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48화 (48/250)

48

상관청유가 쏜 불화살이 또다시 피어올랐다. 좁은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불화살은 정하무관에서도 훤히 보였다.

“위급신호다. 모두 출동한다!”

정하무관 관주가 불화살을 보고 외쳤다.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강적이다. 수문 위사까지 모두 나가라!”

관주의 독려에 정하무관을 지키는 무사들까지 모두 달려나갔다.

정하무관 외곽 어둠 속에서 이를 지켜보던 중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정하무관을 지키는 이가 없다. 이때 천무방이 쳐들어온다면?’

대정무각의 산하 무관이라 감히 들어서지는 못하지만 천무방의 이목은 여전히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산동삼호가 외출한 것을 봤기에 중랑의 마음은 더욱 초조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중랑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중랑은 어둠을 타고 연화심의 거처로 향했다.

마당 정원 수풀 속에 잠복한 중랑은 기를 감춘 채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후원 가득한 달빛이 중랑에게는 더없이 싸늘하게 느껴졌다.

‘헛!’

언제 나타났는지 마당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서생 차림의 중년인이었는데 손에 붉은 피리를 들고 있었다.

“나오게.”

중년인은 중랑이 잠복한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중랑이 마당으로 나와 연화심이 있는 전각을 등지고 섰다.

“네가 연 낭자의 호위인가? 제법이라고 들었다.”

기품이 흐르는 중년인은 학관에서나 볼 법한 문사 그 자체였다.

“천무방에서 왔소?”

중년 문사가 담담하게 웃었다. 정하무관, 그러니까 대정무각 산하 무력의 후원에 단신으로 들어왔으면서도 무척이나 여유로운 모습이다.

“알았으면 됐다.”

“주인 없는 집에 이리 찾아온 것은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듯한데?”

중년 문사가 오른손에 든 피리로 왼손바닥을 탁탁 쳤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강소군이라는 놈이 워낙 신출귀몰하니 만나려면 연 낭자라도 잡아 두어야지.”

상대가 대놓고 나오자 중랑의 안색은 침중하게 굳었다.

“그를 만날 생각이라면 잘못 찾아오셨소. 우리도 행적을 모르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중년 문사가 다시 붉은 피리로 자신의 손바닥을 툭툭 쳤다.

중랑은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혈적(血笛)?”

중년 문사가 의외라는 듯 중랑을 쳐다보았다.

“너는 아무래도 단순한 호위가 아닌 듯싶구나.”

혈적은 천무십객 서열 오 위 오객이다.

천무십객이 존재한다는 건 알 만한 이는 다 안다. 하지만 일객에서 오객까지 정체를 아는 이는 드물다.

천무십객은 자리가 비면 다른 사람을 채우곤 했는데 일객에서 오객은 이제까지 바뀐 적이 없다. 애초에 누가 되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바뀌지도 않았다.

혈적은 이십 년 전 사천무림을 뒤흔든 자였다. 당문과 시비가 붙은 뒤 사라져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강호에서 붉은 피리를 쓰는 사람이 또 있겠소?”

“하기는 그렇지….”

혈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 낭자에게 나오라고 해라.”

“그건 이 검에게 물어봐야 할 것….”

중랑이 대답하는데 뒤에서 기척이 나며 문이 열렸다. 검을 든 연화심이 나왔다.

“화심아, 들어가 있거라.”

연화심이 고개를 저었다.

“저분이 고수라면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마찬가지겠죠.”

혈적이 미소를 지었다.

“나이에 비해 제법 영민하구나. 내가 찾아온 이유는 말했으니 답도 제대로 할 텐가?”

혈적이 점잖게 말하는데 오래도록 아는 사이처럼 굴었다.

“이상하군요.”

연화심은 혈적이 두렵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애초에 싸움은 천무방과 삼도문 간에 벌어진 일이었지요. 그 일은 삼도문의 후계자인 저를 잡아가면 끝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저를 미끼로 강 대협을 잡겠다니. 왠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군요.”

“똑똑한 연 낭자가 그 이유를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군.”

“구양운 때문인가요? 사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나예요. 더 따지고 들자면 그 스스로 자초한 것이기도 하고요. 책임을 물으려면 제게 물어야지요.”

혈적은 헛웃음을 흘렸다.

연화심의 말은 사실이나 힘이 지배하는 강호에서 통할 수 없는 너무나 순진한 논리였다.

“시시비비는 가서 따지기로 하지. 나를 따라오겠나? 여기는 남의 집이니 오래 있기가 그렇군.”

“야밤에 사람을 청하는 건 예가 아니죠.”

“좋은 말로 청하는데 그리 냉정하게 거절하면 곤란하지.”

혈적이 뒷짐을 지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붉은 피리가 혈적의 등 뒤로 가려지자 중랑은 긴장하고 검을 뽑았다.

중랑은 혈적의 명성은 들었지만 무슨 수법을 지녔는지는 알지 못했다. 음공을 펼친다는 소문은 못 들은 걸로 보아 암기술이 아닐까 짐작하였다.

혈적이 중랑의 기수식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탄탄한 검이로군. 하지만….”

혈적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진 듯하더니 중랑의 앞에 나타났다.

-호으으으.

귀곡성 같은 섬뜩한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번뜩였다.

“조심해요!”

연화심이 놀라 검을 뽑으며 달려왔다.

혈적의 선수가 놀랍기는 했으나 중랑도 대비하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나며 수비식을 펼쳤다.

-따다당!

-호으으으으.

중랑의 검과 붉은 피리가 연달아 부딪치며 쇳소리가 났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피리에서 나오는 기음이 중랑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신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으음.”

중랑이 검을 물리며 되도록 피리와 부딪치지 않으려 했다.

혈적은 그런 중랑의 움직임을 보며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네놈도 제법 똑똑하군. 그러나 피해도 소용없다.”

붉은 피리가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중랑의 가슴 요혈을 노리고 날아왔다.

-휘이이이이.

피리에서 울리는 음파가 달라졌다. 중랑은 전신요혈을 일제히 공격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큭.”

중랑은 사방팔방으로 검을 휘둘러 몸을 보호하며 다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연화심과 바로 닿았다.

“오라버니! 함께 상대해요.”

“아니다. 적이 저자 하나가 아닐 것이다. 뒤를 부탁한다.”

중랑이 연화심을 밀쳤다. 연화심은 현란한 사술을 상대하기에는 강호 경험이 너무나 적다.

그래서 후방 경계를 이유로 연화심을 물린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뒤에서 괴소가 터졌다.

“크흐흐. 눈치가 빠른 놈이군. 하지만 저 여린 낭자만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까?”

중랑의 안색이 굳었다.

혈적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또 다른 적이 있었다니. 더군다나 그 기척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고수라는 뜻이다.

소리는 지붕 위에서 났다. 올려다보니 전각 지붕 위에 허름한 괴의를 걸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짧은 바지 밑으로 드러난 맨발이 특이하였다.

옆구리에 낫과 비슷한 것을 차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두 자루의 짧은 과(戈)였다.

연화심이 뒤로 돌아 전각을 향해 검을 겨눴다.

중랑과 연화심은 서로 등지고 적과 대치하는 형국이었다.

노인이 혈적을 보고 혀를 찼다.

“어디 갔나 했더니 애들하고 노닥거리고 있었군.”

기련마검 손조 등이 낭패를 당하고 돌아간 뒤 조개량은 다시 천무십객을 투입하였다.

삼객 망혼도와 사객 무창쌍과 공노, 그리고 오객 혈적이 급하게 달려왔으나 도착하기 직전 귀영대는 감시하던 강소군의 행적을 놓쳤다.

강소군이 조운룡을 피해 한밤중에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혈적은 기품 있는 문사의 풍모를 하고 있으나 실은 여색을 밝히는 위군자(僞君子)였다.

이 모든 사달이 호북제일미라는 연화심을 둘러싸고 일어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귀영대로부터 연화심 일행이 정하무관에 있고 마침 정하무관이 무슨 일로 모두 비웠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곳으로 왔다. 그는 연화심에게 흑심이 있었다.

“꽃을 외면한다면 군자가 아니지.”

혈적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말렸다.

위군자가 속을 드러냈다.

***

언덕을 넘어 남경으로 가던 강소군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노이칠이 합비에 왔다면 연 낭자 일행도 오지 않았을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랐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연화심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랐다.

‘상관청유까지 왔다. 그렇다면 상관부를 비웠다는 뜻이다. 노이칠이 연 낭자 일행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노이칠은 그에게 연화심 일행의 안위를 장담하였다.

강소군은 갑자기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산동삼호의 부상은 깊었다. 장무강은 몰라도 심마백과 위응환은 아직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랑도 자잘한 부상을 입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강소군은 그런 염려가 자신이 연화심의 안위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연이어 드는 생각을 따라잡기 바빴다.

‘그들이 합비에 있다면?’

강소군은 바삐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주첨기를 쫓던 무리는 분명 잘 훈련된 군이었다. 무림인들은 개개인이 뛰어나지만 결코 군을 이길 수 없다.

‘노이칠과 상관청유가 감당하지 못하고 쫓겨 다니고 있다. 그들이 합비까지 들이닥친다면?’

만일 연화심 일행이 합비에 있다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강소군이 돌아섰다.

달빛이 내린 관도가 길게 뻗어 있다. 그 끝은 알 수 없는 어둠에 닿아 있다.

강소군이 몸을 날렸다. 한 걸음에 일 장씩, 마치 날아가는 듯했다.

***

위응환은 원래 술이 약했다. 게다가 아직 몸이 성치 않았다.

“대형. 나는 먼저 가서 쉬어야겠소.”

“크. 저놈이 원래 저렇게 재수가 없다니까. 술판을 깨는 재주는 기가 막히지. 이놈아 네가 가면 나도 가야지.”

심마백이 투덜거렸다.

그 말에 조운룡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떡 일어나 포권을 하였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불청객이 끼어들어 오래 앉아 있었군요. 이 자리는 제가 값을 치르겠습니다.”

“아니지. 공술을 마시면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지. 그렇지 않소? 형님!”

심마백이 손을 젓는데 취한 듯 보였다.

장무강도 연화심의 곁을 오래 비운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하하. 조 형제. 나중에 마음껏 한잔할 날이 있을 걸세.”

장무강이 마지막 술을 따라 잔을 들었다.

네 사람이 각자 잔을 비우고 주루를 나섰다.

“어디로 가는 겐가?”

“몇 날 며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가서 따져봐야겠습니다.”

조운룡이 예를 취하고 몸을 날렸다. 깔끔한 동작이 전혀 술에 취하지 않은 듯했다.

“저 녀석의 말을 믿습니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조운룡의 뒷모습을 보던 심마백이 조용히 말했다. 이제까지 술에 취한 듯했던 목소리와는 아주 딴판이었다.

“나는 믿는다. 저자의 눈빛을 보았다.”

“도룡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입니다. 대정무각과 대치하고 있기도 하고요.”

위응환이 한마디 하였다.

“무림의 세력들이 패권을 쥐기 위해 서로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아직 대정무각에 든 것도 아닌데 굳이 경계할 이유는 없지.”

장무강은 조운룡이 마음에 들었다.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휘어질 놈은 아니다.’

장무강은 속으로 그리 생각하고 정하무관 쪽으로 길을 나섰다.

그때.

-쾅!

멀리서 기와 기가 부딪치는 폭음이 들렸다.

희미하지만 산동삼호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정하무관이다!”

심마백이 몸을 날렸다.

“이런, 제기랄.”

위응환이 뒤따라 달려갔다.

장무강이 발을 구르자 순식간에 가장 선두에 섰다.

***

멀리 불화살이 보였다.

마음이 급해진 강소군이 전력으로 질주하였다. 달빛 아래 한 줄기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앞쪽에 한 무리의 인영이 진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주첨기를 쫓던 무리가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누구냐?”

경계를 하던 복면인이 소리를 쳤으나 강소군은 이미 그자를 지나쳤다.

“적이다!”

또다시 누군가 외쳤으나 허망한 울림으로 끝났다.

“크윽!”

마상에 있던 자가 떨어지고 강소군이 어느새 말고삐를 채어 타고 달려나갔다.

느닷없이 벌어진 일에 복면 무리가 당황하였다.

“대체 무슨 일이냐?”

뒤늦게 수장인 자가 나타나 물었으나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만 같았다.

-두두두두.

강소군이 안력을 높여 말을 몰았다.

밤길 전력 질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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