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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천무방 귀영대다!”
귀영대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외쳤으나 조운룡은 칼로 대답했다.
“그래서?”
붉은빛이 번뜩이자 앞을 막고 있던 두 명이 그대로 쓸려나갔다.
“왜 남의 이름을 묻는 건데?”
조운룡은 누구냐는 물음에 엉겁결에 지나가던 사람이라고 대답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지론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룡도 조운룡이라는 이름을 떨치는 것이다.
복면을 하고 온 것도 찜찜한데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답을 못 한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귀영대 조장이 조운룡의 칼솜씨가 대단한 걸 보고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고수다! 조심하라.”
“그걸 이제 알았냐?”
조운룡이 귀영대 조장을 향해 미친 듯이 화룡도를 휘두르며 나아갔다.
그러나 귀영대도 만만치 않았다. 담장을 포위하던 귀영대까지 이쪽으로 몰려와 난전이 벌어졌다.
위응환은 혁낭에서 금사(金砂)를 한 움큼 집어 뿌렸다.
-파악!
쇠처럼 단단한 모래가 날아오자 귀영대원들이 풀쩍,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위응환이 돌파하려 했으나 화살이 날아왔다.
-챙!
중랑이 검을 내질러 화살을 쳐냈다. 위응환은 그 기회를 이용해 다시 비도를 잡아 던졌다.
“큭!”
한 놈이 쓰러졌으나 나머지들은 검과 칼을 휘둘러 비도를 쳐냈다.
천무방 귀영대는 확실히 만만치 않았다.
***
-따다당!
창이 좌우로 흔들리며 붉은 피리와 연달아 격돌하였다.
심마백은 손아귀가 찢길 것 같은 충격에 하마터면 창을 놓칠 뻔했다. 그러나 지금 창을 놓으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창을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선공의 이점을 살려 숨 돌릴 새 없이 찌르고 베고 후려쳤으나 상대는 한 척 길이의 붉은 피리로 잘도 막아낸다.
마치 바위를 치는 것 같았다. 붉은 피리에 실린 경력은 무척이나 강했고 부딪칠 때마다 심마백의 몸으로 음한지기(陰寒之氣)가 흘러들어왔다.
사실 강호에서 일 갑자 내공을 지닌 내가고수를 만나기란 참으로 드물다. 전장에서 주로 싸워 온 심마백으로서는 처음 만나는 내가고수다.
시간이 흐르며 선공과 병장기의 이점은 사라졌다. 숨을 돌린 혈적은 창대를 후려쳐 부러뜨리려 들었다.
혈적은 연화심이 죽게 되자 이 자리에 흥미를 잃었다. 귀영대가 보고 있으니 체면상 바로 몸을 빼기가 난처해서 적당히 심마백에 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심마백의 창은 만만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동료들이 마창이라 불렀을까.
한 자루 창에 담긴 기세는 날카롭고 움직임은 변화무쌍하였다. 혈적으로서도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혈적은 심마백의 창을 쳐내면서 틈틈이 공노와 장무강 쪽을 살폈다.
‘흥! 무창쌍과, 평소에는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저 미련한 놈 하나 해치우지 못하고 뭐하는 것이냐?’
혈적은 장무강과 어우러져 난투극을 벌이는 공노를 비웃었다. 장무강의 덩치가 크니 미련하게 보였던 것이다.
무창쌍과 공노가 두 자루의 과로 이름을 떨친 지가 벌써 수십 년이다.
산동삼호가 몇 년 전 이름을 알리기는 했으나 명성이나 경험으로 보아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공노는 장무강의 폭풍 같은 식도의 공세를 막기 바빴다.
장무강은 원래 팔십 근에 이르는 대도를 썼으나 지난날 금의위에게 쫓기다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만한 대도를 다시 만들기 쉽지 않아 두 자루 식도를 쓰는 법을 익혔다.
공교롭게도 무창쌍과의 기병(奇兵)을 상대하는 데는 식도가 제격이었다.
게다가 공노는 한 자루를 회수하지 못하고 있어 자신의 쌍과술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공노는 고수인 데다 노련한 자였다. 연신 장무강의 식도를 막아내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혈적이 심마백을 상대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음을 알았다.
화가 난 공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색귀야! 어서 그놈을 해치우고 저 호위 놈을 죽여야 할 게 아니냐!”
“이놈의 창술이 대단하다고. 당신이야말로 뭘 하는 거야? 백정 같은 놈 하나 처치 못하고.”
혈적이 대꾸하였다.
사실 혈적은 이 자리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웬 복면인이 나타나 칼을 휘두르는데 붉은빛이 번뜩일 때마다 귀영대가 퍽퍽, 나가떨어지고 있다.
‘저놈이 강소군이라는 놈일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 보여 주는 무위가 다가 아닐 것이다.
저놈과 맞붙는다면 쉽게 정하무관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고 시간을 끌다 대정무각 무인들이 돌아오면 그야말로 곤란하게 될 게 뻔했다.
‘조개량에게 둘러댈 구실은 필요한데. 어쩐다?’
기련마검 손조 등은 비록 한 팔이 끊겼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걸 혈적은 알고 있다. 그런데 조개량은 그들 일행이 죽었다고 전했다.
혈적은 조개량이 그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천무십객은 강호에서 명성이 대단하지만 실은 천무방의 개나 마찬가지였다.
사냥개가 제구실을 못하면 삶겨져 한 그릇의 탕이 되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할 리는 없지만 조개량에게 몇 마디 둘러댈 말은 필요했다.
‘그런데 이놈의 창술은 정말 대단하군. 죽여 버릴까?’
혈적은 생각이 너무 많았다.
적당히 하다 몸을 빼고 싶은데 심마백의 창술이 워낙 끈질겨 기회를 잡기 어렵다.
심마백은 창을 사납게 휘두르다 혈적이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땅!
붉은 피리와 창대가 부딪치는 순간 심마백이 비틀거렸다.
혈적의 피리에 담긴 경력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다 보법이 꼬인 듯 보였다.
혈적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하수는 어쩔 수 없군. 내공이 부족한 게지.’
혈적은 상대를 처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라 여기고 화영보를 펼쳐 심마백의 코앞으로 다가가 붉은 피리를 내리쳤다.
-퍽!
-빠각!
심마백이 어깨로 피리를 받아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푹!
하지만 그 잠깐 사이 혈적의 복부에 반 자 길이의 칼이 박혔다.
“…!”
혈적은 아랫배에 화끈한 통증이 일자 본능적으로 내력으로 감쌌다.
심마백은 피리의 경력에 눌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면서도 혈적의 배에 꽂은 칼을 비틀어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푹! 푹!
연달아 두 번 칼이 혈적의 배를 쑤셨다.
혈적이 비틀거리며 한 발 물러났다.
“이… 이런 비겁한….”
“뭐라는 거야?”
혈적이 신음처럼 내뱉은 말에 심마백이 이를 악물며 비웃는데 입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혈적의 피리에 실린 경력은 심마백의 내장을 뒤흔들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것이 심마백의 지론이었으나 상대가 너무 강했다.
‘사소취대? 형! 그러다 임자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는 거야.’
위응환의 말이 떠올랐다.
심마백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혈적 또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내력으로 장부를 보호하려 했으나 심마백이 찌른 세 번의 칼질에 간이 조각났다.
잘린 간을 붙일 재주는 없었다.
“크흡.”
혈적이 피를 토했다.
“이, 이런….”
혈적이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연신 솟구치는 핏물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혈적은 죽어 가면서도 자신이 이렇듯 어이없이 죽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정하무관을 찾을 때만 해도 빈집에 들어 아름다운 여인을 취할 생각에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여인의 호위는 물론이고 옆에 있다는 산동삼호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자신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혈적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쳐들었다. 마치 하늘을 원망하듯 바라보는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빛을 잃어 가는 혈적의 눈동자에 달이 무심하게 지나갔다.
***
‘한심한 놈. 잔머리만 굴릴 줄 알았지. 결국 비참하게 죽는군. 내 그럴 줄 알았다.’
공노가 속으로 혈적을 욕했다. 혈적이 자신의 내공을 믿고 주제넘게 구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 몰랐다.
싸움의 결과는 무공의 고하로 결정지어지는 게 아니다. 경험이나 심리적인 변수 등이 작용한다.
이런 갖가지 변수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고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혈적은 고수이되 고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장한은 가볍게 볼 자가 아니었다. 지닌바 무공도 탄탄하고 공격 또한 빈틈이 없다.
꽉 찬 느낌?
지치지도 않고 연신 두 자루의 식도를 내리치는데 기가 질릴 정도였다.
무창쌍과라는 별호를 얻고 이렇게 몰리기는 처음이다.
공노는 연화심의 복부에서 뽑은 과를 주우려 했으나 장무강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공노가 아무래도 몸을 빼서 일단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코웃음 치는 소리와 함께 싸늘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흥! 한심한 놈들!”
나직한 한마디였으나 장내에서 난전을 벌이는 모두의 가슴을 진탕시키는 기음(氣音)이었다.
싸움이 잠시 멈췄다.
모두가 돌아보니 전각 지붕에 마의를 입은 백발 노인이 검은빛이 감도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노인의 행색은 볼품없었으나 전신에 흐르는 기운은 장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공노마저 백발 노인을 두려워하는지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저 색마 놈은 왜 저러고 있는 것이냐? 설마 죽은 것은 아니겠지?”
백발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동귀어진했소.”
공노가 턱짓으로 엎어진 심마백을 가리켰다.
“마백아!”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장무강이 달려갔다. 장무강은 공노를 몰아붙이는 데 전력을 다하느라 주위를 돌아볼 틈이 없었기에 심마백이 쓰러진 것도 몰랐다.
“형님!”
위응환 역시 심마백이 쓰러진 걸 보고 달려왔다. 중랑이 비틀대는 걸음으로 뒤를 호위하며 따라왔다.
장무강이 엎어진 마백을 뒤집었다.
“푸후!”
심마백이 핏물과 함께 막힌 숨을 내뱉었다.
‘살아 있다.’
그러나 산 것이 아니었다. 내상이 깊은지 숨이 미약했다.
“이 자식! 죽지 마라! 죽으면 목을 비틀어 버릴 것이다.”
장무강이 심마백을 앉혔다. 내공을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위응환과 함께 다가온 조운룡이 뭔가를 내밀었다.
“이걸 복용하게 하시죠.”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환약이었다.
“고맙소.”
복면을 하고 있지만 그의 정체가 조운룡임을 알고 있는 장무강은 주저하지 않고 환약을 받았다.
장무강이 심마백의 입을 열어 환약을 먹이려는 데 심마백이 손을 들어 막았다.
“연 낭자에게… 나는 괜찮아….”
장무강이 위응환의 등 뒤에 묶여 있는 연화심을 보았다.
심마백은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의제이고 연화심은 목숨값 대신 지켜 주기로 약조한 사람이다.
장무강이 갈등을 하는데 조운룡이 말했다.
“환약을 건넨 사람은 접니다. 제 뜻이 중요하지요.”
심마백에게 먹이라는 뜻이다. 조운룡은 산동삼호에게 빚이 있을 뿐 연화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내게 준 것이니… 내 뜻대로 하게 해 주게.”
심마백은 눈도 뜨지 못하면서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건 내상약입니다. 저 낭자는 외상이니 약효를 보기 어렵습니다.”
조운룡이 다시 말하자 장무강이 주저 없이 심마백에게 먹였다.
“연 낭자는 이 형이 반드시 살릴 것이야. 그러니 어서 운기요상을 하라고.”
“누가 누구를 살린다고? 너희는 여기서 다 죽는다.”
백발 노인의 음산한 목소리가 뱀의 혓바닥처럼 모두의 전신을 훑었다.
백발 노인이 소리도 없이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곧 죽어도 할 말이 없을 늙은이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조운룡이 화룡도를 늘어뜨리고 모두의 앞을 막았다.
귀영대원들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 백발 노인과 공노의 뒤에 섰다.
“크흐흐. 네놈이 화룡도로군. 어린놈이 제법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싸가지가 없군. 너부터 죽이고 네 사부를 찾아가 죄를 물어야겠다.”
“감히 사부님을 들먹이다니!”
조운룡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화룡도를 내리쳤다.
강자를 만나면 더 힘이 솟는 조운룡이다. 화룡도에 전신진력을 담아 내리쳤다.
백발 노인의 기세가 만만치 않으니 선공으로 우세를 점하려는 심산이었다.
백발 노인이 대나무 지팡이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