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49화 (4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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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중랑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혈적의 붉은 피리에 담긴 기운은 강했다. 중랑이 생각하기에 삼도문주 연성결 보다 내공이 강할 듯 싶었다.

‘일파의 문주를 할 수 있는 자가 천무방의 일개 하수인이라니.’

중랑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붉은 피리가 다시 호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혼을 흔드는 소리에 심신이 위축될 정도였다.

중랑이 상체를 수그리며 검을 비껴 쳐올렸다. 천성육십사식 가운데 구명절초의 하나인 일성도천(一星渡天)이었다.

“제법이구나.”

혈적은 호쾌하게 칭찬을 하였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십 년 전 이미 명성을 떨친 혈적이다. 천무십객 서열 오 위에 머물러 있지만 스스로는 십대고수와 견줄 수 있다고 자부했다.

채음보양으로 기른 그의 내공 수위가 무려 일 갑자에 이른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같은 천무십객에게도 숨겨 왔다.

일 갑자는 육십 년이다.

한 사람이 육십 년을 고련하여 얻을 수 있는 내공을 혈적은 사십 대 중반에 이뤘다. 계속 채음보양으로 내공을 쌓아 간다면 육십이 되었을 때 이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그때는 십대고수의 반열에 확실히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 갑자의 내공을 일개 호위가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놈의 검법이 심오하구나.’

혈적은 중랑의 검법에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어하는 태극의 원리가 담겨 있음을 눈치챘다.

면면이 이어지는 검의 흐름을 끊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혈적이 한 걸음 물러나 물었다.

“무당의 제자냐?”

중랑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중랑이 빙그르르 돌아 연화심을 향해 날아오는 쌍과(雙戈)를 쳐냈다.

무창쌍과 공노가 헛웃음을 흘렸다. 방금 일수(一手)로 연화심을 옭아맬 수 있었는데 중간에 중랑의 검이 끼어들며 망쳐 버렸다.

공노가 쌍과를 거두며 혈적을 향해 말했다.

“네가 여유가 있는 모양이구나. 남의 집에 월담하여 여자를 훔쳐가는 와중에 사문을 따지다니.”

“공노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작금의 사태를 좋게 해결하기 위해 연 낭자에게 조용히 이야기를 해보자고 청하는 것이오. 피를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혈적은 신중한 자였다. 과거 당문의 여식을 범했다가 죽을 뻔했다.

무당파는 소림과 함께 무림의 조종으로 꼽힌다. 검으로는 소림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고 있다.

무당의 제자를 죽인다면 천무방이 아니라 새외로 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혈적은 중랑의 검이 무당의 절기라고 여겼다.

중랑은 눈치가 빨랐다. 그는 대번에 혈적이 오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굳이 오해를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중랑은 말없이 연화심의 앞을 막았다. 자신이 공노를 상대하려는 것이다.

가만 보니 혈적은 연화심을 노리는 음적이다. 그러니 목숨을 취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공노는 달랐다.

방금 펼친 쌍과가 제대로 들어갔다면 연화심은 성치 않았을 것이다.

연화심의 검법이 고된 수련으로 일취월장하고 있으나 천무십객의 사객 무창쌍과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중랑조차 몇 수를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중랑은 오늘 밤이 흉할 것임을 직감하였다. 다만, 대정무각의 지부라는 정하무관에서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너부터 죽여 주지.”

공노가 중랑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내뱉었다.

공노는 정하무관이 비었고 혈적이 연화심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듣고는 연화심과 중랑을 죽일 생각으로 뒤쫓아 왔다.

혈적과 달리 공노는 냉철한 자였다. 맡은 일은 깔끔하게 해결하고 그에 걸맞게 요구해 왔다.

공노가 받은 살인명부첩에는 연화심과 중랑, 강소군이 있다.

조개량은 연화심과 강소군은 되도록 생포를 하라고 했지만 공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되도록이라는 말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죽여도 된다는 뜻이지.’

공노는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중랑이 공노를 맡자 연화심은 혈적을 상대해야 했다.

중랑이 검을 세우자 공노가 비웃었다.

“어린놈이 제법이긴 하군. 하지만 검법의 묘함만으로는 나의 쌍과를 감당하기 어렵지.”

공노가 양손에 든 과를 좌우로 흔들었다.

-쉬이익!

쌍과에서 일어난 기파가 중랑의 허리를 절단할 듯 밀려들었다.

중랑의 내력은 아직 일천하다. 삼도문에 들어온 뒤 연성결로부터 제대로 된 심법을 전수받고 틈만 나면 수련을 하였으나 명가에서 자란 또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수십 년 공력이 담긴 공노의 쌍과다. 정면으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중랑이 검으로 원을 그리며 기파를 흘려보냈다.

공노의 눈빛에도 이채가 흘렀다.

‘혈적이 사문을 물어볼 만하군.’

그도 중랑의 검법이 묘함을 넘어 절학이라 부를 만하다는 걸 눈치챘다.

중랑은 천성육십사식의 오의를 접하고 검의 극의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면서 천성육십사식이 평범하면서도 그 안에 현묘한 기의 원리를 담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몰랐을 때는 그저 내려치고 베고 찌르는 초식이었는데 지금은 몸의 내기와 바깥의 외기 사이를 가르는 동작이 마치 중천을 유영하는 한 마리 신룡과 같은 느낌이었다.

공노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다. 대정무각이 강적을 맞아 성 밖으로 나갔지만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저놈의 내공은 별게 아니다. 단박에 깨야겠구나.’

중랑이 검법의 묘함에 의지하고 있으나 자신의 몇십 년 공력으로 밀어붙여 깨뜨리면 별수 없을 것이다. 공노가 결심을 하고 공력을 끌어올렸다.

“이것도 받아 봐라.”

공노가 돌연 쌍과를 거두어들였다가 벼락같이 내밀었다. 전신 내력을 다 퍼부은 쌍룡출해(雙龍出海)였다.

쌍과에서 막강한 기파가 몰려오자 중랑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며 기파를 가르려 하였다.

‘크흐흐.’

공노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의 쌍과에서 한 자가량 유형화된 기운이 뻗어 나왔다.

‘강기?’

중랑은 적이 이리 빨리 결정적인 수를 쓸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검세로 기파를 흘려보내려 했는데 강기를 앞세워 밀고 오니 방법이 없었다.

중랑이 자신의 있는 내력을 다해 강기를 쳐냈다.

-쾅!

폭음이 터지고 반탄력으로 중랑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강기의 여파로 내장이 진동하고 피가 역류하였다.

“크윽.”

중랑은 기어이 한 무더기 핏덩이를 토했다.

중랑은 이런 고수와의 싸움은 처음이다. 공력의 차이를 절감하였다.

“연 낭자도 제법이군. 젊은이들의 무공이 이렇듯 뛰어나니 무림의 장래가 밝을 것 같네.”

혈적이 연화심을 칭찬하였다. 숱한 여심을 홀린 그는 말을 잘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벌써 수차례 손을 섞었는데 연화심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상처 없이 제압하고자 하는 속셈에 살수를 자제하고 있긴 하지만 연화심의 검법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연화심의 검법은 변화무쌍하였는데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여 묘하게도 자신의 붉은 피리가 내는 귀혼소를 흐트러뜨렸다.

혈적은 연화심을 검법이 중랑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이년도 무당인가? 무당에 이렇듯 변화무쌍한 검법이 있었나?’

혈적의 눈에 음침한 빛이 돌았다. 명가의 제자라면 내공도 정순하고 행실도 단정할 것이니 연화심을 취하면 공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게다가 연화심의 미모 또한 뛰어나니 몸이 달았다. 중랑을 죽여 무당의 원한을 사는 건 꺼림칙했으나 여인을 취해 쫓기는 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혈적이다.

“이러지 말고 함께 가는 게 어떻겠나. 천무방도 내 말을 경시하지는 못하네. 그간의 은원도 한 차례 핏값으로 해소되었으니 이제 말로 해결할 차례가 아닌가.”

혈적이 연화심을 설득하려 들었다.

연화심은 혈적에게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보기에는 기품있는 문사였지만 왠지 뱀 같은 느낌이 들어 소름이 끼쳤다.

게다가 핏값 운운하니 아버지 연성결의 죽음이 떠올랐다. 연화심의 눈에 원독이 차오르고 더더욱 전력을 다해 천성육십사식을 펼쳤다.

혈적은 마치 희롱하듯 붉은 피리를 저어 연화심의 요혈을 노렸다. 피리에 담긴 공력이 음험하고 강하여 연화심은 곧 기력이 달렸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자리를 지켜야 돼. 내가 물러나면 오라버니가 위험해진다.’

연화심은 중랑이 자신을 대신하여 강적을 맡은 걸 알고 있다. 공노의 쌍과가 짓쳐들어왔을 때 크게 당할 것이라 직감했는데 중랑의 검이 간신히 막아 주었다.

연화심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신의 팔다리를 내주는 한이 있어도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돌연 등뒤에서 요란한 폭음이 터지고 중랑이 밀려와 피를 토하자 크게 놀랐다.

연화심은 혈적을 향해 마구 검초를 뿌리고는 중랑의 옆으로 재빨리 다가와 부축하였다.

“오라버니!”

“…!”

입안 가득 피를 머금은 중랑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침 공노가 전력을 다한 일수(一手)를 뒷수습한다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어 잠깐의 여유를 벌 수 있었다.

“퉤!”

중랑이 솟구치는 피를 뱉어내고 말했다.

“가라. 장 대협 형제들이 저잣거리로 갔으니 그리로 가서 적이 왔음을 알려라.”

중랑은 연화심을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핏물이 흘러나왔다.

“오라버니, 상세가….”

“어서 가라니까.”

중랑은 주춤 물러나며 연화심을 밀쳤다.

중랑과 공노, 혈적이 품자형으로 선 상황이다.

‘일각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중랑이 공노와 혈적을 노려보며 검을 들었다. 내력이 이어지지 않아 검자루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연화심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제 호위를 받아야 하는 삼도문의 금지옥엽이 아니다. 한 자루 검 끝에 목숨을 거는 무림인의 길로 들어섰으니 실력이 부족하면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마땅했다.

“저만 갈 수는 없어요.”

“….”

중랑이 말을 하려 했으나 다시 핏물이 올라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공노가 암암리에 운기를 하며 혈적을 쏘아보고는 말했다.

“노부가 아예 밥을 떠먹여야 하나? 일을 망칠 생각인가?”

자신은 내공의 손실까지 감수하고 중랑을 제압했는데 여전히 전력을 다하지 않는 혈적을 지탄하였다.

혈적이 여색을 밝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대사를 두고 사적 욕심에 연연하는 게 영 못마땅했다.

강소군이라는 강적에게 오객에서 십객까지 당했다. 기련마검 손조는 제법 실력이 있는 자인데 옥면미랑, 홍나찰과 함께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놈이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공노는 여기서 자신의 밑천을 모두 쏟아부을 수가 없었다.

공노가 나서라고 대놓고 종용하니 혈적도 거부하기 어려웠다.

“하하. 그럴 리가요. 다만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지요. 그런데 저들이 완강히 거부하니 저도 어쩔 수 없군요.”

혈적이 붉은 피리로 자신의 손바닥을 탁탁, 내려치며 연화심을 노려보았다.

“연 낭자. 마지막 기회요. 호위의 상세가 심각하니 함께 갑시다. 치료를 해 주겠소.”

“미친놈!”

연화심의 입에서 기어이 욕이 나왔다. 연신 핏물을 게워내는 중랑의 모습에 분노하여 난생처음 욕을 내뱉은 것이다.

혈적이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여색을 탐하면서도 여인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은 못 참는 혈적이다.

“기어이 벌주를 마시겠다는 게로군.”

혈적의 신형이 기척도 없이 스르륵 밀리듯 연화심에게 향했다. 그가 자랑하는 화영보(花影步)는 소리도 없이 상대의 면전까지 다가가는 절기다.

-쉬쉬식!

소리도 없이 혈적이 눈앞에 나타나자 연화심이 놀라 검을 휘둘렀다.

-따다당!

검과 붉은 피리가 연달아 부딪치고 연화심이 혈적의 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났다. 혈적이 음산하게 웃었다.

“크흐흐. 제법이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이 어르신이 깨우쳐 주마!”

연화심이 주춤하는 사이 혈적이 암향보를 극성으로 펼쳐 멱살을 잡아채 휘감아 던졌다. 그리고 곧바로 중랑의 가슴을 노리고 붉은 피리를 찔렀다.

중랑이 검을 비틀어 붉은 피리를 비껴내려 했으나 그 안에 실린 경력을 감당 못하고 검이 밀렸다.

-파악!

붉은 피리의 경력에 스친 중랑의 가슴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때 연화심이 나가떨어진 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악!”

연화심이 나가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공노가 있는 쪽이었다.

공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를 내밀어 연화심을 찌른 것이다.

공노가 과를 비틀었다.

“큭!”

연화심의 입에서 다시 짧은 신음성이 터졌다. 연화심은 자신의 복부를 찌른 과를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화심아!”

“연 낭자!”

중랑과 혈적이 동시에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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