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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랑은 자신이 중상을 입은 것도 잊고 연화심을 향해 달려가려다 비틀거렸다.
내력이 다해 눈앞이 캄캄해졌다. 중랑은 사력을 다해 발을 옮겼다.
“공노! 무슨 짓이오!”
혈적이 버럭 성을 냈다.
혈적의 목적은 중랑을 죽이는 것이었다.
연화심은 일단 밀쳐 두었다가 천천히 제압하려 했는데 공노가 직접 손을 쓸 줄 몰랐다.
공노는 혈적이 연화심에게 집적거리는 게 못마땅하여 아예 죽여 미련을 끊을 생각이었다.
복부를 찌른 과를 비틀어 내장을 파괴하려는데 예리한 파공음이 들렸다.
-쉬쉭!
달빛 아래 싸늘한 광망을 뿌리며 비도가 날아들었다.
“헉!”
공노가 과를 놓고 뒤로 풀쩍 물러났다.
연화심은 과를 잡은 채 모로 쓰러졌다. 중랑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연화심을 부둥켜안았다.
“화심아!”
비도는 연달아 날아왔다. 공노가 하나 남은 과를 휘저어 비도를 쳐냈다.
“어떤 놈이냐?”
공노가 비도가 날아온 쪽을 경계하는데 세 줄기 인영이 날아왔다.
산동삼호였다.
“응환! 연 낭자 상세를 돌봐라.”
장무강은 곧바로 공노를 향해 달려들며 두 자루 식도를 휘둘렀다.
공노가 한 자루 남은 쌍과로 식도를 막아내고 다시 일 장이나 뒤로 물러났다.
“혈적! 뭐 하나 빨리 숨통을 끊지 않고.”
혈적이 급변한 상황에 연화심에게 달려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쥐새끼 같은 놈들, 빈집을 털다니!”
고함과 함께 날카로운 창기(槍氣)가 쏘아져 왔다. 심마백은 있는 힘을 다해 일격을 찌르며 날아왔다.
-쉬이익!
혈적은 창에 실린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내력을 끌어올려 붉은 피리를 휘둘렀다.
-따당!
창과 붉은 피리가 부딪쳤다.
심마백은 길지도 않은 붉은 피리에 단단한 경력이 담겨 있음을 알고 맞부딪치기를 피하고 창을 위아래로 훑었다.
창끝에서 날카로운 기파가 쏟아져 나왔다.
‘제기랄.’
혈적은 강호에서 보기 드문 창의 고수를 만나자 긴장하였다.
실력이 대등하다면 병장기는 긴 쪽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창과 붉은 피리는 길이로만 보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혈적이 육십 년 내공을 지닌 고수라면 심마백 또한 숱한 싸움을 치른 창의 달인이다.
강호에서의 명성으로 봐서 혈적이 우위이기는 하지만 병장기의 이점을 살린 심마백 또한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어울려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네놈들이 산동삼호냐?”
공노가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공노는 눈앞의 장한이 쉽지 않은 상대라는 걸 대번 깨달았다.
‘하필이면.’
과가 한 자루뿐이다. 나머지 한 자루는 연화심의 복부에 박혀 있다.
장무강은 잠시 방심하여 연화심의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자책과 분노가 극에 달했다.
공노의 물음에 두 자루의 식도로 답했다.
“멧돼지 같은 놈!”
공노가 욕을 하고는 과를 휘둘러 날아드는 장무강의 식도를 막았다.
육십을 바라보는 공노는 두 자루 쌍과를 다루는 솜씨나 내공이 강호를 주름잡을 만하였으나 장무강 또한 산전수전 다 겪은 고수다. 한 자루 과가 부족하니 초반 기세에서 밀렸다.
그사이 위응환은 쓰러진 연화심에 달려가 상세를 살펴보았다.
전장에서 무수한 상처를 본 위응환이다. 보자마자 연화심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을 알았다.
“비켜 보게. 과부터 뽑아야 겠네.”
위응환이 중랑을 떼어내고 연화심의 복부에 꽂힌 과를 뽑았다. 핏물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천만다행이다!’
공노의 과는 간을 비껴 나가 즉사는 면했다. 마침 한겨울이라 연화심이 두툼한 가죽옷을 입은 것도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옆구리가 반이나 갈라졌다. 장부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큰 상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위응환은 전장에서 동료들의 상처를 수없이 돌본 경험이 있다. 익숙한 솜씨로 벌어진 상처에 금창약을 뿌렸다. 정신을 차린 중랑이 자신의 겉옷을 찢어 건넸다. 위응환이 이를 받아 연화심의 복부를 둘둘 말아 감쌌다.
“어서 빠져나가세.”
위응환이 연화심을 둘러업고 문 쪽으로 달려갔다. 중랑이 비틀거리며 뒤를 받치며 따라갔다.
‘아!’
앞서가던 위응환의 눈에 절망의 빛이 스쳤다.
언제 왔는지 담벼락에 선 검은 인영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대충 봐도 수십 명이다.
‘연 낭자의 운은 여기까지인가.’
위응환은 자신의 안위보다 등에 업힌 연화심의 운명이 불쌍했다.
***
노이칠과 염가는 상관청유의 불화살을 보고 서둘러 달려가 조우하였다.
“우회하는 게 낫지 않을까?”
노이칠이 앞의 매복을 보며 상관청유와 염가의 의견을 타진하였다.
상관청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라고 매복이 없겠나. 이미 위급신호를 올렸으니 아홉째가 이리로 올 걸세. 앞뒤에서 공격하는 틈을 타서 육각주가 모시고 가게.”
정하무관의 관주는 대정무각 구각주(九閣主) 형운천이다. 정하무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유사시에 지원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세 사람 중에 가장 무공이 강한 육각주 염가가 주첨기를 호위하기로 하고 정하무관의 조응을 기다렸다.
“이제 나오는군.”
멀리 합비성 문이 열리고 횃불이 줄지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비해라.”
상관청유가 염가에게 주첨기의 호위를 맡기고 전열을 정비하는데 뒤쪽에서 고함이 들렸다.
“누구냐?”
“적이다!”
노이칠 등이 놀라 뒤를 봤다.
“내가 후미를 맡겠소. 청유 형이 선봉을 맡아 주시오.”
노이칠이 뒤로 달려갔다.
달빛 차가운 관도를 한 사람이 달려오는데 그 기세가 분노한 용이 폭풍우를 헤치며 나아가는 듯했다.
‘응? 저자는?’
창을 한쪽으로 비껴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낯익었다.
“가만! 대기하라! 적이 아니다!”
노이칠이 황급히 소리치고 앞으로 갔다.
단기필마가 가까이 다가왔다. 달빛 드리운 관도에 나타난 이는 강소군이었다.
“강 협!”
노이칠이 부르자 강소군은 대답 없이 달려왔다. 밤길에 저렇듯 말을 급히 모는 건 무척 위험한 일임에도 강소군은 마치 대낮처럼 달렸다.
“여기는 어쩐 일이오?”
노이칠은 강소군이 연화심을 찾을 것이란 자신의 예측이 맞아 반갑기는 했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만날 줄은 몰랐다.
강소군이 노이칠을 알아보고 말고삐를 당겨 멈춰 서더니 물었다.
“연 낭자 일행은?”
노이칠이 합비성 쪽을 보며 말했다.
“안심하시오. 정하무관에 잘 있소.”
강소군은 다시 말고삐를 채어 달려나갔다. 노이칠이 황급히 따라가며 소리쳤다.
“길을 터라!”
노이칠의 명령에 대정무각 무인들이 관도 양옆으로 비켜섰다.
강소군이 달려오는 걸 본 상관청유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태자의 안위를 결국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군.’
상관청유도 강소군의 무위를 들어 알고 있다. 충분히 선봉에 세울 만했다.
그런데.
-두두두두.
강소군은 대정무각의 진영을 그대로 지나쳐 달려갔다.
상관청유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 하나? 선봉이 나섰는데? 가자!”
상관청유의 말에 대정무각의 무사들이 앞으로 돌진하였다. 염가와 노이칠이 주첨기를 호위하며 뒤를 따랐다.
-쉬이익!
화살이 날아왔다.
강소군의 창이 호선을 그리며 앞으로 향했다.
-챙! 채챙!
화살은 강소군이 일으킨 기파에 휩싸여 튕겨 나갔다.
-두두두두.
강소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매복한 적들이 다시 화살을 재는 그 짧은 사이 코앞으로 다가갔다.
“잡아라!”
지시가 떨어지고 양옆에서 복면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히히힝!
강소군은 대담하게도 말을 허공으로 띄웠다. 질주하던 말이 복면 무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데 강소군의 창이 번뜩였다.
달빛을 받은 창날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마치 허공에서 푸른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푸른 꽃은 죽음을 부르는 마화였다. 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자리에서 어김없이 비명이 터지고 피가 솟구쳤다.
“으악!”
“커윽!”
복면 무인들의 진영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강소군은 말이 착지하자마자 그대로 달려나 갔다.
“뭐냐? 저놈은?”
매복을 지휘하던 수장이 넋이 나가 강소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아악!”
“적이다!”
순식간에 대정무각이 들이닥쳤다. 위치가 드러난 이상 더 이상 매복이 아니었다.
“와아아!”
합비성 쪽에서 달려오던 정하무관의 무인들도 달려왔다.
정하무관의 관주 형운천은 달려오는 강소군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복을 돌파하는 걸 보고 아군이라 여겼는데 그냥 질주해 온다.
하지만 지금은 저 앞에서 벌어진 격전이 더욱 중요했다. 강소군을 무시하고 앞으로 돌진하였다.
“앞의 적부터 쳐라!”
강소군은 그들 사이를 그대로 통과하였다.
합비성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성문 문루에 관인과 경비병들이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림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지만 어찌 될지 모르니 몰려나와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강소군은 성문에 다다르자 몸을 날렸다. 단숨에 삼 장을 날아오르더니 성벽을 차고 올랐다.
-팍, 파팍!
성벽을 두어 번 차고 오른 강소군이 사라졌다.
관병들이 미처 칼을 뽑을 새도 없이 강소군은 성안으로 사라졌다.
***
위응환이 사방을 훑어보았으나 이미 퇴로가 모두 막혔다. 담장 위에 선 이들은 마치 유령 같아 기척도 없다.
그들은 싸움에 직접 개입할 생각은 없는지 담장에 선 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위응환이 연화심을 내려놓고는 자신의 윗옷을 벗더니 연화심을 업고 옷으로 단단히 매었다.
양손을 쓸 수 있게 된 위응환이 왼손에 암기가 담긴 혁낭을 들었다. 쇠뇌를 거처에 두고 온 것이 아쉬웠다. 위응환이 뒤를 경계하며 따라오는 중랑에게 말했다.
“놓치지 말고 전력을 다해 따라오게.”
“나는 상관 말고 기회를 봐서 화심과 함께 탈출하십시오. 뒤는 내가 맡겠습니다.”
위응환은 중상을 입고 비틀거리면서도 연화심의 안위부터 챙기는 중랑을 잠시 안타깝게 보더니 몸을 돌렸다.
혁낭에서 비도를 뽑아 든 위응환이 천천히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에 따라 담장 위에 있던 귀영대도 서서히 움직였다.
-쉬쉭!
위응환의 손에서 두 자루의 비도가 날았다.
“크윽!”
-챙!
한 놈이 떨어지고 다른 한 놈은 용케도 비도를 쳐냈다.
비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위응환의 손에는 어느새 한 움큼의 쇠질려가 들려 있었고 곧바로 문 앞을 막는 적들을 향해 날렸다.
“암기 고수다. 조심해라!”
누군가 소리치며 위응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응환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커윽!”
달려들던 이의 가슴팍에 수리검이 박혔다.
-쉬익!
어둠을 가르는 소리에 위응환이 몸을 돌렸다. 보지 않아도 쇠뇌에서 날아온 단시(短矢)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단시를 피하자마자 위응환의 손이 혁낭을 스쳤다.
“큭!”
이번에는 세 명이 쓰러졌다.
“안 되겠다. 우리가 직접 해치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적들은 혈적과 공노가 모두를 해치우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런데 위응환에 의해 연달아 희생자가 발생하니 더 이상 포위만 할 수는 없었다.
담장 위의 적들이 몸을 날려 위응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쉭!
“이건 혈각이라고 하지. 조심해야 할 거야. 제대로 맞으면 뼈가 부러질 테니!”
위응환의 손에서 십여 개의 네모난 혈각이 날았다.
그의 말대로 혈각에는 상당한 경력이 담겨 있었고 맞은 자들은 꼼짝하지 못했다.
“물러나 산개하라!”
누군가의 명에 귀영대원들이 일장을 물러나 포위하였다.
위응환은 혁낭에서 한 움큼의 침을 꺼냈다.
“이건 말야. 당가도 울고 갈 쇄혼침이라는 거야. 당가의 침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보증하지.”
위응환이 자신을 포위한 귀영대원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귀영대는 위응환의 신묘한 암기술에 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포위만 하였다.
대치 상황이 길어지자 위응환은 초조하였다.
그때.
“커흑!”
붉은빛이 번뜩이며 문을 지키고 있던 서너 명이 순식간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문을 넘어 달빛 아래 몸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커다란 도가 들려 있었다.
‘조운룡?’
새로이 나타난 이는 조운룡이었다. 그런데 얼굴에 복면을 하고 있다.
***
산동삼호와 헤어져 돌아가던 조윤룡 역시 기와 기가 충돌하는 폭음을 들었다. 그리고 그곳이 산동삼호가 가던 정하무관이라는 걸 알았다.
정하무관은 대정무각 산하 무관이다. 그가 속한 도룡회와는 서로 대치하는 사이다. 평소라면 절대 정하무관 가까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산동삼호가 가자마자 싸우는 소리가 들렸으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조운룡은 숨어서 정하무관 후원에서 벌어진 상황을 주시하다 위응환이 곤란해지자 복면을 쓰고 나타났다.
“누구냐?”
귀영대의 조장으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조운룡이 화룡도를 뒤로 감추며 말했다.
“나? 지나가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