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55화 (5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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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다른 말로 천자(天子)라고 한다. 하늘에서 낸 자이기에 황제는 허점이 없다.

황제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첨기 역시 장차 황제의 위에 오를 황태자다. 그런 그가 지난날 실책을 인정한 것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강소군이 힐난하듯 반박하자 주첨기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주첨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조정의 일이란 간단치 않은 것이다. 장홍 대장군에게 모반의 의사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 주위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사직을 지키는 일이 칼날 위를 걷는 것이라는 걸 네가 안다면 그리 말하지 못할 것이다.”

강소군이 내심 탄식을 하였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고한 피가 흐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황실에 다시 한 번 염증을 느꼈다. 더 이상 논박을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주첨기는 강소군이 말이 없자 더더욱 화가 치민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목소리를 낮추고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왜 이리 곤란한 지경에 처했는지 너는 아느냐?”

당금 황제는 북경이 변방과 너무 가까워 다시 남경으로 천도를 할 생각으로 태자 주첨기를 보낸 것이다.

주첨기는 남경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습을 받고 호위군과 떨어져 도주하는 중이다.

대정무각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황위를 노리는 자가 조정에 수두룩하다는 뜻이다.”

주첨기가 강소군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나를 돕지 않는다면 그건 반역의 무리와 뜻을 함께한다는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이다.”

“사람이 없는데 오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흥! 내가 너를 아끼지 않았다면 이리 속내를 털어놨을 것 같으냐? 계속 그리 교묘한 언변으로 나를 능멸하고도 살아남을 것 같으냐?”

주첨기가 이번에는 은근히 위협을 했다. 지금은 잠시 쫓기는 신세지만 그는 황태자이자 당금 황실의 실세이다. 그만한 권력이 있다.

허나 강소군은 담담하게 예를 취했다.

“그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찾아온 것은 이 세상에 강휘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강소군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잠깐!”

주첨기가 인상을 썼다.

“네 신분이 버린다고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부황의 신하이고 명에 따라야 한다. 돌아가신 이모님을 생각해 지금 너를 붙잡지는 않겠다. 하지만 너 역시 황실의 일원! 조만간 벌어질 국난은 피할 수 없을 것임을 명심해라. 그때가 되면 나를 찾아오거라.”

주첨기는 지금은 무슨 말로도 강소군을 잡을 수 없음을 알았다. 그저 앞으로의 인연을 남겨 두려 하였다.

강소군이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이 세상의 눈빛이 아니다.

주첨기는 섬뜩한 느낌에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강소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 예로 핏줄의 인연은 끝났소. 죽은 자를 찾으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오.”

주첨기는 아연실색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인물은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죽음과 파괴의 기운이었다.

“…!”

주첨기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강소군이 사라진 뒤였다.

***

강소군이 짐을 챙겨 자신의 거처를 나왔다.

내원 문을 지나는데 중랑이 서 있었다. 내상을 입어 안색이 창백하였다. 아직 거동하기 힘들 텐데 일부러 나와 있음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그냥 가는 거요?”

중랑의 말이 곱지 않았다.

중랑은 강소군이 인사도 없이 떠나는 데 익숙했다. 삼도문에서도 상관부에서도 강소군은 말없이 떠났다.

“화심이 당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정말 모르오?”

중랑은 강소군이 쓰러졌을 때 방문 앞에 앉아 지키던 연화심의 모습이 떠오르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강소군이 이대로 떠나면 연화심은 또다시 낙심할 것이다.

내상 입은 몸을 끌고 온 것은 감사의 예를 표하려 함이었으나 외려 화를 내었다.

지금 중랑의 마음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어 아주 복잡했다.

연화심을 지키지 못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한 자신에 대한 열패감, 때맞춰 구하러 와 준 강소군에 대한 감사함, 그러나 이렇듯 무정하게 떠나는 행동에 대한 분노 등이 어우러져 가슴이 들끓었다.

강소군이 무심한 눈길로 중랑을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낭인으로 떠돈 중랑은 나이에 비해 냉철하고 단호한 면이 있었다.

강소군은 그라면 충분히 연화심을 지켜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강호에서 혈적이나 무창쌍과 같은 고수를 만난 건 극히 예외로 꼽아야 한다.

한 번 당한 노이칠이 두 번 실수하지 않을 것이니 중랑이나 연화심이 이번과 같은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소군이 눈을 들어 저 멀리 남경 쪽 하늘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내겐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강소군은 남경으로 향하기로 한 순간부터 장영영이 저 하늘 아래 어디선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중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화심이 강소군에 대해 품은 감정을 중랑만큼 아는 이가 없다. 그가 우려하던 결과였다.

“그리고 연 낭자는 강해. 그녀를 믿어라. 믿지 못하면 지키지도 못한다.”

강소군의 말이 중랑의 귓전에 천둥 치듯 울렸다.

‘믿지 못하면 지키지도 못한다!’

강소군의 이 말이 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중랑은 알지 못했다.

강소군은 장영영을 믿었다. 그랬기에 지금껏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렇다면 왜 돌아온 것이오?”

중랑의 물음에 강소군은 연화심의 맑은 눈빛을 떠올렸다.

천하가 적막한 그날. 비가 내렸다. 동정호에 떨어지는 비를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데 세상에 홀로 남은 자신의 존재가 덧없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그 순간 부질없는 살인을 하였다. 죽어 가는 신강삼랑의 모습에서 삶에 환멸을 느꼈다. 세상을 등지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자신을 잡아 준 맑은 눈빛이 있었다.

버드나무 뒤에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 눈빛이 그를 살렸다고 하면 중랑이 믿을까.

다시 만났을 때 맑았던 그 눈빛은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 슬픔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그 눈빛은 내내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강소군은 연화심의 맑은 눈빛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피에 잠긴 그의 영혼이 조금이나마 씻기지 않을까.

하지만 부질없는 기대라는 걸 안다. 연화심 또한 강호의 은원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강소군이 내심 탄식을 하고는 말했다.

“누군가 보자고 하여 왔을 뿐이다.”

마치 우연이라는 듯 말을 돌렸다.

중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소군이 둘러댔음을 모를 만큼 눈치 없는 중랑이 아니다.

‘자신의 인연만으로도 버거운 사람이구나!’

중랑은 강소군의 무심함에 담긴 무거운 짐을 어렴풋이 느꼈다.

동시에 강소군과 연화심 사이에 남다른 인연의 끈이 있음을 알아챘다.

근거 없는 느낌이었으나 강소군이 둘러대자 확신으로 굳어졌다.

천하를 오시할 무공을 지닌 자가 무엇이 걸려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겠는가. 다만 그게 무엇인지 강소군도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는 사람을 찾기 바라겠소.”

중랑이 몸을 돌렸다.

강소군은 그 길로 정하무관을 떠났다.

합비성을 벗어나자 불쑥 조운룡이 나타났다.

“나를 두고 내빼려 하다니 못됐소.”

강소군이 피식, 웃고는 한마디 하였다.

“수고했소.”

강소군이 연화심 일행을 거들어 준 일을 거론하자 조운룡이 딴전을 피웠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런데 웃을 줄도 알았소?”

강소군은 며칠 전 성벽을 넘을 때 자신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깨어져 나갔음을 느꼈다.

그 당시는 뭔지 잘 몰랐으나 어느 순간 스치듯 한마디가 머릿속을 지났다.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왔다!’

연화심이 찾아오기 전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오갔다. 아니, 죽음의 영역을 헤매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요천루주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죽은 자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요천루주의 사술은 대단했으나 죽은 마음까지 흔들지는 못했다.

연화심을 생각하자 다시 그 맑은 눈빛이 떠올랐다.

연화심이 찾아온 뒤에도 무수한 살생을 행했다. 피에 잠긴 영혼이 더 깊이 가라앉는가 싶었는데 오히려 점차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다.

그게 연화심 때문인지 혈룡기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부탁이 있소.”

강소군이 부탁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조운룡이 눈빛을 반짝였다.

“말을 한 마리 구해 올 수 있겠소?”

강소군은 정하무관을 나오며 그냥 걸어 나왔다.

조운룡은 말을 타고 있었다. 조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조운룡이 말을 몰고 성으로 달려가는 걸 지켜보던 강소군이 돌연 신법을 펼쳤다.

관도를 벗어나 야산을 타고 남경으로 향했다.

잠시 뒤 말을 끌고 나타난 조운룡이 강소군의 행적을 찾지 못하자 어이없어하였다.

“이 인간이 사기도 칠 줄 아네?”

***

강소군이 떠났다는 말에도 연화심은 담담하였다.

“이번에도 그에게 신세를 졌군요.”

연화심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에게 짐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중랑이 크게 내상을 입고 심마백은 생사기로를 오가고 있다.

천무방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 등이 어우러져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연화심이다. 두 눈에서 한기가 절로 흘러나왔다.

“미안하구나.”

중랑은 자기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라버니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죠. 다 내 탓이에요.”

연화심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말수도 줄어들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부지런히 수련을 해 왔던 연화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간단하게 적의 손아래 무릎을 꿇고 나니 모든 게 소용없고 허무하게 느껴졌다.

괴로워하는 연화심을 보는 중랑의 마음도 무거웠다.

“우선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다. 마음을 편히 가져라.”

한마디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중랑이 침상에 앉아 운기조식하며 내상을 다스리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날세.”

노이칠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손에 작은 보따리가 들려있다.

“어험. 자네의 검법은 뛰어난데 이를 받쳐 줄 내공이 약하더군.”

노이칠이 보따리를 풀러 책자 한 권을 건넸다.

“대연의결(大然意訣)?”

중랑이 책자와 노이칠을 번갈아 보았다.

“내공심법이라네. 자네의 검법과 어울릴 게야.”

“이걸 주시는 뜻이 무엇입니까?”

중랑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이고. 주면 꿀꺽 받아먹을 것이지. 왜 묻고 따지는 거야. 사람 난처하게.’

노이칠이 속으로 끙끙댔다.

강호에서 이런 무공을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전수하는 경우는 없다. 아니, 중랑이 대정무각에 입각한다는 조건이라 해도 과분하다고 할 수 있다.

강소군이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중랑에게 전해 달라고 하여 가져온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라고 생각하게.”

중랑이 고개를 저었다.

“대정무각에 의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이러실 것까지 없습니다.”

‘이놈도 참 뻣뻣하군. 요즘 젊은 놈들은 왜 이런 거야?’

노이칠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정보를 수집하러 다닐 때는 능글맞게 본심을 잘도 속이는데 이런 일에는 의외로 서투른 노이칠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강 협이 주고 간 게야. 받든 말든 알아서 하게.”

노이칠이 벌떡 일어나 나가다 한마디 더했다.

“나도 물었지.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그랬더니 그러더라고.”

“…!”

“지키고 싶은 자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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