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런데.
조운룡의 신형이 푹 꺼졌다.
-파팟!
동시에 탁탑천왕의 오른쪽 옆구리가 갈라지며 핏줄기가 터졌다.
“헉!”
답답한 신음성이 탁탑천왕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간이 크게 베였다. 대체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수….”
언제 돌아갔는지 탁탑천왕의 등 뒤에 선 조운룡이 화룡도를 거두며 천천히 말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대가라고 생각해라.”
-쿵!
탁탑천왕의 거구가 눈밭에 쓰러졌다.
-덜커덩.
조운룡이 객잔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왼쪽 어깨 위쪽이 화끈거렸다.
탁탑천왕의 도끼가 어깨를 치고 스쳐 갔다. 한 치만 더 안쪽으로 맞았어도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탁탑천왕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덥석 미끼를 물지 않았다면 꽤 오래 싸워야 했을 것이다.
조운룡은 자리에 앉아 탁자에 도를 올려놓고는 자신의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턱!
술잔을 내려놓는데 손이 떨렸다.
방금 전까지 한껏 힘을 썼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수 간의 싸움은 무력대와 벌이는 난전과 다르다.
얼굴도 모른 채 눈앞의 적을 무작정 쳐나가는 싸움이 아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비록 적의에 찬 말이기는 하지만 대화를 한 상대다.
그 상대의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게 무인의 길이니까.’
조운룡이 잔에 술을 따라 다시금 벌컥 들이켰다.
강소군의 시선이 조운룡의 떨리는 손에 닿았다.
‘마운산, 그놈이 첫 살인을 하고 저랬지.’
순간.
강소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마운산!’
요 며칠 문득문득 마운산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봉인했던 기억이 풀렸다.
***
“크윽.”
칠흑 같은 어둠.
비틀린 입 사이로 하얀 이가 보였다.
검붉은 피가 악다문 이 사이로 흘러나왔다.
심장이 벌떡거리는 움직임을 검을 통해 느낄 수가 있었다.
강소군은 마운산의 가슴에 박은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운산아!”
“내 이럴 줄 알았다고. 제기랄….”
마운산의 눈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
강소군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듯 해쓱해졌다.
술잔을 쥐고 있는 손이 석상처럼 굳었다.
강소군의 변화를 눈치챈 이는 없었다.
옥면미랑과 홍나찰은 탁탑천왕이 어이없이 죽자 조운룡을 노려봤다.
천무십객 서열 구 위라지만 수백 명에 이르는 식객 중에서 아홉 번째 드는 고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자가 아니다.
“제기랄.”
홍나찰이 나직이 욕을 하며 문으로 가서 밖을 내다봤다.
탁탑천왕이 객잔 앞마당에 큰대자로 쓰러져 있었다. 그의 애병 도끼를 든 채였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인다.
‘한심한 놈!’
동료가 죽었는데 홍나찰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홍나찰이 잠시 탁탑천왕의 시신을 보고는 돌아서서 문을 닫으려는데 객잔 주인이 막았다.
“…?”
객잔 주인이 홍나찰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더니 탁탑천왕의 시신을 질질 끌고 뒤꼍으로 갔다.
주방 뒤쪽이다.
객잔 주인의 다른 한 손에는 탁탑천왕의 도끼가 들려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홍나찰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새끼가?”
자기도 모르게 욕을 터뜨린 홍나찰이 자신들의 탁자 위에 놓인 접시를 돌아봤다.
옥면미랑의 시선이 홍나찰을 따라 접시로 향했다.
이상스레 노린내가 많이 난 고기.
‘흑점?’
홍나찰은 자신들이 먹은 고기가 인육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속이 메슥거렸다.
옥면미랑도 홍나찰의 표정을 보고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운룡은 옥면미랑이 일어나며 살기를 흘리자 시선을 돌려 노려봤다.
“너도 죽고 싶나?”
옥면미랑은 지금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화룡도가 끼어들어 탁탑천왕이 죽은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인데 하필이면 흑점이라니.
천무십객은 동료이지만 경쟁자이기도 했다.
탁탑천왕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는 했으나 시신이 썰려서 요리가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걸 용인했다간 강호에서 매장당할 것이다.
“후후. 탁탑천왕을 쓰러뜨렸다고 기고만장하면 곤란하지. 하지만 지금은 우선 이 수상한 객잔 주인부터 잡아야 할 것 같군.”
“객잔 주인?”
옥면미랑이 자신들의 탁자에 있는 접시를 검집으로 쳤다.
-팍!
접시가 날아가며 고기가 흩어졌다.
“인육을 먹어 본 적 있나?”
“인육? 여기가 흑점이라고?”
조운룡이 흩어진 고기를 봤다.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무슨 고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주인이 탁탑천왕의 시신을 가지고 주방 뒤로 갔다고.”
홍나찰이 말했다.
“겨우 그걸로 여기가 흑점이라고 하는 건가?”
“고기를 먹어 보고 말하지?”
“그건 사양하지.”
“그렇다면 방해나 하지 말라고.”
옥면미랑이 주방 쪽을 향해 가다 말고 멈췄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난 것이다.
-삐걱.
객잔 문이 열리고 눈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새로이 나타난 사람은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손 형!”
옥면미랑과 홍나찰이 동시에 소리쳤다.
목소리가 한결 가볍다.
기련마검 손조는 재빨리 객잔 안을 둘러보았다.
바깥에서 핏자국을 보았기에 내심 경계를 하고 들어왔다.
옥면미랑과 홍나찰이 있는 걸 보고 일단 마음을 놓았으나 살기를 흘리고 있는 조운룡과 하얗게 질려 석상처럼 굳어 있는 강소군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검자루에 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저자가 강소군이군. 저 어린놈이 화룡도인가?’
손조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옥면미랑과 홍나찰이 왜 저자들과 함께 있다는 말인가.
손조는 심계가 깊고 용의주도한 자였다.
조개량의 명령서를 받은 뒤 직접 악양과 무한으로 가서 강소군의 흔적을 살폈다.
천무십객 가운데 오객 보고 합공을 하라니.
상대가 십대고수라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조개량이 실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그런 명령을 내리게 한 강소군이란 자가 누군지 알아야 했다.
적을 모르고 싸울 수 없다는 게 손조의 지론이다.
손조는 악양과 무한 삼도문에서의 싸움을 전해 듣고 오객이 합공을 해야 한다는 조개량의 판단이 옳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흑백쌍귀까지 여섯 명이 응천대와 흑마대를 궤멸시킬 수 있을까? 적어도 서넛은 죽을 각오를 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즈음 옥면미랑의 급보를 받았다.
강소군이 흑백쌍귀를 죽였고 화룡도가 동행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손조는 옥면미랑 등과 합류하기 위해 합비로 가던 중에 눈보라를 만나 객잔에 들었는데 당사자들이 모두 모여 있을 줄은 몰랐다.
‘흑백쌍귀가 죽었다면 이쪽은 넷! 저쪽은 둘이다.’
탁탑천왕이 죽은 사실을 모르는 손조가 재빨리 계산을 굴렸는데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바보 같은 놈들, 주제도 모르고 맞붙으려 하다니.’
손조는 옥면미랑과 홍나찰이 섣불리 손을 쓰려 하는 중이라고 오인했다.
손조는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보기로 하고 옥면미랑에게 천천히 다가가며 물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군. 탁탑천왕은?”
“죽었소.”
“뭐?”
손조가 놀라 되물었다.
넷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울 텐데 셋이라니.
탁탑천왕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싸움에 먼저 생각이 미쳤다.
“누가 죽였단 말인가?”
옥면미랑에게 묻는 손조의 시선이 자연스레 강소군에게 향했다.
당연히 강소군이 죽였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운룡이 나섰다.
“화룡도? 도룡회가 천무방의 일에 끼어들다니.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는가?”
“먼저 공격한 건 천무방이었지. 복면을 했다고 모를 줄 알았나?”
조운룡이 코웃음을 쳤다.
“일단….”
옥면미랑이 손조와 조운룡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조운룡과 부딪쳐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손 형, 탁탑천왕의 시신부터 찾아야 하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곳이 아무래도 흑점 같소. 객잔 주인 놈이 탁탑천왕의 시신을 가지고 주방으로 갔소.”
“뭐라?”
손조가 황당하여 되물었다.
홍나찰이 바닥에 흩어진 고기를 가리켰다.
“주인놈이 노루고기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워요.”
“이런, 이거 참.”
강적과 함께 있는 곳이 흑점이라니. 갈수록 태산이다.
흑점은 정사를 가리지 않고 공적으로 여긴다.
물론 손조나 옥면미랑, 홍나찰이 흑점이라고 하여 일부러 나서서 응징을 할 만큼 정의로운 인간들은 아니다.
하지만 탁탑천왕의 시신을 흑점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손조가 다시 물었다.
“확실한가?”
“정황이 그렇소. 일단 확인해 봐야겠소.”
옥면미랑이 뚜벅뚜벅 걸어가 주방으로 가는 복도로 들어갔다.
주방 문에는 붉은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옥면미랑이 검을 뽑고 조심스레 휘장을 걷었다.
주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주방 뒷문 쪽으로 끌고 가는 걸 봤는데….”
홍나찰이 중얼거렸다.
그때, 객잔 문이 열리며 객잔 주인이 들어왔다.
“뭐 하는 거지? 왜 주방을 엿보는 거야?”
객잔 주인이 휘장을 들추고 있는 옥면미랑을 향해 소리쳤다.
옥면미랑이 몸을 돌려 객잔 주인을 노려보았다.
“그를 어디로 데려갔나?”
“묻었지.”
“정말인가?”
“가서 파보든가.”
“이 겨울에 시신을 묻으려고 언 땅을 팠단 말이지?”
객잔 주인은 대꾸하지 않고 계산대로 갔다.
장부를 들춘 객잔 주인이 말했다.
“그자가 시킨 술 값하고 매장 비용까지 당신들이 내야 돼.”
옥면미랑이 검을 내밀어 객잔 주인의 목을 겨눴다.
“제대로 털어놓는 게 좋을걸? 시신을 어떻게 했나?”
객잔 주인이 옥면미랑을 보더니 기괴한 웃음을 지었다.
“너도 묻어 주랴?”
옥면미랑의 안색이 홱, 변했다.
검을 들이미는데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
옥면미랑이 객잔 주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너는 누구냐?”
“객잔 주인이지. 너희가 먹은 술값은 은 세 냥, 저 곰 같은 놈을 묻은 비용은 은 열 냥이다.”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미친놈!”
옥면미랑이 자기도 모르게 욕했다.
객잔 주인이 옥면미랑을 보고 눈알을 부라렸다.
“시끄러. 돈이나 내놓고 가라. 안 그럼 죽는다!”
“이 새끼가?”
옥면미랑이 욕을 하고는 검을 쭉 뻗었다.
-파파팟!
옥면미랑의 백옥 같은 검이 순식간에 열 갈래로 쪼개졌다.
백옥검의 환영들이 객잔 주인의 목과 가슴, 단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흥!”
객잔 주인이 계산대 위에 놓인 주판을 들어 옥면미랑의 검을 막았다.
-따다당!
놀랍게도 옥면미랑의 검은 객잔 주인의 주판에 막혀 튕겨 나갔다.
이제 보니 주판이 쇠로 되어있다.
“무공을 익혔구나.”
“개를 잡을 정도는 되지.”
객잔 주인이 비웃더니 주판을 흔들었다.
-파파팍!
주판알이 옥면미랑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옥면미랑이 황급히 검을 휘저어 주판알을 튕겨 냈으나 두어 개가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자리에서 피가 터졌다.
손조는 객잔 주인의 철판이 붉은빛을 띠고 있는 걸 보고 퍼뜩, 든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혈적산판(血積算板)?”
옥면미랑이 대경실색하여 뒤로 물러났다.
“대정무각이었구나!”
손조가 크게 소리치며 검을 뽑아 옥면미랑의 앞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