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연화심을 눕히자마자 침상 위 하얀 요에 피가 번졌다.
강소군은 연화심의 상세를 살폈다.
크게 베인 상처에서 핏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위응환이 금창약을 뿌렸으나 워낙 상처가 커 지혈되지 않은 것이다.
“으음.”
연화심이 고통 섞인 미약한 신음성을 냈다.
강소군이 수혈을 찍고 상처와 복부 주위의 요혈을 짚었다. 뒤틀린 연화심의 장부가 제자리를 잡았다.
강소군은 보따리에서 실과 바늘을 꺼내 익숙한 솜씨로 상처를 꿰맸다.
상처를 꿰맨 후 옆에 정좌를 하고 앉아 양손을 내밀었다. 장심에서부터 은은한 금빛이 흘러나왔다.
금단진공의 기운이 연화심의 복부로 들어가 장부를 감쌌다. 따뜻한 기운이 닿자 일그러졌던 연화심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강소군은 계속하여 금단진공을 주입하였다.
금단진공의 기운이 연화심의 전신 경맥을 바로 잡으며 흩어진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들였다.
‘윽!’
금단진공 기운이 연화심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자 억눌려 있던 혈룡기가 발호하였다.
방금 피맛을 본 혈룡기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빠르게 강소군의 혈맥을 따라 폭주하였다.
-퍽! 퍽!
강소군의 자신의 가슴 요혈을 두드려 혈룡기의 폭주를 제어하고는 계속해서 금단진공을 연화심의 몸으로 흘려보냈다.
-쾅!
중단에 갇힌 혈룡기가 광분하였다.
강소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금단진공으로 연화심의 기혈 흐름을 맞춰나갔다.
한 시진가량 지났을 때 강소군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혈룡기에 잠식되어 핏빛에 젖어 있었다.
“으음.”
강소군이 기혈을 맞추며 짚었던 수혈이 풀리자 연화심이 깨어났다.
혼몽한 와중에 피에 젖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악!”
연화심은 핏빛에 젖은 강소군의 두 눈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치고는 다시 혼절하였다.
강소군이 쓴웃음을 짓고 좌정을 하였다.
강소군은 거의 한 시진가량 금단진공을 운기하고서야 혈룡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강소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핏빛 기운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눈동자 깊은 곳에 일렁이는 붉은 기까지는 감출 수가 없었다.
***
심마백은 죽은 듯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조운룡이 건넨 영약을 복용했지만 내상이 깊어 운신조차 어려웠다.
위응환이 핏기 하나 없는 심마백의 얼굴을 한참보다 주저하며 입을 열어다.
“대형.”
장무강이 위응환을 바라봤다.
“강 협에게….”
위응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강소군에게 내상을 손봐 달라고 하고 싶은 위응환이다. 장무강이 허락만 한다면 그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참이다.
죽기 일보 직전의 연화심을 살려낸 강소군이다. 그 막강한 내공이라면 심마백을 생사기로에서 한 발짝 더 이쪽으로 당겨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무강은 침중한 안색으로 말이 없었다.
“대형….”
위응환이 다시 부르자 장무강이 탄식을 하며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마백 형이 죽게 생겼는데 뭐가 그리 중요하단 거요.”
“너는 그가 뿌려낸 강기가 이상하지 않더냐?”
위응환이 흠칫, 하였다.
강소군이 창을 휘두를 때 쏟아져 나온 핏빛 강기에 그도 무척이나 놀랐다.
강기를 본 적이 많지 않으니 뭐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무척 흉폭한 기운이었다.
살기에도 종류가 있다.
강소군이 쏟아낸 핏빛 강기에는 수많은 원혼의 한이 뭉친 듯 한기가 풀풀 넘쳐흘렀다.
“피를 먹는 혈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
장무강이 말을 이었다.
“피를 먹는 혈룡?”
“전장에 떠도는 오래된 전설이야.”
위응환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오래된 이야기이니까. 이제는 군인의 집안에서 아이들에게 들려 주는 옛날이야기라고나 할까.”
장무강과 심마백은 대대로 이어 온 군인의 집안이다. 반면 위응환은 스스로를 농민의 자식이라고 했다.
“아주 옛날, 아직 나라가 형성되지 않은 고대에는 부족들끼리 무리 지어 평화롭게 살았다더군. 그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부족이 하늘의 천룡이 내려와 통치한다는 영(瓔)족이었다는 거야.”
***
신과 인간의 경계가 아직 나뉘지 않은 세상에서 영족은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다른 부족들은 영족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였다. 스스로 찾아와 동맹을 맺은 부족도 여럿이었다.
어느 날 천하에 전란이 일어났는데 영족은 동맹 부족의 배반으로 황량한 계곡에서 포위되어 전멸하고 말았다. 그 싸움에서 무려 백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천룡의 피를 받아 영족을 통치하던 족장은 수십만 적을 죽였으나 끝내 홀로 남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창을 땅에 꽂고 용으로 화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피로 물든 용은 하늘을 한 바퀴 돌며 저주를 남겼다.
‘반드시 돌아와 인간세를 피로 씻으리라!’
사람들은 영족이 몰살당한 계곡을 아예 메워 버렸는데 어느 날 그 자리에 커다란 무덤이 나타났다.
누가 세웠는지 모를 무덤 또한 세월이 지나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
“황당한 이야기로군요. 홀로 수십만 적을 죽였다니.”
위응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장무강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또한 어렸을 적 집안 어른으로부터 들은 기이한 이야기로 여겼을 뿐 실제로 믿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설이라지 않았나. 아무튼 무총에 들어가면 인간 세상을 평정할 신공을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변방 군인들 사이에 돌아다녔다네.”
“신공이요?”
“천룡이 피에 물든 혈룡으로 화해 남긴 저주 때문이지. 혈룡은 복수를 위해 자신의 기운을 담은 신공을 남겼고, 그걸 얻은 자가 인간세를 피로 씻는다는 이야기지.”
“그런 무공이 있다면 저도 무총에 들어가고 싶군요.”
위응환의 말에 장무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무총을 찾아 헤맸지.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아는 자가 없었어. 사실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한 이야기 아닌가. 그럼에도 마치 정말 있는 것처럼 갖가지 소문이 떠돌아다녔지.”
“소문이요?”
“여러 가지 소문이 있지. 그중에 하나가 피를 먹는 혈룡이야. 사실은 천룡이 부상을 입어 승천하지 못하고 혈룡으로 전락하여 무총에 은신하고 있다는 거지. 그가 다시 천룡이 되기 위해선 백만 명에 이르는 인간의 피가 필요하다나. 그래서 소문을 퍼뜨려 사람들이 찾아오게 한다는 거지. 오는 이들의 피를 자신의 승천 제물로 삼는다는 거야.”
위응환이 실소를 흘렸다.
“정말 황당한 이야기네요. 뜬금없이 옛이야기를 들려 주는 게 강 협이 보여 준 핏빛 강기 때문이란 거요?”
장무강도 황당하다 생각했는지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나도 왜 혈룡의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네. 다만 강 협의 핏빛 강기를 보자 나도 모르게 무총의 전설이 생각나더라고.”
“하기는… 그 살기는 정말 대단했어요.”
위응환도 맞장구쳤다. 스치기만 해도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살기였다.
장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만 원혼이 담긴 살기라고나 할까? 그래서….”
장무강이 말꼬리를 흐렸다.
“혹시 마공이 아닐까 생각하는 거요?”
“그런 살기를 담은 무공을 정도라고는 보기 어렵지.”
장무강이 돌려 말했다.
“강 협이 마공을 익혔을 리가….”
위응환이 말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강소군의 무공은 나이에 비해 상식적으로 믿기 어려울 만큼 높다.
마공이 아니라면 그러한 성취를 이루기 힘들다. 그것도 무척이나 강력한 마공이 아니라면.
위응환은 자신도 강소군의 무공이 마공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에 말을 끊은 것이다.
“강 협의 내공 연원이 마공이라면 마백을 부탁할 수 없지.”
장무강의 말에 위응환도 묵묵히 침묵으로 수긍의 뜻을 나타냈다.
마공은 빠른 성취를 보이는 대신 불안정하여 대개의 경우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마인이 되고 만다.
주화입마에 빠져 폐인이 되거나 용케도 벗어난다 해도 이지를 잃고 피를 갈구하는 마인으로 살아가야 하니 무림에서 마공을 금기시하는 것이다.
마공의 성취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럴 가능성도 높아진다. 또 마공으로 얻은 내공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면 본연의 내공과 상충하여 오히려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연 낭자를 죽음에서 살렸으니 마공은 아닐 겁니다.”
위응환이 말했으나 확신이 없었다.
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것 자체가 마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연 낭자를 지켜보면 알겠지. 마공이라면 반드시 후유증이 나타날 게야.”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노이칠이 들어왔다.
침중한 얼굴로 들어온 노이칠이 장무강과 위응환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였다.
“면목 없게 됐네. 심 형제의 상세는 내가 책임지겠네.”
노이칠은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정하무관은 대정무각 구각의 핵심무력이다. 그럼에도 적이 난입하였고 그 결과 연화심과 심마백이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다.
안위를 장담했던 노이칠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무인이 강적을 만나 죽음을 맞는 건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 노 형님이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노 대형께서 그러시면 둘째 형님이 오히려 부끄러워하실 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장무강과 위응환이 오히려 노이칠을 위로하려 들었다.
‘역시 산동삼호는 호쾌하구나. 이런 인물들을 지기로 삼지 않는다면 대체 누구를 지기로 삼는다는 말인가.’
노이칠이 감격하여 말했다.
“명의를 불렀으니 조만간 당도할 것이네. 조금만 참게.”
“노 형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장무강과 위응환이 분분히 일어나 포권을 하고 감사해하자 노이칠은 오히려 더 있을 면목이 없어 그 방을 나왔다.
그는 방을 나오자마자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리 위급신호라지만 무관 경비까지 다 끌고 와?’
정하무관의 구각주 형운천은 사람이 강직하여 그와 가장 죽이 맞는 의형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단순 우직함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산동삼호의 처소를 나온 노이칠은 후미진 전각 앞에서 발을 멈췄다.
강소군이 머무는 곳이다.
산동삼호에게도 면목이 없지만 강소군은 더더욱 볼 낯이 없는 노이칠이다.
깊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날세. 강 협 있는가?”
스르륵.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 안쪽에서 싸늘한 한기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노이칠이 숨을 들이켜고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강소군은 방 정면에 있는 서탁에 앉아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노이칠은 그게 자신이 준 천무방에 대한 정보임을 알았다.
연화심의 치료를 마치고 나온 강소군은 노이칠에게 천무방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하였다.
평소라면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노이칠은 자신이 수집한 천무방 정보를 건네주었다.
노이칠이 다가가며 말했다.
“천무방은 방대한 문파라네. 알려진 무력은 삼 할이라고 봐야 할 걸세.”
강소군이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뜬금없이 물었다.
“신기수사는 어떤 사람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