방일옥의 두 호위가 칼을 쳐 왔다.
-퍽! 퍽!
강소군의 주먹이 번뜩이는 도광 사이를 비집고 호위들을 가격하였다.
호위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크으… 이놈이 감히….”
방일옥이 젓가락을 뽑아 던져 버리고는 강소군을 향해 권을 질렀다.
-턱!
강소군이 손바닥으로 방일옥의 권을 받았다. 권에 실린 경기가 작지 않았음에도 강소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소군이 방일옥의 주먹을 감싼 손을 쥐었다.
-우두둑!
방일옥의 손뼈가 어긋나는 소리였다.
“크아악!”
손뼈가 바스러지자 방일옥이 비명을 질렀다.
강소군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잡아당겨 방일옥의 멱살을 잡아챘다.
“꺽, 꺽….”
방일옥은 목이 조여 오자 꺽꺽 소리를 냈다.
강소군은 말이 없었다. 그저 방일옥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갈길 뿐이었다.
퍽!
단 일권에 코뼈가 주저앉았다.
“고, 공자… 그는 방연소의 장남입니다.”
당황한 진운초가 오히려 말렸다.
경성으로 천도하였지만 남경에는 육부편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방일옥의 아버지 방연소는 남경 육부의 우두머리로 사실상 황제를 대리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하면 남경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다.
방연소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 방일옥이다. 아직 관직을 받지 않았지만 방부(傍府)의 후계자로 남경에서는 황자처럼 행세했다.
강소군은 그 이야기를 듣고도 말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퍽!
엄청난 충격에 방일옥은 정신이 혼미하여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사죄해라!”
강소군이 방일옥의 머리채를 잡아 진운초에게 향하게 하였다.
“으으….”
“기회는 단 한 번이다.”
강소군의 목소리는 나직하였으나 더없이 싸늘하였다. 거역하면 바로 가차 없이 죽음을 내릴 게 확실했다.
그러나 방일옥은 느닷없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강소군이 손을 들어 방일옥의 목을 치려 하자 진운초가 황급히 막았다.
“공자님! 안 됩니다!”
강소군이 진운초를 바라봤다. 진운초는 강소군이 뿜어내는 살기에 등골이 서늘했다.
진운초가 사력을 다해 막았다.
“이렇게 죽이면 안 됩니다.”
강소군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방일옥의 머리를 밀쳤다.
방일옥은 이미 혼절하여 힘없이 모로 쓰러졌다.
“술맛 버렸군. 자리를 옮기지.”
강소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공자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진운초가 황망한 얼굴로 쓰러진 방일옥과 호위들을 바라봤다.
***
연화심은 심마백이 복용할 탕약을 달였다.
장무강과 위응환은 지령복혈초를 구하기 위해 운남으로 떠났다. 안정을 찾은 심마백을 돌보는 일은 중랑과 연화심의 몫이었다.
심마백은 간신히 일어나 거동할 정도로 회복하였다.
연화심 역시 중상을 입었으나 강소군의 치료와 대연의결 수련으로 빠르게 회복하였다.
대연의결을 수련하면서부터 중랑과 연화심의 무공은 한 단계 성장하였다.
대연의결은 심신을 의연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연화심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
중랑이나 산동삼호의 도움을 부담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도 버렸다. 대신 그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자신을 성장시키고자 하였다.
연화심이 탕약을 가지고 산동삼호의 거처로 가는데 정원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전신에서 귀티가 흘렀다. 정하무관에 묵고 있는 황태자 주첨기였다.
주첨기는 보기 드문 미인이 탕약을 가지고 가는 걸 보자 호기심이 동했다.
오후에 상관청유가 왔을 때 주첨기는 슬며시 미인의 정체를 물었다.
“연화심이라는 낭자로 강호 방파 간의 다툼에 부친을 잃고 잠시 본각에 의탁을 하고 있습니다.”
상관청유의 말에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같은 미인이 사고무친의 신세라는 말인가? 참으로 안됐군.”
상관청유는 내심 떨떠름해하였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있다. 영웅까지는 아니어도 당금 황제의 아들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주첨기다. 그가 원한다면 취하지 못할 여인이 없을 것이다.
‘태자가 연 낭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거 참 곤란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상관청유는 황실이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은 안다. 이미 여럿 비빈이 있는 데다, 태자비의 투기가 대단하다는 소문도 들었다.
대정무각에 의탁하였다가 여인을 거두어 돌아가면 무슨 덤터기를 뒤집어쓸지 염려되었다.
상관청유가 화제를 돌렸다.
“이 장군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호위군을 수습하여 달려오는 중입니다.”
주첨기의 호위대장 이정무는 적을 유인하다 소식이 끊긴 바 있다.
“또한 대각주께서 본각의 정예를 이끌고 오는 중입니다. 하지만 호위군과 본각의 무력만으로는 적을 막기 어렵습니다. 경성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흥! 한왕이 직접 온다 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주첨기가 코웃음을 쳤다.
한왕이 항우와 버금가는 천하장사로 알려져 있지만 주첨기 또한 전장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는 지는 해에 불과해. 시간은 나의 편이다!”
주첨기의 말대로 그는 젊고 한왕은 나이 들어가고 있다.
‘칼은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는다오.’
상관청유가 내심 탄식하며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합비 지부대인이 사흘 후 태자님을 모시고 연회를 열겠다고 청첩장을 보내 왔습니다.”
“연회라니? 지금 이 판국에 무슨 연회란 말인가. 합비 지부는 한가한가 보군.”
합비 지부 육일청은 주첨기를 찾아 정하무관을 한 번 다녀간 바 있다. 하지만 내심을 알 수 없어 조심하고 있던 터였다.
주첨기가 합비 지부의 초청을 일축하였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잠깐.”
상관청유가 일어나려는데 주첨기가 붙잡았다.
“지부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지.”
주첨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연회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겠지? 연 낭자의 처지가 딱하니 연회에 초대하는 게 어떻겠나.”
역시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연 낭자는 큰 부상을 입은 지 얼마 안 되어 참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상관청유가 은근히 만류하였으나 주첨기는 호위를 보내 연화심에게 뜻을 전했다.
연화심이 의아하여 호위에게 물었다.
“대정무각의 귀빈께서 무슨 일로 저를 연회에 초대하시는 건지요?”
“주공께서 연 낭자의 사정을 들으시고 위로를 하고 싶으시다 하십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중랑이 내심 미간을 찌푸렸다.
대정무각에 귀빈이 든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 사람을 위해 정하무관의 모든 제자가 동원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 혈전을 벌였다.
“대체 당신들의 주공은 어떤 분이시기에 면식도 없는 우리를 초청하는 겁니까?”
“그분의 신분은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호의에서 청하신 것이니 함께하셨으면 합니다.”
호위무사가 완곡하게 수락할 것을 요구했다.
연화심이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말미를 주었으면 합니다.”
연화심은 원래 영민하였다. 냉정을 찾자 신중해졌다. 대정무각 귀빈의 청을 무턱대고 거절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봤다.
호위무사가 돌아가자 연화심이 중랑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대정무각의 귀빈이라는 자의 정체를 아시나요?”
“나도 궁금하다. 좀 알아봐야겠구나.”
중랑은 대정무각의 일에 공연히 관심을 가졌다가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까 싶어 귀빈에 대해 모른 척했으나 이제는 둘의 문제가 되었다.
***
“공자님. 모시러 왔습니다.”
강부의 총관 모상이 온종일 객잔 앞에서 완강하게 버텼다.
“집을 놔두고 객잔에 묵으시다니. 대체 왜 이러십니까?”
모상의 고집은 대단하여 결국 강소군도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강부는 고요하였다.
강소군이 잠적한 뒤 모상은 많은 하인을 내보내고 꼭 필요한 인원만 두었다.
많은 전각을 폐쇄하다시피 하였으나 강소군의 거처만은 늘 쓸고 닦아 그가 머물 때와 달라진 점이 없었다.
돌아온 다음 날 아침 강소군은 정원을 돌보기 시작했다. 하인이 모자라니 정원에 잡초가 무성하였다.
“…?”
후원의 잡초를 뽑던 강소군은 뒤편 깊숙한 전각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가 아니면 눈치채지 못할 아주 미약한 기운이었다.
강소군은 전각을 폐쇄한 자물쇠가 뜯겨 나간 것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다.
-끼이익.
어두운 실내에 아침볕이 들었다.
강소군의 시선이 실내 한쪽으로 향했다. 구석진 곳에 흑의를 걸친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한쪽 다리를 뻗고 있었다.
여인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음에도 사력을 다해 검을 들어 강소군에게 겨눴다.
하지만 눈의 초점이 흐트러진 것으로 보아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지도 못하는 지경임이 분명했다.
여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여인이 쳐든 검의 끝이 떨렸다. 들고 있는 것도 힘든 모양이었다. 강소군은 그 자리에서 여인을 살폈다.
며칠 전 방일옥과 싸웠던 복면자객임이 분명했다.
‘초하란!’
강소군은 왠지 낯익은 여인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여인은 강소군이 다가오자 검을 들고 일어나려 하다 그대로 쓰러져 혼절하였다.
강소군이 초하란의 상세를 살폈다. 초하란은 도주하다가 방일옥의 염주 알을 맞았는데 허벅지 뼈가 부러진 듯했다.
허벅지가 퉁퉁 부어 있었다. 상처를 돌보지 않아 덧난 것이 틀림없었다.
강소군이 초하란을 안아 들고 자신의 처소로 갔다.
시비가 보고 화들짝 놀랐다.
강소군이 자신의 침상에 초하란을 누이고 시비에게 말했다.
“모 총관을 불러라. 그리고 더운물을 가져와 몸과 상처를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혀라.”
시비가 나간 뒤 조금 지나자 모상이 황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조용히 의원을 부르게. 소문나지 않게끔 입이 무거운 자라야 하네.”
모상이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나갔다.
시비들이 더운물과 옷을 가지고 오자 강소군이 밖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시비들이 나오고 마침 의원이 당도하였다.
강소군이 의원과 들어가 초하란의 상세를 살폈다.
“허벅지 뼈가 부러졌군요. 응급처지를 제대로 하지 못해 주위 살이 썩어 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의원이 침으로 죽은피를 뽑아내고 뼈를 맞췄다.
“탕약을 들면서 두어 달 요양을 하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의원이 약방문을 써 주고 돌아갔다.
강소군이 다시 모상을 불러 별원을 치우게 하고 초하란을 옮겼다.
“이 낭자가 누구입니까?”
모상은 강소군이 초하란을 돌보는 연유를 물었다.
“장 대장군의 수하라네.”
초하란은 장홍 대장군 휘하 장수 초강립의 딸로 그녀 역시 군문의 장수였다.
“예?”
모상이 놀라 대답하면서도 이맛살을 찌푸렸다.
장 대장군이라면 장홍을 말하는 것이다. 모반의 죄로 죽임을 당했으니 역적이다.
‘역적의 수하라니. 좋지 않아.’
모상이 걱정하고는 시비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였다.
초하란은 사흘이 지나 깨어났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하는데 강소군이 들어섰다.
“나를 알겠는가?”
초하란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강소군이다.
“강 공자님 아니십니까?”
초하란은 그제야 자신이 방일옥의 염주 알을 맞고 강부로 피신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강부는 폐장원이 되다시피 하였으니 숨어들기 알맞았던 것이다.
초하란은 불현듯 아버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일어나려다 말고 허벅지 부목 때문에 주저앉았다.
“초 장군은 내가 모셔두었다.”
강소군이 초하란의 생각을 읽은 듯 말해 주었다.
초하란이 오열을 하였다. 강소군은 묵묵히 시간을 주었다.
이윽고 초하란이 정신을 수습하자 강소군이 물었다.
“방일옥을 암살하려던 이유가 무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