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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찰의 손에서 퍼져 나온 붉은 가루가 강소군을 덮쳤다.
바람을 이용하는 홍나찰의 기술이 절묘하여 붉은 가루는 강소군의 전신을 덮었다.
손조와 옥면미랑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이런 비열한!”
조운룡이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싸움에 끼어들려고 할 찰나.
갑자기 강소군의 전신에서 핏빛 살기가 터졌다.
“마기다!”
손조가 크게 외쳤다.
강소군의 전신에 노한 용이 폭주하는 듯 거센 기파가 회오리쳤다.
비틀거리는 강소군의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옥면미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랏!”
옥면미랑의 백옥검이 강소군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팅!
강소군의 왼손이 백옥검을 튕겨내고는 그대로 옥면미랑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헉!”
기세 좋게 찔러 가던 옥면미랑이 숨을 들이켜며 뒤로 빠지려 하였다.
순간 강소군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홍옥비도에서 핏빛 기운이 한 자가량 쭉 뻗어 나왔다.
“크윽!”
하얀 눈밭에 피가 쫙, 뿌려졌다.
옥면미랑의 오른팔이 팔꿈치에서부터 잘려 나갔다.
백옥검을 쥔 손이 눈밭에서 펄떡거렸다.
“이럴 수가!”
홍나찰은 자신의 독분에 당하고도 옥면미랑의 팔을 잘라낸 걸 보고 기겁을 하였다.
“이놈!”
기련마검 손조의 호통 소리가 거친 바람 사이로 들려 왔다.
손조의 검이 강소군의 등을 찌르기 직전.
강소군이 돌아서며 핏빛으로 물든 손가락을 세워 검날을 튕겨 냈다.
-타앙!
기와 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터지고 홍옥비도가 허공을 그었다.
-서걱!
뼈가 잘리는 음과 함께 손조의 팔도 잘려 나갔다.
“헛!”
순식간에 두 사람이 팔을 잃자 홍나찰이 대경실색하여 몸을 솟구치며 달아나려 하였다.
강소군은 멈추지 않았다.
달아나는 홍나찰을 향해 홍옥비도를 던졌다.
-쉬익!
-파악!
홍옥비도가 홍나찰의 왼팔을 스치자 거짓말처럼 팔이 잘려 나갔다.
홍나찰은 자신의 떨어진 팔을 돌보지도 않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조운룡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홍나찰의 독분을 뒤집어쓰고도 옥면미랑과 기련마검의 팔을 잘랐다.
‘백독불침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무슨 독인지는 몰라도 홍나찰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허접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강소군은 멀쩡해 보였다.
게다가 저 혈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화룡도가 띤 붉은 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납고 살기가 짙었다.
“이익!”
손조와 옥면미랑은 각기 자신의 떨어진 팔에서 검을 주워 들고는 강소군을 겨눴다.
그들의 잘린 팔에서는 쉼 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강소군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대신 나직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가라!”
두 사람이 원독에 찬 눈으로 강소군을 노려보다 자신의 팔을 주워 사라졌다.
눈밭에는 홍나찰의 팔만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소군이 천천히 걸어가 홍옥비도를 회수하려는데.
-쉬이익.
거센 바람소리 사이로 기이한 파공음이 들렸다.
“조심하시오!”
강소군을 향해 철시가 날아들었다.
강소군이 재빨리 홍옥비도를 집으며 눈밭을 굴렀다.
-따다당!
먼저 날아든 철시가 땅에 꽂히고 뒤이어 날아온 철시는 강소군이 쳐냈다.
조개량은 천무십객 중 오 위부터 십 위까지 보내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화천대를 쫓다 돌아온 귀영대에서 이 개 조를 차출하여 뒤를 따르게 하였다.
조개량은 귀영대에게 손조 등이 불리하면 암습을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싸움이 워낙 순식간에 끝나 암습 기회조차 없었다.
귀영대는 뒤늦게 철시를 날렸다.
철시는 보통 화살보다 두 배는 길었다.
“귀영시(鬼影矢)!”
조운룡이 철시의 내력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쇠차에서 쏘는 철시로 천무방 귀영대가 자랑하는 무기다.
실려 있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강소군도 쳐내면서 충격에 비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쉬쉬식!
철시는 연달아 날아왔다.
강소군이 자세를 잡고 날아드는 철시를 쳐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따앙!
폭죽이 터지는 소리에 강소군이 벼락같이 허리를 숙였다.
-파악!
강소군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화총까지?”
조운룡이 외치며 사방을 경계하였다.
군에서나 쓰는 화총이 나타나다니.
조운룡은 믿을 수가 없었다.
화총은 조정에서 통제하고 있어 군에서도 극히 일부만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천무방 귀영대에서 화총까지 가지고 있다는 정보는 아직 듣지 못했다.
강소군은 미동도 하지 않고 화총이 불을 뿜은 곳을 노려보았다.
-쉬쉬식!
철시가 연달아 날아들었다.
화총은 무척 강력하나 정확히 맞추기가 어렵고 쏘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귀영대는 철시로 강소군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화총으로 숨을 끊으려 하였다.
그때.
객잔 문이 열리고 염가가 나타나 소리쳤다.
“제거해라!”
눈보라 치는 어둠 속에 염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각의 살수들이 있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바람 소리와 섞여 들려 왔다.
더 이상 철시가 날아오지 않자 강소군이 멈춰 섰다. 그의 전신에 어렸던 핏빛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염가는 흥미로운 눈으로 강소군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독도 통하지 않는다니 놀랍군. 게다가 화총까지 피하다니. 대체 저자가 누구란 말인가?”
혼잣말이지만 실은 옆에 선 조운룡에게 물은 것이다.
“강소군이라고 하는 자요.”
“강소군? 천무방주의 아들을 죽였다는 자로군.”
염가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객잔으로 들어가 버렸다.
홍나찰의 독분에 전신 세맥으로 퍼져 있던 혈룡기가 다시 깨어났다.
그동안 꾹꾹 눌러 왔던 혈룡기가 강소군의 심적 동요에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화독을 품은 독분에 자연스레 반응한 것이다.
혈룡기는 빠르게 혈관을 타고 돌며 독기를 태우고 성이 풀리지 않은 듯 금단진공을 누르고 발현하였다.
한 번 깨어난 혈룡기는 그간의 금제에 반발이라도 하듯 폭주하였다.
강소군은 금단진공을 운용하며 혈룡기의 폭주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혈관을 타고 질주하던 혈룡기는 내상으로 굳어 가던 오장육부로 밀려갔다.
“크윽!”
강소군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입가에 핏물이 흘렀다.
혈관을 날카로운 날붙이로 훑는 듯한 극한의 고통이 밀려든 것이다.
혈룡기는 마치 혈관을 긁어내듯 요동쳤다.
금단진공으로 의식을 나누지 않았으면 곧바로 미쳤을지도 모른다.
강소군의 몸은 극한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혈룡기가 폭주할 때는 강소군 스스로도 제어하기 어려웠다.
“강 형!”
조운룡이 다가와 강소군을 불렀으나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칫 혈룡기에 몸을 내주면 다시 제어하기 어렵다.
조운룡은 핏빛이 울렁거리는 강소군의 얼굴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화룡도를 뽑아 옆을 지켰다.
휘이잉.
반 시진이 흘렀다.
다시 눈발이 날리며 강소군은 설인이 되어 갔다.
차가운 눈이 몸에 닿아 녹으며 혈관을 긁는 고통이 점차 사라졌다.
날뛰던 혈룡기가 천천히 단전으로 자리 잡으려 할 때 강소군은 숨죽이고 있던 금단진공의 기운을 전신 대맥으로 퍼뜨렸다.
금단진공의 청아한 기운이 혈룡기의 기운을 끌어 전신 세맥으로 유도하였다.
한바탕 폭주하고 난 혈룡기는 순한 양처럼 끌려와 전신 세맥으로 퍼졌다.
혈룡기가 잠든 순간.
“우욱!”
강소군이 검붉은 핏덩이를 내뱉었다. 혈룡기가 헤집고 난 오장육부의 사기가 엉킨 핏덩이다.
강소군의 얼굴이 해쓱하였다.
고질로 굳어 가던 오장육부에 충격을 주어 사기를 훑어낸 것은 좋은 일이나 이 또한 내상과 같았다.
한동안 정양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하필이면 이때.’
강소군이 굳이 손조 등의 팔을 자른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자신을 쫓는 자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새로운 고수를 불러들이려는 것이다.
그렇게 천무방의 이목을 집중시키면 상대적으로 연화심에게 쏟아붓는 전력이 약화될 터였다.
노이칠이나 산동삼호가 고수이기는 하나 천무방에는 고수들이 수없이 많기에 택한 강소군의 고육지책이었다.
강소군이 눈을 떴다.
자신의 옆에서 호법을 서고 있는 조운룡이 눈에 들어왔다.
“고맙군.”
강소군의 한마디에 조운룡이 씨익, 웃었다.
***
합비성 정하무관.
후원은 아무리 봐도 무관답지 않았다.
잘 다듬은 정원에 눈이 소담스럽게 쌓였다.
지난밤 몰아치던 눈보라는 오간 데 없고 고요한 아침이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린 처마에서 눈이 녹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원 뒤편 작은 연무장에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쨍, 째쟁!
연화심의 검이 별빛 같은 검광을 흘리며 중랑을 몰아붙였다.
중랑은 검광 하나 하나를 막으며 연화심의 검로를 유도하였다.
“기운을 다스리려 하지 마. 천성육십사식 자체가 하나의 기운이다.”
중랑은 자신이 깨달은 천성육십사식의 검의를 아낌없이 전했다.
하지만 같은 말도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다른 법.
연화심의 천성육십사식은 중랑과는 달리 변화가 심했다.
중랑의 검이 유성처럼 내리꽂힌다면 연화심의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검광을 피워 올렸다.
연화심을 지도하며 중랑은 천성육십사식의 오묘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같은 검법이라도 펼친 자의 오의에 따라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중랑과 연화심이 비무에 몰두하고 있는데 노이칠이 후원으로 들어섰다.
연화심 일행은 어제 아침 노이칠과 함께 합비에 당도하였다.
무슨 일인지 노이칠은 오는 길을 무척 서둘렀다.
도착하자마자 후원을 연화심과 중랑, 산동삼호의 거처로 내주고는 바로 사라졌다.
중랑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바깥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노이칠이 연화심 일행에게 호의를 베푸는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정무각의 합비 안가 정하무관 또한 분주하게 돌아갔다.
무사들이 바삐 오가더니 오늘 아침에는 수십 명이 말을 달려 나갔다.
대정무각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연화심은 노이칠이 오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거처로 들어갔다.
노이칠과 중랑이 정원이 보이는 대청마루에 앉았다.
시비가 차를 내왔다.
“불편함은 없는가?”
노이칠은 후원에 하인을 셋이나 두고 연화심에게도 시비를 둘이나 붙여 주었다.
“덕분에 편히 있습니다. 과분한 대접에 오히려 마음이 쓰일 정도입니다.”
중랑의 말에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렇듯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알고 싶다는 뜻이다.
노이칠은 중랑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차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때로는 이유 없이 끌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아는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솔직히 말하지. 자네들이 있으면 강소군,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역시 노이칠은 강소군을 의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씀드려야겠군요. 화심은 강 협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알고 있네. 그리고 연 낭자를 빌미로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도 없네.”
“그럼 왜 천무방과 척을 지면서까지 이런 호의를 보이는 겁니까?”
“천무방은 천하일통의 꿈을 꾸고 있네. 우리도 원치 않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부딪칠 걸세.”
노이칠이 연화심의 방 쪽을 흘깃 보고는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무관에 일이 있네. 조금 소란스럽더라도 양해해 주게. 그리고 되도록 후원을 벗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하무관 움직임이 분주하더니 확실히 일이 있는 모양이다.
“혹 손이 필요하면 힘을 보태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네. 다만 번거로운 일이 있을까 염려하여 말하는 것이니 양해하여 주게.”
노이칠이 말을 마치고 산동삼호가 묵는 곳으로 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중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노이칠은 분명 긴장하고 있었다.
중랑의 뇌리에 무림 방파 간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