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쾅! 콰쾅!
화룡도가 연달아 허공을 가르며 붉은 도기를 쏟아냈다. 거친 도기를 대나무 지팡이 하나가 가볍게 쳐냈다.
그때마다 폭음이 터졌다.
“크윽!”
조운룡이 결국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복면으로 가려진 조운룡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입가에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몇 합 만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세상에 정말 고수는 많구나.’
당장 쓰러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백발 노인이 가볍게 휘두른 대나무 지팡이가 마치 철장 같다.
조운룡은 눈을 부릅뜨고 백발 노인을 보며 운기조식을 하였다.
백발 노인이 조운룡을 보며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듣던 대로 제법이군. 노부의 흑죽을 받아내다니. 너는 내가 친히 죽여 주마.”
말을 마친 백발 노인이 공노와 귀영대를 보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는 게냐. 노부가 저 잡배들까지 뒤처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냐? 저놈들의 시신을 내 앞으로 끌고 와야 할 것이다.”
정하무관으로 온 귀영대는 모두 마흔 명이었다. 그중 십여 명이 위응환과 조운룡에게 당했다. 남은 서른 명이 이를 갈며 검과 도를 앞세워 서서히 장무강 일행과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공노는 땅바닥에 떨어진 과를 챙기고는 중랑에게 다가갔다. 그는 오로지 청부를 받은 자만을 노렸다.
위응환이 연화심을 풀어 심마백 옆에 누이고 암기 주머니를 들고 앞을 막았다.
장무강이 중랑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괜찮나?”
“저자는 내가 죽이겠소.”
중랑이 공노에게 검을 겨눴다. 연화심을 죽이려던 자다.
사실 그는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잠시 틈을 타서 운기조식을 하였으나 내력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동귀어진이라도 할 참이다.
공노가 실소를 흘리며 한 발 나아가는데 밤하늘 저편에서 기음이 울렸다.
-쌔애액!
모두 돌아보니 한 자루 핏빛 창이 날아오고 있었다.
창에 담긴 기세는 무척이나 난폭하여 마치 한 마리 혈룡이 날아오는 듯했다.
-퍽!
핏빛 창이 장무강 일행과 백발 노인 일행의 사이에 꽂혔다.
뒤이어 긴 소성이 들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강소군이었다.
***
조개량은 언덕에서 대정무각과 복면인들이 격전을 벌이는 걸 지켜봤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태자 주첨기가 대정무각에 의탁한 것도 그에게는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다.
‘역시 황실이 뒷배였던 걸까?’
강호일통을 꿈꾸는 조개량으로서는 골치 아픈 변수를 만난 셈이다.
대정무각과 도룡회는 지난 몇 년 급격히 세를 확장하였다. 그런데 그 뿌리가 모호했다.
천무방은 원래 호북 지역에서 대대로 뿌리내려온 작은 문파였다. 그러다 당대에 구연강이라는 걸출한 무인이 나왔다. 거기에 조개량이 가세함으로써 무력과 지략을 겸비하여 천하사패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요천루는 신비의 인물 요천루주가 사파를 규합하여 세웠으니 역시 그 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룡회와 대정무각은 근본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개량은 도룡회의 뒷배를 한왕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대정무각의 뒤에 황실이 있다면?
‘가만둬도 둘이 붙겠군.’
문제는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강소군을 쫓다 합비까지 왔는데 느닷없이 태자 일행이 나타났다.
한왕은 천무방주 구연강에게 태자를 잡아 달라는 서신을 보내 왔다. 부탁하는 형식이었지만 다분히 주군이 신하에게 명을 내리는 투였다.
구연강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다. 조개량 역시 조정과 엮이는 건 원치 않는다.
그런데 합비에서 태자와 딱 마주치다니. 상황이 공교로웠다.
대정무각과 대치하고 있는 복면인들은 분명 한왕의 사병들일 것이다.
모른 척하자니 한왕의 주문이 걸렸고 참전하자니 그다음 벌어질 상황이 예측되지 않았다.
싸움은 대정무각이 우세하였다. 대정무각의 각주가 셋이나 직접 싸우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염가의 무위는 놀라웠다. 무슨 수법을 쓰는지 몰라도 손을 휘저으면 주위에 있는 복면인들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게다가 태자 주첨기 또한 의외로 무위가 뛰어났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복면인들이 퍽퍽, 쓰러져 나갔다.
‘선황의 총애를 받았다더니 과연 그렇군.’
선황은 변방 전장을 누비면서 자신의 손자 주첨기를 데리고 다녔다.
현 황제는 문약했으나 이복동생인 한왕은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변방의 적이 끊임없이 날뛰는 상황에서 현 황제보다 한왕이 오히려 보위에 적합하다는 말이 조정 일각에서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선황이 현 황제를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지 않은 것은 손자 주첨기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황을 살펴보던 조개량이 뒤를 돌아보고 손짓하였다.
“우참.”
귀영대주 우참이 묵묵히 다가와 조개량의 명을 기다렸다.
우참은 말은 없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는 합류하려던 신무와 참룡이 다시 천무방으로 복귀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근접전은 신무와 참룡의 몫인데.’
천무방 무력대는 각기 효용이 다르다. 응천대가 돌격대라면 귀영대는 지원대였다.
신무와 참룡은 난전을 벌이는 데 익숙한 무력대다. 그런 무력대를 복귀시킨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참이 보기에 조개량은 무력대를 무력대답게 쓰지 않았다. 조개량은 마치 귀영대를 자신의 사병처럼 부리고 있다.
귀영대는 성 밖 마을 객잔에서 강소군을 기습하려다 대정무각의 육각주 염가와 그 휘하 살수들과 부딪쳐 이십여 명이 몰살당했다.
만일 귀영대 전원을 투입했다면 그런 지경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귀영대는 지원조답게 화총과 쇠뇌 등을 다루는 대원과 이들을 엄호하는 대원으로 나뉜다. 무력대가 아니기에 전면전에는 취약하고 편제가 완벽해야 제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개량은 일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투입을 한다. 용병술로만 보면 신기수사라는 별호가 무색하리만치 무모하다.
무력대 대원이 싸우다 죽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만한 값어치는 해야 하지 않은가?
‘무인의 목숨을 장기판의 졸로 여기는 건가.’
우참으로서는 당연한 불만이기도 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일조장은 사 개 조를 끌고 정하무관을 기습한 혈적 등을 지원하러 갔다.
우참의 뒤에는 삼 개 조 삼십 명의 귀영대원만 있을 뿐이다. 이 인원으로 저 앞에 벌어진 싸움판에 뛰어들라고 한다면 과연 따라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다행이 조개량은 후퇴를 지시했다.
“은밀하게 안경으로 철수한다. 정하무관으로 간 귀영대도 복귀시키고 흔적을 지우게. 우리는 애초에 여기 없었던 것이다.”
이 또한 우참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싸움터로 돌격하라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참이 전령을 보내고 대원들을 챙겨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조개량은 대정무각과 한왕의 사병들이 난전을 벌이는 곳을 잠시 지켜보다 사라졌다.
싸움은 끝으로 치달았다.
***
강소군은 성벽을 넘는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두터운 벽이 갈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으나 연화심과 관련이 있다는 것 또한 알았다.
따지고 보면 그가 연화심 일행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이 늘 그쪽에 닿아 있다.
연화심과 그 사이에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연화심이 보기 드문 미모를 가지고 있으나 이미 죽은 그의 영혼을 깨울 수는 없었다.
그의 영혼은 이미 죽었다.
무총에서 산 자를 죽였고 죽은 자를 다시 죽였다. 살았을 때 죽이고 죽은 다음에 또 죽여야 했다.
혈기에 미친 자들은 머리를 잘라야 했다. 강소군은 스스로 심장을 찌르고 죽은 마운룡의 머리도 다시 잘랐다. 한솥밥을 먹고 전장을 누비던 그 많은 형제들의 머리를 일일이 잘라냈다.
무려 천여 명이 넘었다. 한 사람이, 전쟁터도 아니고 한 공간에서 그 많은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을까.
그의 영혼은 피의 바다로 가라앉았고 육신은 혈기에 잠식됐다. 금단진공으로 간신히 육신의 혈기를 잠재웠으나 피의 바다에 가라앉은 영혼은 건질 수가 없었다.
질주하는 강소군의 뇌리에 한 쌍의 맑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언덕 버드나무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눈. 이제 연화심을 생각하면 그 눈이 떠오른다.
정하무관 쪽에서 연달아 기파가 격돌하는 소리가 들여왔다.
-쾅!
강소군은 있는 힘을 다해 신법을 펼쳤다. 그의 몸은 마치 한 줄기 비연처럼 하늘을 날았다.
정하무관 후원 쪽에서 대치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소군은 허공에 뜬 채 손에 든 붉은 창을 던졌다.
창은 정확히 두 진영의 한가운데 꽂혔다.
-쿵!
강소군이 떨어져 내리자 주위로 기파가 퍼져 나갔다.
강소군의 눈에 쓰러진 연화심이 들어왔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시간이 정지하고 주위의 소리도 끊겼다.
가녀린 연화심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살아 있다!’
연화심이 살아 있다는 걸 아는 순간 강소군의 내부에서 혈룡기가 폭발하였다.
강소군의 신형이 사라졌다.
“크아악!”
꽂혀 있던 창이 어느새 강소군의 손에 들렸고, 공노는 가슴이 사선으로 갈려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주인 잃은 쌍과가 허망하게 땅바닥을 굴렀다.
강소군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촤아악!
어둠이 찢어지고 강소군의 붉은 창에서 혈룡기가 횡으로 쏟아졌다.
“이런….”
백발 노인이 대나무 지팡이로 땅을 튀겨 삼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귀영대는 그럴 재주가 없었다.
“컥!”
“크악!”
횡으로 그은 일 초에 십여 명이 허리가 양단되어 쓰러졌다.
칼로 막으면 칼이 부러지고 검으로 막으면 검이 산산조각 났다.
강소군이 나타나고 숨 한 번 들이켤 짧은 순간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갑작스런 참극에 넋이 나간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강소군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연화심도 사라졌다.
“화심아!”
중랑이 소리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운룡이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연화심의 거처 앞에 버티고 섰다.
그제야 중랑은 강소군이 연화심을 데리고 거처로 들어갔음을 알았다.
***
노이칠 등이 전장을 정리하는데 성 쪽에서 달려오는 몇몇 인영이 있었다.
열서넛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다.
“너희가 웬일이냐?”
정하무관의 관주이자 대정무각 구각주 형운천이 물었다.
워낙 비상 상황이어서 하인들과 이제 막 입문한 어린 제자들만 남겨두고 나왔다.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남아 있던 하인들과 제자들이 당했습니다.”
“적이라고!”
형운천이 미간을 좁혔다. 정하무관은 합비 제일의 무관이다. 감히 누가 쳐들어온다는 말인가.
“먼저 나타난 이는 붉은 피리를 무기로 쓰는 중년인하고 쌍과를 쓰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다음 복면인들이 나타나 하인들과 제자들을 무참히 도륙하였습니다.”
어린 제자들이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천무방!”
노이칠이 끼어들었다.
“붉은 피리라면 혈적이오. 그놈은 천무십객 중 오객이요. 쌍과는 무창쌍과가 분명하오.”
노이칠은 그동안 천무방에 대해 여러 가지를 조사했기에 천무십객에 대해서도 약간 알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먼저 가겠소.”
형운천이 정하무관의 제자들과 함께 성으로 달려갔다.
“나도 가 봐야겠소. 아무래도 연 낭자 일행을 노린 것 같소.”
노이칠도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
한바탕 혈풍이 스쳐 간 정하무관 후원은 쥐죽은 듯 정적이 흘렀다.
백발 노인도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강소군이 나타나 순식간에 보여 준 무위는 그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삐이익!
밤하늘에 괴이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귀영대원들이 재빨리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사라졌다.
백발 노인 역시 장내를 둘러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운룡이 중얼거렸다.
“비정한 놈들. 개처럼 부리고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는군.”
혈적과 공노의 시신은 여전히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조운룡도 사라졌다. 대정무각 산하 정하무관에 도룡회 삼공자가 있는 건 아무래도 어색한 일이다.
조운룡이 사라지자마자 노이칠과 형운천 등이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