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폭설이다.
세상이 눈으로 덮였다. 길도 논밭도 마을도 눈으로 덮였다.
말 무릎까지 쌓인 눈 때문에 길을 가기가 어려웠다.
합비 외곽 허름한 객잔.
“조금만 서둘렀으면 이런 후진 객잔에서 머물지는 않았을 텐데.”
조운룡이 멀리 보이는 합비를 눈에 담으며 투덜댔다.
강소군은 적이 쫓아오는 걸 알면서도 늑장을 부렸다. 일부러 적을 달고 가려는 것만 같았다.
‘아예 대놓고 함께 가자고 하던가.’
조운룡이 암울한 눈으로 객잔을 둘러봤다.
신양의 화양객잔은 여기에 비하면 궁궐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건 깃발마저 겨울바람에 갈기갈기 헤져 무슨 객잔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객잔도 영업을 하다니. 양심이 없군.”
길가에 있는 외딴 객잔이다.
무너져 내린 기와를 대충 나무로 막아 두었고, 벌어지거나 구멍 난 벽은 진흙으로 어설프게 때웠다.
한마디로 엉망이다.
점소이도 없는지 마흔 중반은 넘어 보이는 주인이 계산대에서 소리쳤다.
“말은 저기 마구간에 매어 두쇼.”
조운룡이 두텁게 쌓인 눈에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마구간 지붕을 보고는 강소군에게 말했다.
“차라리 조금 더 갑시다. 지붕 무너지면 말이 깔려 죽을 것 같소.”
합비로 가자는 간절한 눈빛이다.
그러나 강소군은 말에서 내려 천천히 마구간으로 갔다.
“나 원 참.”
조운룡도 투덜대며 마구간에 말을 매어 두고 왔다.
“방 하나에 닷냥이오.”
조운룡이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객방도 없을 것 같은데 닷냥이라니? 미친 거 아냐?”
“흥! 싫으면 가시오.”
주인은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돌아앉았다.
폭설로 길이 끊겼으니 단단히 한몫 챙기려는 심보로 보였다.
조운룡이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쩔그렁!
강소군은 품에서 전낭을 꺼내 닷냥을 계산대 위에 놓았다.
주인이 재빨리 동전을 쥐고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객방은 다 비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걸 쓰쇼.”
조운룡은 어이가 없었으나 더 이상 따져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내원으로 들어갔다.
***
이름 없는 객잔을 바라보는 옥면미랑의 눈에도 암울한 빛이 역력했다.
폭설 속에서 쫓아오느라 무척 고생했다.
강소군이 들어간 길가의 객잔 외에는 주위에 민가도 없다.
“이게 무슨 짓이람. 차라리 그냥 합공을 하자니까.”
탁탑천왕이 투덜거렸다.
“화룡도란 놈까지 붙었잖아. 쉽지 않을 거라고.”
홍나찰이 가죽으로 된 피풍의를 여미며 말했다.
“육객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탁탑천왕이 외따로 행동하는 육객 기련마검을 탓했다.
화룡도 조운룡까지 강소군에게 붙어 있으니 육객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옥면미랑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객잔으로 향했다.
“무슨 짓이야? 지금 우리만으로는 저 둘을 잡기 어렵다니까?”
홍나찰이 만류하자 옥면미랑이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싸우지 않으면 되지.”
옥면미랑도 마구간에 말을 매어 두고 객잔으로 들어갔다.
“그렇지. 굳이 지금 싸울 건 아니니까.”
따끈한 술 한 잔이 간절한 탁탑천왕도 옥면미랑을 따라 객잔으로 들어갔다.
홍나찰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며 바람이 거세다. 다시 눈발이 비친다.
아무래도 눈보라가 치는 밤이 될 것 같았다.
객잔이 반점으로 쓰는 공간은 제법 넓었으나 탁자는 셋뿐이다.
그중 하나에 옥면미랑과 탁탑천왕, 홍나찰이 둘러앉았다.
“커흑! 살 것 같군.”
탁탑천왕이 술병째 들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트림을 하였다.
주인이 오더니 탁자에 접시를 놓고 갔다.
숙수까지 겸하는 모양이다.
접시에는 시뻘건 양념에 볶은 고기가 담겨 있었다.
탁탑천왕이 한 점 집어 먹고는 인상을 썼다.
“왜 이리 노린내가 나는 거야? 주인 이게 무슨 고기야?”
“노루고기요.”
주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노루고기라고? 피는 제대로 뺀 거야? 다른 거 없어?”
“오늘은 그것뿐이오. 먹기 싫으면 마시오.”
탁탑천왕의 험악한 용모에도 주인은 주눅 들지 않았다.
“뭐야? 이런 싸가지 없는…?”
탁탑천왕이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강소군이 불쑥 반점으로 들어왔다.
강소군과 탁탑천왕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흥!”
탁탑천왕이 코웃음을 치고 자리에 앉더니 다시 술병을 들었다.
강소군이 주인을 향해 말했다.
“술 한 병하고 말린 야채 볶음 주시오.”
주인이 술병을 가져다 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조운룡도 반점으로 들어왔다.
조운룡은 옥면미랑 일행을 흘깃 보고는 강소군 앞에 앉더니 도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왼손은 도집을 잡은 채 오른손으로 술병을 들어 잔에 따랐다.
조운룡이 벌컥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졸졸 따라다니던 개들이 집에까지 들어왔군.”
탁탑천왕의 안색이 홱, 변했다. 벌떡 일어나려는 걸 옥면미랑이 섭선을 내밀어 제지하였다.
옥면미랑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홍나찰에게 말했다.
“도룡회 삼공자가 입이 걸쭉하다는 건 몰랐네.”
“호호. 세상 물정 모르는 강아지가 귀엽군.”
자신들을 개라고 한 말에 빗대어 강아지라고 조롱한 것이다.
휙!
탁탑천왕이 자신이 먹던, 고기가 붙은 뼈다귀를 집어 바닥에 던졌다.
“강아지? 이 어르신이 맛있는 걸 줬는데 와서 핥아 먹어야지?”
도집을 잡고 있는 조운룡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운룡을 괜히 화룡도라 부르는 게 아니다.
성격이 급했다.
옥면미랑 일행이 객잔에 나타나자 아예 결판을 내려고 작정하고 들어왔다.
시비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천무방의 개들에게는 사람도 개로 보이나 보군.”
탁탑천왕 역시 욱하는 성격이긴 마찬가지였다.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 새끼가!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다.”
어느새 탁탑천왕의 양손에 도끼가 들려 있었다.
“천무방에 도끼를 들고 설치는 미친놈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조운룡도 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주방에서 객잔 주인이 야채 볶은 접시를 들고 나왔다.
주인은 살벌한 반점 분위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싸우려면 나가라.”
느닷없는 주인의 말에 모두가 쳐다봤다.
칼과 도끼를 든 무인들이 대치하고 있는데, 평범한 객잔 주인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허허. 여기는 죄다 미친놈만 있나 보군.”
탁탑천왕이 어이없어 하다 도끼로 탁자 위의 술잔을 쳤다.
-팍!
술잔이 깨지며 깨진 조각들이 도끼에 쓸려 날아갔다. 그 끝에 객잔 주인이 있었다.
-타타탁!
조운룡이 도를 뽑아 주인에게 날아오는 사금파리 조각들을 막았다.
“엄한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말고 따라 나와라.”
조운룡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객잔 문을 열자 싸늘한 바람이 훅, 하고 밀려들었다.
“저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했군!”
탁탑천왕이 이를 부드득 갈더니 따라 나갔다.
옥면미랑은 밖으로 나가는 탁탑천왕을 보다 강소군과 시선이 마주쳤다.
옥면미랑이 술잔을 들어 보이더니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들이켰다.
옥면미랑은 태연한 척하였지만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일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기다리던 기련마검은 나타나지 않고 외딴 객잔에서 화룡도와 강소군 두 사람을 상대하게 생겼다.
탁탑천왕이 화룡도의 도발에 넘어간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제기랄. 길보다 흉이 많은 밤이 되겠군. 탁탑천왕, 이 한심한 놈!’
옥면미랑은 성질 급한 탁탑천왕이 못마땅했다.
화룡도가 일부러 도발한다는 걸 알면서도 넘어갔으니 정말 한심한 노릇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옥면미랑은 상황이 급변하자 암암리에 내공을 펼쳐 강소군을 탐색하였다.
‘으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오히려 내상이 회복된 듯했다.
흑백쌍귀는 애초에 그의 적수가 아니었기에 내공의 손실조차 없었던 것이다.
‘조개량의 말이 맞았어. 아니, 어쩌면….’
옥면미랑은 신기수사 조개량의 명령서를 떠올렸다.
명령서에는 육객부터 십객까지 합공을 하라고 하였다. 십객의 자리에 흑백쌍귀 둘이 있으니 따지면 모두 여섯 명이나 되었다.
그때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탁탑천왕은 화를 내기까지 하였다.
‘그놈이 비천신검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 여섯이 합공을 하라니!’
‘나는 따로 가볼 데가 있다. 너희들이 제대로 못하면 그때 가서 처리해 주지.’
기련마검은 냉소를 흘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옥면미랑 역시 그때는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천무십객 가운데 오객이 합공한다면 십대고수의 수좌 비천신검은 몰라도 천무방주 구연강과는 겨뤄 볼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막상 강소군을 만나고 그가 흑백쌍귀를 손쉽게 죽이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강소군 앞에서 흑백쌍귀는 삼류무사에 불과했다.
군더더기 없는 일 초.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창의 궤적.
그건 이제까지 그가 본 어떤 고수와도 달랐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듯이 고수 중의 고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강소군이 비천신검 아닐까 싶은 경지였다.
‘그건 아니겠지.’
비천신검이 십대고수 서열 일 위이자 천하제일인으로 회자된 지 이미 이십 년도 넘었다.
강소군의 나이로 봐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자란 말인가?’
옥면미랑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어쨌거나 그는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강소군과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탁탑천왕을 버렸다.
-까강!
쇠와 쇠가 부딪치며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열린 문으로 눈바람이 밀려들고 화룡도와 탁탑천왕의 쌍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미친놈들, 눈보라 치는 밤에 저러고 싶을까?”
객잔 주인이 문을 닫으며 구시렁거렸다.
눈보라가 거세다.
일 합을 겨루는 순간, 조운룡은 손아귀가 짜르르 울리는 충격을 느꼈다.
탁탑천왕은 타고난 힘이 장사다. 거기에 무슨 내공인지 몰라도 무척이나 폭발적인 기세를 담고 있다.
쓰는 무기 역시 보통 도끼보다 크고 길었는데 워낙 거한이다 보니 마치 장난감처럼 다뤘다.
‘으음. 과연 천무십객의 한자리를 차지할 만하군.’
탁탑천왕이 성질은 급하지만 머리가 나쁜 자는 아니었다.
겉으로는 당장이라도 강소군을 치자고 부추겼으나 속내는 달랐다. 그는 강소군과 직접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좀 더 만만해 보이는 조운룡을 끌어낸 것이다.
싸움이 벌어졌으니 안에서도 대치를 하고 있을 터였다.
한마디로 강소군을 옥면미랑과 홍나찰에게 미뤄 버린 셈이다.
‘이 자식도 만만치 않네.’
다만 조운룡 또한 생각했던 이상의 고수라는 게 의외였다.
붉은 기운을 흘려내는 화룡도에 눈송이가 닿을 때마다 치익하고 녹아내렸다.
조운룡의 내공이 화기를 위주로 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 안의 상황을 보고 판단하자.’
탁탑천왕은 객잔 안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조운룡과 싸우다 상황이 불리하면 일단 피하고 볼 생각이었다.
그게 그의 오판이었다.
바람이 더 거세졌는지 이따금 지붕에서 덜커덩 소리가 났다.
강소군은 바람 사이에 섞인 쇠붙이들의 파열음을 들으며 술을 들이켰다.
‘셋만 나타났다? 무슨 뜻이지?’
강소군은 옥면미랑 외에도 자신들을 쫓는 자들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확실치는 않지만 그의 본능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강소군이 조운룡의 잔에 술을 따랐다.
조운룡의 도와 탁탑천왕의 쌍부가 부딪치는 소리에서 이미 승부가 기울었음을 알았다.
무슨 일인지 탁탑천왕이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다.
고수들 간의 싸움에선 간발의 차가 생사를 가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결판이 난 승부라 봐도 무방했다.
조운룡은 탁탑천왕이 방어를 하며 시간을 끌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자 조운룡 역시 그에 맞춰 적당히 응수를 하다 한순간 크게 도를 휘둘렀다.
탁탑천왕이 쌍도끼로 화룡도를 쳐내자 조운룡이 눈발에 미끄러지며 비틀거렸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탁탑천왕이 쌍도끼를 동시에 내려찍었다.
‘역시 어린놈이라 경험이 부족하군.’
탁탑천왕은 이 한 수로 조운룡의 팔을 자르고 머리를 쪼갤 것이라 확신했다.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려다보니 동작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