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겨울 메마른 밤이다. 달빛 또한 차가웠다. 길가에 녹지 않은 눈들이 푸른 달빛을 받아 싸늘하게 빛났다.
-따각 따각.
관도에는 강소군이 몰고 있는 말의 발굽 소리만 조용히 깔린다.
‘연화심은 어디로 갔을까?’
왜 갑자기 연화심이 떠올랐는지 몰랐다.
천무방의 추적이 끊긴 상황도 의아했다. 곧바로 들이닥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하다.
‘화총까지 가지고 있다니.’
강호 방파에 화총이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조정과 연계가 있지 않고서야 화총을 입수하기 어렵다.
어둠 속에서 날아온 철시 또한 군문에서나 쓰는 강력한 쇠뇌에서 발사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조정에서도 주목할 것이다.
강소군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밤길을 가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두두두.
곧이어 무리 지어 달려오는 횃불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수십 명이 넘는다.
‘이 밤에 저 많은 무리가 움직이다니.’
밤길임에도 무척 급하게 달려오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강소군은 관도를 벗어나 언덕 뒤로 갔다. 공연한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법.
공교롭게도 강소군의 앞쪽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제 보니 횃불은 쫓고 쫓기는 두 무리였다.
-챙! 채챙!
“크윽!”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비명이 연달아 밤하늘로 흩어졌다.
“너희는 멈추지 말고 대인을 모시고 먼저 가라!”
쫓기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소리쳤다. 강소군은 그 목소리가 낯익었다.
‘저 사람은 육각주 아닌가?’
마상에서 소리치는 이는 분명 합비성 외곽에서 객잔 주인 노릇을 하던 대정무각의 육각주 염가였다.
염가의 명령에 몇몇 무사가 두건을 눌러 쓴 사람을 호위하고 합비성 쪽으로 달려갔다.
염가는 수하들이 가는 걸 보고는 곧바로 말을 돌려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크윽!”
그가 가는 곳에 혈판이 번뜩이고 비명이 터졌으나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수가 많았다. 쫓는 적은 백여 명이 넘었다.
‘군이다!’
무복을 입고 복면을 썼지만 강소군은 쫓는 자들의 도법에서 군인들임을 알았다.
‘적어도 십부장 이상들이다.’
강소군은 그들 하나하나가 단순한 군졸이 아니라는 것에 놀랐다. 무위로 봐서 십부장 이상으로 보였다.
염가의 수하들도 제법 뛰어난 자들이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연달아 말에서 떨어져 쓰러져 갔다.
주인 잃은 말들이 날뛰니 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상황이 불리하자 염가는 미친 듯이 혈판을 휘둘렀다.
-쉬쉭!
주판알이 튀어나가며 복면인들이 우수수 말에서 떨어졌다.
염가는 주판알이 모두 떨어져 나가자 도를 뽑았다. 염가의 도는 두 자 길이였는데 날렵한 것이 검과 비슷했다.
-쉬시식!
염가의 신형은 신출귀몰하였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가 나타나면 그 순간 도광이 번뜩였다. 그때마다 복면인들이 어김없이 마상에서 떨어졌다.
“제법이구나!”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과 함께 복면인 무리 뒤쪽에서 한 사람이 날아왔다.
-쩌러렁!
날아온 이가 커다란 구환도를 내리쳤다. 달빛을 받은 도광이 염가에게 쏟아졌다.
-까강!
기음이 터지며 염가와 날아온 사람이 각각 세 걸음씩 물러나 대치하였다.
“고염라(枯閻羅)? 네가 반역의 무리에 들었느냐?”
“크크. 피차 말 섞을 사이는 아니잖나?”
날아온 이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무색하게 비쩍 말랐다. 키가 커서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렇긴 하지. 곧 죽을 놈에게 뭘 따지겠나.”
염가의 신형이 자취를 감췄다.
“어딜 감히!”
고염라가 벼락같이 몸을 솟구치더니 아래를 향해 구환도를 휘저었다.
-까강!
두 사람의 도가 다시 한 번 격돌하였다.
염가가 고염라와의 싸움에 묶이자 수적으로 열세인 대정무각이 몰리기 시작했다. 전황은 급하게 기울어 갔다.
그때.
합비 쪽에서 다시 한 무리의 기마가 달려왔다.
“여섯째 형님!”
앞장서 달려오는 이는 노이칠과 상관청유였다.
놀랍게도 대정무각 각주가 셋이나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왜 이제 오는 거냐?”
염가가 버럭, 화를 냈다.
“쳐라!”
노이칠의 명령에 수하들이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기울어 가던 싸움이 다시 팽팽해졌다.
“그놈은 뭐요? 빨리 해치우지 않고.”
노이칠이 염가와 싸우는 고염라를 흘깃 보고는 말했다.
“네놈이 싸워 봐라. 이놈이 고염라다.”
염가가 노이칠의 말에 화를 벌컥 냈는데, 그 순간 도세가 잠시 흐트러졌다.
“크크. 싸우다 한눈을 팔다니!”
고염라가 염가의 머리통을 쪼갤 듯 구환도를 내리쳤으나 허공만 갈랐다.
“멍청한 놈!”
염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 오자마자 고염라가 뒤로 몸을 날리며 왼손을 휘저었다.
-따다당!
왼손에 감아둔 호신갑으로 고염라는 간신히 염가의 칼을 쳐냈으나 그만 팔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이런 쥐새끼 같은 수를!”
그 짧은 와중에 일부러 허점을 보여 자신을 유인하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고염라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염가의 일도에 진짜 염라대왕을 만나러 갈 뻔한 것이다.
고염라가 팔목을 부여잡고 뒤로 도주하자 염가도 일 장을 물러나 전황을 살폈다.
노이칠과 수하들이 뛰어들자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는데 양쪽 다 만만치 않아 팽팽하다.
한숨 돌리는 염가에게 상관청유가 물었다.
“대인은 어디 계시는가?”
염가가 놀라 되물었다.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오?”
“이런!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고 숨은 모양이구나!”
상관청유가 다급하게 주위 무사들을 모았다.
“너희는 나를 따라와라.”
상관청유가 되돌아가려는데 그들이 온 쪽에서 몇 기의 기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수십에 이르는 횃불이 줄지어 쫓아온다.
염가가 보니 먼저 피신시켰던 대인 일행이 다시 쫓겨오고 있었다.
“이놈들이 매복까지 둔 모양이구나.”
염가가 이를 갈았다. 적은 염가의 일행이 합비로 들어가는 걸 막고자 온 전력을 쏟아부은 듯했다.
상관청유가 말을 달려가더니 대인이라는 자의 앞에 섰다.
“상황이 긴박하니 예를 차리지 못하겠습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상관청유가 대인을 인도하여 수하들과 관도를 벗어나 달려오는데 공교롭게도 강소군이 숨어 있는 곳이었다.
“누구냐!”
앞장서 달리던 상관청유는 언덕과 언덕 사이 소로, 나무 그늘 속에 있는 강소군을 보고 검을 뽑았다.
강소군이 말을 몰아 나무 그늘에서 나왔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강소군?”
상관청유가 놀라 강소군의 이름을 불렀다.
“자네가 왜 여기에…?.”
상관청유가 경계하며 묻는데 뒤에 있던 대인이라는 자가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강휘! 너는 휘 아니냐!”
대인의 말에 강소군도 놀랐다. 한적한 겨울 벌판에서 자신의 본명을 아는 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천하에 자신의 본명을 아는 이는 손으로 꼽을 것이다.
강소군이 대인을 노려봤으나 두건을 썼기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대인이 두건을 벗고 다시 말했다.
“나다!”
강소군은 석상처럼 굳었다. 대인이라 불린 이는 의외로 젊었다. 이십 대 중반에 불과하였는데 코와 턱이 두툼하여 후덕한 인상이었다.
‘주첨기!’
대인은 당대 황태자 주첨기였다.
강소군이 말에서 내려 부복하였다.
어쨌든 그 역시 황가의 방계. 신분의 굴레는 어쩔 수 없었다.
“태자 형님을 뵙습니다.”
주첨기가 말에서 내리려는데 상관청유가 말고삐를 잡았다.
“지금 상황이 화급합니다.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아닐세. 휘아는 내가 가장 아끼는 아우일세. 어찌 그냥 지나친다는 말인가.”
주첨기의 말에 이번에는 상관청유가 아연실색하였다.
강호의 야인이라고 여겼던 강소군이 황태자의 아우라니.
주첨기가 말에서 내려 강소군을 일으켰다.
“너를 여기서 보다니. 정말 뜻밖이구나.”
강소군은 그런 주첨기를 보며 마음이 착잡하였다.
상관청유는 몸이 달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강적이 쫓아오니 일단 피해야 했다.
관도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한가하게 회포를 풀 때가 아니다.
“대인! 상황이 급합니다.”
주첨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강소군에게 말했다.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
“….”
강소군은 말이 없었다.
“따라와라.”
상관청유가 다시 재촉하자 주첨기가 말에 오르며 강소군에게 말했다.
그러나 강소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주첨기가 가볍게 탄식하고는 강요하지 않았다.
“합비로 갈 터이니 찾아오거라.”
강소군은 그 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첨기가 못을 박았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중원 끝까지 찾아갈 것이다! 네가 또다시 숨는다면 남경의 강부를 파 버리겠다!”
주첨기가 으름장을 놓고는 말고삐를 채었다.
주첨기와 상관청유 일행이 강소군을 지나쳐 달려갔다.
강소군은 검은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신분이 지긋지긋했다.
당금 황상의 누이.
어머니의 신분은 강소군에게 이어졌다. 그 신분은 권력과 영화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군문에 투신하여 변방 전장으로 떠났다.
지난여름 세상을 떠난 선황은 강소군을 아꼈다. 그래서 자신의 휘하에서 근무하기를 원했으나 명분을 내세워 동북변방으로 가는 강소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의심의 눈으로 보는 세력도 있었다. 전장에서 공을 세워 황제의 신임을 받으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강부를 파하겠다는 주첨기의 협박은 강소군에게 통하지 않았다.
강소군은 장선백과 장영영을 찾은 뒤 세상을 등질 생각이다. 다만 하늘이 과연 그럴 기회를 줄지 의문이다. 평범한 삶을 살기에는 그의 손에 너무나 많은 피가 묻었다.
그리고 또다시 피를 요구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주첨기 일행을 쫓는 횃불의 행렬이 강소군 쪽으로 들이닥쳤다.
강소군은 자신의 말에게 다가가 창과 짐을 챙겼다. 그리곤 말 엉덩이를 쳐서 쫓았다.
추적자들이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강소군은 가파른 언덕으로 뛰어올랐다. 남의 싸움에 굳이 끼어들어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두어 번의 도약 끝에 언덕으로 오른 강소군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추적자들은 개의치 않고 주첨기가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대인을 쫓는 적을 끊어라.”
합비성 쪽에서 오던 적들이 주첨기와 상관청유를 쫓아가자 염가가 소리쳤다.
대정무각의 무인들이 눈앞의 적을 물리고 주첨기를 쫓는 적들의 대오를 끊었다.
“크하하! 이 자식들아!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난전에서 고수의 존재는 더욱 각별하다. 염가와 노이칠이 종횡무진하니 적들도 주춤하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염가가 수하들에게 외쳤다.
“성으로 돌아간다. 가자!”
염가가 한쪽에 있는 말을 타고 달려갔다. 뒤이어 노이칠과 대정무각의 무사들이 분분히 말에 올라 합비 쪽으로 달려갔다.
***
멀리 어둠 속에서 점점이 퍼진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합비성을 향해 달리는 상관청유의 안색은 침중하였다. 뒤를 따르는 무사들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매복이 있다!’
어두운 관도 양편에 어린 살기를 상관청유는 느낄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적은 생각보다 철저했다. 추적을 하며 이중삼중으로 매복선을 쳤다.
상관청유은 관도를 돌아봤다. 상관청유 일행은 관도를 우회하여 돌아오느라 시간이 걸렸다. 노이칠과 염가가 어리석지 않으니 후퇴하여 합비로 돌아오고 있다면 곧 나타날 것이다.
“불화살로 신호를 보내라! 일급 지원요청이다!”
상관청유가 이르자 수하가 연달아 세 번 불화살을 날렸다. 성안 정하무관과 뒤에 있을 노이칠 등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위치가 노출되는 것보다 원군이 더 절실했다.
상관청유가 주첨기에게 다가가 말했다.
“앞에 매복이 있을 듯합니다. 잠시 기다렸다가 아우들과 합류하여 돌파하는 게 좋겠습니다.”
주첨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합비 지부의 움직임은 어떤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상관청유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 합비 지부의 의중을 떠보는 중이다.
한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합비 지부가 저쪽으로 넘어갔다면 주첨기의 안위는 보장할 수가 없다.
‘차라리 포기하고 남하하는 게 낫지 않을까?’
경성으로 가는 길은 모두 봉쇄되어 있을 것이다.
상관청유는 앞쪽에 웅크리고 있을 매복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