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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46화 (4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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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비성 외곽 후미진 객잔.

별채 작은 정원에 앉아 있는 조운룡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날이 풀리며 쌓였던 눈이 빠르게 녹고 있다.

눈 녹은 물이 기와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조운룡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 출도를 할 때 품었던 호기가 이 며칠 사이 한풀 꺾인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부를 제외하면 두 사형도 자기보다 아래라고 은근 자부해 왔던 조운룡이다.

실제로 강호에 나와 고수라는 이들을 찾아가 겨뤘는데 모두 화룡도 아래 무릎을 꿇릴 수 있었다.

호승심은 날로 높아져 어느 순간부터는 십대고수만이 자신의 상대가 아닐까 하는 오만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십대고수는 구름 위의 용처럼 세상에 나오지를 않으니 만날 수가 없음을 한탄하기까지 하였다.

상대를 찾아 헤매던 조운룡은 삼도문 연성결을 찾아가던 중 삼도문의 멸문 소식을 들었다. 동시에 신양에서 천무방 무력대를 궤멸시킨 고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혹시나 싶어 강소군을 쫓았다.

조운룡은 강소군이 흑백쌍귀를 해치울 때 멀리서 지켜봤다. 그리고 자신이 겨룰 만한 고수가 확실하다 여기고 뒤를 따랐다.

그런데 며칠 전 강소군이 단숨에 천무십객의 팔을 끊어내는 걸 보고 하늘 밖에 하늘이 있음을 알았다.

‘교만했구나!’

조운룡은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날 탁탑천왕을 해치우며 사실 그도 내상을 입었다.

자신은 천무십객의 말석을 상대하며 내상까지 입었는데 강소군은 내상을 입은 몸으로 그보다 강한 세 사람의 팔을 끊어냈다.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광폭한 혈기는 뭔가. 보기만 했는데도 몸과 마음을 옥죄는 혈기라니.

조운룡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지.’

그는 무로 이룰 수 있는 궁극의 경지를 추구하고 있다.

검을 들었다고 모두가 무인의 길을 걷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무공을 어느 정도 익히면 알량한 재주를 밑천 삼아 권력과 재산을 얻으려 날뛰는 자들이 대부분인 세상이다.

무의 극의를 추구하는 무인은 극히 드물다. 조운룡은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조운룡도 어리석지는 않았다. 상대가 자신보다 월등한데 굳이 싸워 개죽음당할 생각은 없다.

살아 있어야 무의 극의를 보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조운룡은 난생처음 자신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 강소군의 거처를 노려보았다.

강소군은 그날 밤 이 객잔으로 온 뒤 벌써 며칠째 나오지 않고 있다.

강소군은 혈기를 이용해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천무십객 중 절반이 죽었으니 천무방은 더 강한 고수를 보낼 것이다.

강소군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혈기를 깨워 받아들여야만 했다.

혈기가 폭주하여 자신의 의지를 뛰어넘으면 이지를 잃고 피를 갈구하는 마인이 되고 만다.

그랬기에 무총을 나와서 백 일간 금단진공을 운용하여 간신히 잠재운 혈기였다.

그런데 다시 깨어나니 바로 제어하기가 어려웠다. 금단진공으로 누르려 해도 몸부림치며 맞섰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혈기를 이용해 고질로 화하고 있는 내상을 치유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혈기는 야생마와 같아 느닷없이 폭주를 하려 들었다. 금단진공이 아니었다면 수시로 폭주하는 혈기에 이지를 잃기도 전에 기혈이 엉켜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금단진공으로 쌓은 내공이 단전에 자리 잡고 있으니 혈기는 단전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전신으로 퍼졌다.

오장육부까지 퍼진 혈기는 내상으로 굳어 가는 장부로 스며들었다. 장부와 근육 깊숙이 스며든 혈기는 몸에 남아 있던 요천루주의 사기를 만나면 순식간에 잡아먹었다. 혈기는 포식자였다.

내상은 치유되어 가고 있으나 반대로 마음은 암울하였다. 혈기는 강소군의 의지와 동화되지 않는다. 마치 몸속에 다른 존재가 들어온 것과 같았다.

그러니 폭주하지 못하도록 늘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나날이 강해지고 있구나. 어느 순간에는 금단진공으로도 누르지 못할 수 있다.’

강소군은 그 경우 스스로의 잠맥을 터뜨려 죽을 생각이다. 혈기를 깨우는 순간 그가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

어둠이 짙게 내렸다.

중랑이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나서려는데 연화심이 거실로 나오다 봤다.

“이 밤에 어디 가시게요?”

중랑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정하무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 생각이다.”

“노 각주가 못 본 척해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중랑이 연화심을 끌고 탁자에 앉았다.

“화심아. 나는 네게 천운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고 뜬금없는 말을 하는데 중랑의 표정이 진지하니 연화심은 듣기만 하였다.

“내가 겪은 강호는 그렇지 않았단다. 앞에서 웃던 이가 뒤돌아서면 등을 찌르는 곳이었다.”

연화심은 중랑이 얼마나 험한 세상을 살았는지 들어 알고 있었다.

“장 대협이나 노 각주는 광명정대한 사람들로 대협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단다. 그러니 네게 운이 따른다고 말한 것이다. 강호에 나와 만난 몇 안 되는 이들이 협의지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늘 그런 운에 기대어 살 수는 없단다.”

중랑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정하무관은 대정무각의 산하 무력이다. 나는 노 각주는 믿지만 대정무각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그래야 너를 지킬 수 있다.’

마지막 말은 하지 못했다.

연화심이 분명 부담스러워할 것이니까.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중랑이 고개를 저었다.

“염탐을 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 움직이면 그만큼 위험할 수 있지.”

중랑의 말에 연화심은 따라나설 수가 없었다.

중랑은 조용히 거처를 나가 뒷담을 넘어 사라졌다.

***

산동삼호 역시 상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노이칠에게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연 낭자가 찾아온 이후 계속 강호의 일에 휘말리다니.”

장무강이 탄식을 하였다.

“분위기로 봐서 단순한 일이 아니다. 정하무관이 아니라 대정무각 본각이 움직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거지.”

“노 각주가 관심 끄라고 했으니 그에 따라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오히려 분란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위응환은 아직 상처가 완치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험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아니라고 봐.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야 우리 목숨도 챙기지.”

심마백이 위응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노 각주가 말해 주지 않는 건 이유가 있을 겁니다.”

“너는 네 목숨을 남의 호의에 맡길 것이냐? 아직도 이리 순진하니 대체 언제 철이 들래?”

“그렇다고 자칫 대정무각의 일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사면 입장이 난처해지잖아요.”

“입장 난처한 게 중요하냐? 연 낭자를 잊었나? 우리 목숨만 달린 게 아니잖아.”

“형님!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늘 사고는 형님이 치고 뒷수습은 제가 했다는 걸 잊으셨어요?”

“뭐라? 아이고. 심마백이 너무 오래 살았구나. 이런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아우에게 듣다니.”

심마백과 위응환이 옥신각신하자 장무강이 말을 잘랐다.

“그만들 해라. 이번에는 마백의 말이 일리가 있다. 노 각주는 우리를 호의로 대하고 있지만 대정무각까지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봐야 해. 그렇다고 대놓고 쑤시고 다닐 수는 없지. 그러니….”

장무강이 일어났다.

“나가서 술 한잔하자. 주루에 가면 뭔가 들리는 게 있겠지.”

“그렇지. 술 마시러 가는 것까지 트집 잡지는 않겠지.”

오랫동안 요양을 하며 갑갑했던 심마백이 팔딱 일어났다. 결국 위응환까지 따라 나왔다.

화영루(花影樓).

“여기가 합비에서 가장 괜찮다는 주루랍디다.”

“그래 봐야 모홍객잔만 하겠어?”

악양은 동정호를 끼고 있어 객잔과 주루가 발달한 곳이다. 사람이 꾸준히 찾다보니 늘 새롭게 바뀐다.

반면 합비는 유서 깊은 고장으로 노포(老鋪)가 발달하였다.

주루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다른 데로 갈까?”

“무림인들을 만나기가 쉽습니까? 나는 칼밥 먹는 놈이요, 하고 드러내고 다니는 놈들이 몇이나 되겠어요. 그냥 여기서 한잔하고 들어갑시다.”

가장 중상을 입어 아직까지 운신이 불편한 위응환이 말하니 장무강과 심마백도 어쩔 수 없었다.

세 사람이 안주와 술을 시켜 먹고 마시는데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조운룡이다.

조운룡은 강소군이 거처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다 지쳤다. 술 생각이 나서 홀로 왔는데 산동삼호를 만났다.

“세 분 대협을 여기서 뵈니 정말 반갑습니다.”

조운룡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였다.

노이칠과는 옥신각신하면서도 산동삼호에게는 극진하게 예를 차리는 조운룡이다.

“하하. 여기서 또 보는군. 같이 한잔하세.”

장무강이 조운룡을 자리에 앉혔다.

“조 소협이 합비까지 웬일인가?”

조운룡이 도룡회 사람이라는 걸 아는 장무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합비는 대정무각의 안방과도 같은 곳이다. 도룡회 사람들이 나다닐 곳은 아니다.

“강 형을 따라왔습니다.”

“강 형이라면 강소군? 그도 여기 합비에 있다는 말인가?”

“성 밖 마을 객잔에 있습니다.”

장무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강소군이 아무 말 없이 떠났지만 그 이유를 장무강은 짐작하고 있다.

‘정말 기막힌 인연이군.’

강소군이 애써 천무방의 추적을 끌고 갔는데 또다시 만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천하가 넓다지만 인연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만난다더군. 조 소협과 우리는 아무래도 인연이 있나 보네.”

심마백이 술을 건넸다.

“인연은 이미 오래전에 맺었지요.”

조운룡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오래전이라니?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였던가?”

조운룡이 정색을 하더니 산동삼호의 잔에 일일이 술을 따랐다.

“오래전 도(刀)에 뜻을 두고 고향을 떠난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고명한 스승을 만나 올바른 무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지요. 수련에 매진하던 아이는 어느 날 고향에서 일어난 참화를 들었습니다. 반란 세력으로 몰려 관군이 토벌을 한다는 것이었지요”

조운룡의 목소리는 차분하였다.

“그날 밤 아이는 고향 마을로 달려갔지요. 부모와 어린 동생이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가던 그 밤길을 잊지 못합니다.”

산동삼호는 그 아이가 조운룡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다행히 세 사람의 의협이 마을을 지켜 주었습니다. 아이의 부모와 동생은 무사히 관군의 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요.”

조운룡이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들고 정중하게 몸을 숙였다.

“세 분 대협이 아니었으면 저는 다시 부모님과 동생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장무강은 자신들의 별호를 붙여 준 그 사건을 떠올렸다.

지나던 길에 관군의 만행을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던 것이 이런 인연을 낳을 줄은 몰랐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했을 뿐이네.”

조운룡은 말을 마치고도 울적한 얼굴이다.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지요. 그렇게 만나서 안도를 하였던 것도 한순간이었습니다.”

마무리되는가 싶던 이야기가 이어지자 산동삼호가 조운룡을 주시하였다.

조운룡이 술을 따라 훌쩍 마시고는 탄식을 하였다.

“부모님과 동생은 그 일 이후 얼마 가지 않아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런, 망자의 명복을 비네.”

산동삼호가 안타까워하였다.

“그래도 임종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조운룡이 울적한 심사를 떨치고 술잔을 들었다.

“괜한 이야기로 세 분 대협의 심사를 어지럽혔으니 벌주를 마셔야겠습니다.”

조운룡은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 모습을 본 장무강이 껄껄 웃으며 잔을 채웠다.

“오늘 잠룡을 만났으니 통쾌하게 마셔야겠네.”

***

강소군은 조운룡이 나가는 기척을 듣고 짐을 챙겨 나왔다.

조운룡이 무슨 생각으로 따라오는지는 몰랐지만 그와는 가는 길이 달랐다. 기회를 봐서 떨치고자 했는데 알아서 객잔을 나갔다.

강소군은 밤길을 달려 남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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