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56화 (5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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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은 탁자 위에 놓인 대연의결을 한참 바라보았다.

‘지키려는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왠지 모를 자존심이 대연의결을 선뜻 펼치기 어렵게 만들었다.

‘아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 그에게 이미 천성검법의 오의까지 전수받았지 않은가.’

중랑은 마음을 굳히고 대연의결을 펼쳤다.

먹물이 선연한 것으로 보아 강소군이 직접 쓴 게 분명했다.

‘대체 그의 무공이 얼마나 깊기에 내공서를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는 걸까?’

중랑은 대연의결을 강소군의 무공으로 오해하였다.

사실 대연의결은 무당의 전대 고인 현치자가 남긴 유산 중에 하나다.

황실무고에 소장되어 있기에 강호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당의 태청심공을 바탕으로 현치자가 고안한 심오한 내공서다.

묵묵히 대연의결을 읽어 내려가던 중랑은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연의결은 천성육십사식을 위한 내공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중랑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강소군이 천성육십사식을 아는 것도 놀라운데 그에 적합한 내공심법까지 알고 있다니. 아무래도 연고가 있는 듯했다.

대연의결은 독특한 내공심법이었다. 마치 자연처럼 모든 것을 품었다.

대개 내공심법은 한 번 익히면 다른 류의 내공을 익히기 쉽지 않다. 기운이 상충하여 자칫 주화입마에 들기 쉽다.

중랑이 대연의결을 펼치기를 주저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대연의결은 중랑이 익혔던 육합심법을 그대로 품어 주었다.

마치 모든 내공의 조종이라 할 만했다. 대연의결은 대해처럼 넓고 깊었다.

‘대연의결이면 천성육십사식의 극의를 넘을 수 있다!’

중랑은 가슴이 뛰었다. 그의 천성육십사식은 이미 절정에 달했다.

그 스스로 천성육십사식을 뛰어넘어야 함을 느끼고 있으나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대연의결을 얻은 것이다.

대연의결은 단순한 내공심법이 아니라 무공의 원리를 담고 있었다.

중랑은 그 이치를 얻는 순간 천성검법을 넘어 검의 궁극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중랑은 자신의 거처에서 두문불출하고 대연의결에 따라 운기조식을 하였다.

그동안 육합심법으로 쌓아 왔던 내공이 대연의결의 기운으로 바뀌며 내상 또한 빠르게 치유되어 갔다.

중랑은 대연의결을 수련하면 할수록 큰 문파와 명문이 왜 강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명문대파의 진정한 힘은 오랜 세월 다져온 정대(正大)한 내공체계에서 비롯된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중랑은 연화심이 좌정할 수 있게 되자 대연의결을 전수하였다.

대연의결은 대자연을 품은 심법답게 수련하는 이의 마음을 유연하면서도 굳세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연화심은 아버지 연성결로부터 회천심법을 전수받아 연공해 왔다.

어려서부터 연성결이 정성을 기울였기에 내공의 틀은 중랑보다 넓고 깊었다.

연화심이 대연의결을 수련하자 회천심법에 의한 내공이 대연의결의 기운으로 전환되었다.

상처는 물론이고 우울하고 비틀어지려던 마음까지 바로잡혀 갔다.

***

피륙의 상처보다 내상은 치료하기도 어렵고 오래간다. 특히 혈적과 같이 음유하면서도 복잡한 기운에 당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심마백은 조운룡의 영약 덕분에 죽음에서 한 발짝 걸어 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다른 한 발은 저쪽에 걸치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장무강이나 위응환은 하루하루가 마치 일 년 같았다.

보름 정도 지났을 때 노이칠이 한 사람과 함께 산동삼호의 거처로 왔다.

“하하. 신의께서 왔네. 이제 자네 아우는 살았어.”

끌려온 사람은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키가 작은 노인이었는데 산골 촌부 같았다. 등에 짐보따리를 매고 있는데 약초 냄새가 은은히 풍겼다.

“마침 도성에 있어서 기별이 닿았다네. 약초를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면 얼마나 걸렸을지 몰랐는데 말일세.”

노이칠이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노인이 험험, 헛기침을 하며 침상에 누운 심마백을 보더니 노이칠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노인은 노이칠이 크게 당해 생사지경에 놓여 있다는 기별을 받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그런데 정하무관으로 들어서자마자 튀어나온 노이칠이 다짜고짜 끌고 온 곳이 여기다.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아니면 이 아우가 죽습니다.”

노이칠이 노인에게 매달렸다.

“에이, 못된 놈 같으니라고.”

노이칠의 기질을 잘 아는 듯 더 뭐라고 하지는 않고 심마백에게 다가갔다.

장무강과 위응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옆으로 비켰다.

노이칠이 다가가며 눈짓을 하였다.

“이 형님이 동약사라네. 서의동약(西醫東藥)이라는 말은 들어 봤지?”

노이칠의 말에 장무강과 위응환이 크게 놀랐다.

서의동약.

강호에서 두 사람의 신의를 가리키는 별호였다.

동약사 중유선은 약으로 치료하지 못하는 법이 없다는 신의다.

그의 또 다른 신분이 대정무각 삼각의 주인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장무강이 포권을 하였다.

“후배가 동약사님을 뵙습니다. 제 아우가 아직 죽을 목숨은 아닌가 봅니다.”

중유선이 손을 내저었다.

“강호의 과장된 소문을 너무 믿지 말게.”

중유선이 눈을 감고 심마백을 진맥하였다.

“무척 음유한 기운이로군.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아하, 영약을 먹였군. 그 덕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거로군.”

중유선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중얼 심마백의 상황을 늘어놓았다.

장무강과 위응환은 속이 타들어 갔다.

중유선이 심마백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라고 했나. 이 사람의 상세는 가볍지 않네. 제때 영약을 먹지 않았다면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을 걸세. 일단 목숨을 붙여 놓을 수는 있지만 완치를 하려면 몇 가지 구하기 힘든 약초가 필요하네.”

“그게 뭡니까. 뭐든지 구해 오겠습니다.”

위응환이 나섰다.

중유선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몇 가지 약초는 돈만 있으면 구할 수 있지. 하지만 지령복혈초는 중원에서는 구하기 어려울 것일세.”

“지령복혈초가 뭡니까?”

“운남의 고산지대에서 자생하는 약초라네. 워낙 높은 곳에서 채취해야 하기에 운남에서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게야.”

“그렇게 희귀한 것입니까?”

“희귀하다고는 볼 수 없지. 다만 지령복혈초는 독을 품고 있는 데다 약초로 쓰이는 병증이 무척 한정적이라 채취를 하지 않는 것뿐이네.”

중유선이 말을 마치고 두 장의 약방문을 적었다.

“첫 번째 약방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으니 우선 이대로 지어 복용시키게. 그러면 거동은 할 수 있을 것이네.”

장무강이 약방문을 받았다.

“두 번째 약방에 따라 지령복혈초가 들어간 약을 써야 완치가 될 것이네.”

장무강이 감읍하여 중유선에게 연신 감사의 예를 표했다.

중유선은 눈치가 빨랐다. 산동삼호가 노이칠이 하는 일에 무척 중요한 자라고 여겼기에 호탕하게 손을 저었다.

“아닐세. 노 아우의 부탁인데 내가 어찌 과분한 예를 받겠는가.”

이로써 노이칠의 면이 살았다.

***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벌판에 시신이 즐비했다.

부러진 기치창검이 어지러이 널려있고 흘러나온 피로 땅이 온통 붉게 젖었다.

피를 뒤집어쓴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으….”

강소군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운기조식을 하던 중에 잠든 게 분명했다. 꿈이었으나 현실처럼 생생했다.

분명 있었던 일이다. 무총과는 다른 살육의 현장이었다.

혈룡기가 다시 깨어난 후 알 수 없는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현실처럼 생생했다.

강소군은 꿈을 돌이켜보려 했으나 그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강소군이 정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창밖이 어둑어둑하다.

강소군이 객잔 반점으로 나갔다.

점소이가 그를 보더니 이 층 창가 자리로 달려갔다. 강소군이 늘 앉는 자리로 가서 예약이라는 팻말을 치우고 기다렸다.

강소군이 앉자 잘하지 않았느냐며 칭찬을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올릴까요? 신선한 홍선어로 끓인 탕이 좋습니다만.”

남경 청화빈루(淸華賓樓).

이 객잔에 온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건만 점소이는 강소군의 취향을 꿰뚫어 보았다.

어딘가 모르게 신비로운 손님이 세상사에 무심한 듯 소탈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명문 귀족 집안 출신이라는 걸 눈치 빠르게 알아챘다.

강소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 몇 가지 야채를 곁들이겠습니다. 술은 늘 드시는 걸로 하고요.”

점소이가 그날 괜찮은 음식을 줄줄 외웠다.

“한 사람이 더 올 것이다. 양을 충분히 줬으면 좋겠군.”

강소군이 품에서 은자를 꺼내 건넸다.

점소이가 재빨리 받아 사라졌다. 아마도 음식값을 하고도 남을 것이다.

강소군이 잔돈을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이리 살갑게 군 것이다.

창밖에는 어느새 옅은 어둠이 배어있다. 점포마다 등을 밝혔고 지나는 이들도 등롱을 든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남경의 번화가였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다. 관리와 문사, 상인과 부녀자,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물결을 이루고 다녔다.

어디선가 요란한 폭죽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입춘이다.

강소군의 눈에 이제 열 살이 조금 넘은 듯한 아이들이 들어왔다.

남녀 무리를 지은 아이들은 명문가에서 나온 한집안 아이들인 듯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강소군이 물끄러미 아이들을 보는데 탁자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 다져진 몸에서 날 선 검의 기운이 느껴지는 마흔 가량의 남자였다. 입은 차림으로 보아 포두임이 분명했다.

포두가 다가오자 강소군이 일어났다. 두 사람이 서로 예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강 공자, 돌아오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죽은 줄 알았던 강부의 외아들이 돌아온 소식은 남경 명문가에서 잠시 화제가 된 바 있다.

강부의 비극은 남경 명문가에서 가끔 거론된다.

강 국공이 병사한 뒤 하나뿐인 아들이 전장에서 죽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났다.

몇 년 사이 일가족이 모두 죽었으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죽었다던 아들이 살아왔다. 참새 떼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더구나 선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황실의 외손이라 더욱 그랬다. 말이 잠잠해질 무렵, 그 아들이 돌연 잠적하자 다시 한 번 수상한 소문이 돌았다.

가장 유력한 소문은 장홍 대장군 일가의 몰락과 관련된 것이었다.

‘선황의 총애를 믿고 장홍 대장군 일가의 몰락에 항의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됐다.’

남경부 포두 진운초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강소군이 지난날 자신이 강부의 호위대장으로 있을 때 보았던 아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았던 소년은 호쾌하면서도 다정다감하였다. 아랫사람들에게도 예를 잃지 않아 강부(康府)의 위아래 모든 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아꼈다.

그 역시 자신의 팔뚝에 매달려 비무를 하자고 청하던 소년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런데 오늘 눈앞에 있는 강소군은 달랐다. 알 수 없는 살기가 전신에서 흘렀다.

강소군이 감추려 하지만 피 냄새를 맡고 사는 그는 대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말이 없다.

“모 총관도 많이 늙었더군요.”

진운초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하였다. 진운초는 강부의 총관 모상과 친분이 깊어 가끔 왕래하였다.

강소군은 남경에 들어왔으나 강부를 찾지 않았다.

진운초는 강소군이 자신의 집인 강부를 놔두고 객잔에 머무는 게 의아한 듯했다. 모상을 핑계로 이유를 듣고자 한 것이다.

마침 술과 음식이 나왔다.

강소군이 진운초에게 술을 권하고 스스로 마셨다.

강소군이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두 사람의 신원을 알고 싶어 청했습니다.”

강소군이 품에서 호패와 군패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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