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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형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천무방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아무래도….”
노이칠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천무방에서 고수를 풀 것이라고 보았다. 무력대를 동원하고도 꼼짝 않고 있는 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천무방에는 고수가 구름같이 많다. 그중에는 무력대 하나와 맞먹는 고수 중의 고수도 있다고 들었다.
이는 강소군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고수 서넛이 합공을 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일단 저승길에 발을 걸쳤다고 봐야 한다.
다행히 고수들은 자존심이 있어 합공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도 연달아 고수를 만나면 요행을 바라기는 어렵다.
더욱이 강소군은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무위를 보여 준다는 게 기이하긴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강소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안 노이칠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게 됐네. 상관 형이 원래 좋은 사람인데 각의 중책을 맡다 보니 좀 각박해진 면이 있다네. 서운하게 생각지 말게.”
“서운할 것 없소. 갈 수 있을 때 가는 것뿐이오.”
강소군이 말했다.
‘갈 수 있을 때?’
노이칠은 연화심 일행을 대정무각이 떠맡았음을 깨달았다.
‘연 낭자를 잡아 두면 언제고 다시 볼 수 있겠군.’
노이칠은 한 가닥 인연의 끈이 남아 있음에 안도하였다.
그는 강소군이 연화심의 안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디로 가려는가?”
강소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이칠은 강소군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서운하였다.
자신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강소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상대는 행로조차 일러주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그를 채근할 수는 없었다.
노이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강소군이 불쑥 말했다.
“남경으로 갈 것이오.”
노이칠이 황급히 다시 앉으며 말했다.
“남경? 그럼 배를 준비해 주겠네.”
강소군이 고개를 저었다.
“육로로 갈 것이오.”
강소군 역시 천무방에서 고수를 푸는 수순으로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무력대를 보내 봐야 희생만 늘 뿐이라는 걸 조금만 머리가 있으면 알 것이니까.
강소군은 연화심 일행의 안전을 위해 천무방의 이목을 달고 갈 생각이다.
‘역시, 겉보기와는 달리 속이 깊은 자야.’
노이칠은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뿌듯해하였다.
강소군은 이튿날 새벽길을 나섰다.
연화심과 산동삼호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연화심이 허탈해하였다.
“그가 갔다고요?”
“새벽같이 떠날 줄은 나도 몰랐네.”
노이칠이 변명하듯 말했다.
온갖 정보를 꿰차고 있다는 대정무각 십각의 주인이 자신의 손님이 떠난 것도 모르고 이런 궁색한 변명을 하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찼다.
장무강이 한마디 하였다.
“사람 참 너무하네. 온다간다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장무강이 연화심을 위로한다고 한마디 했지만 그다지 효용이 없었다.
연화심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나 같은 건 마음에 없는 거야.’
한 송이 꽃이 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심마백이 자기도 모르게 툭, 내뱉었다.
“흥! 제아무리 고수면 뭐하나? 인성이 덜 됐는데!”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위응환이 강소군의 역성을 들었다.
위응환은 강소군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목숨이 오가는 위기의 순간에야 비로소 누군가의 진심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위응환은 강소군이 연화심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고 있었다.
중랑은 달랐다.
중랑에게 연화심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존재다. 그런 그녀가 슬퍼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강소군이 떠난 것이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악연을 끝내야 한다!’
따지고 보면 연화심이 강소군을 찾으며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중랑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
고개 아래 노천주막이 있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붕을 이은 작은 주막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탁자 네 개가 길가에 놓여 있었고 천막으로 햇볕을 가렸다.
아직 해가 많이 남았는데 한 사람이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남자는 수려한 용모에 은은한 옥색 무복을 갖춰 입었다.
허리에 달린 패옥이나 이마에 두른 영웅건에 박힌 옥을 볼 때 예사 신분이 아닌 듯했다.
강소군이 천천히 말을 몰아 고개를 내려가는데 남자가 손짓을 하였다.
“잠시 목이나 축이고 가지?”
말이 남자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멈췄다.
강소군이 남자를 보았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네. 오늘은 시비를 걸 생각이 없으니까.”
남자가 강소군이 가는 길 쪽을 봤다.
“저 앞에서 두 놈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흑백쌍귀라고 제법 이름이 있는 놈들이지.”
강소군이 남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봤다.
멀리 강마을이 보였다. 포구에 돛을 단 배가 꽤 많이 정박하고 있다.
“그놈들이 여러 사람 앞에서 공을 세우고 싶은 모양이야. 굳이 마을에서 기다리는 걸 보면.”
“천무방에서 왔나?”
강소군이 물었다. 남자가 제법 호쾌하게 말을 하나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봐야지. 자네가 분탕질을 치는 바람에 좀 귀찮게 됐어.”
강소군이 묵묵히 남자를 살폈다. 얼핏 봤을 때는 서른 갓 넘어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중반은 되어 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노숙함이 깃들어 있다. 옆에 세워 둔 검은 자루는 물론 검집까지 백옥처럼 하얗다.
이름 없는 무명소졸은 아니다. 자세를 풀고 비스듬히 앉아 있으나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저 앞에 기다리는 자들이 동료인가?”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천무방에서 식객 노릇을 한다고 모두 동료는 아니니까.”
“나를 잡은 이유는?”
“궁금해서. 한 사람 때문에 천무십객 중 오객이 나와야 했거든. 대체 누군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천무십객?’
천무방에서 식객 노릇을 하는 자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가장 귀빈 대우를 받는 열 명을 천무십객이라 부른다.
“자존심도 좀 상하더라고. 그런데 오늘 보니 굳이 내가 손을 쓸 이유도 없을 것 같군.”
남자는 강소군의 내상을 입은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러기를 바란다.”
강소군이 말고삐를 흔들었다. 말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굳이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강소군이 중얼거리듯 흘린 말이 남자의 귀에 들어왔다.
“하하. 이거 참 재미있군.”
남자는 뭐가 그리 흥이 났는지 크게 웃고는 앞에 놓인 빈 잔에 술을 채우더니 탁자를 탁, 쳤다.
술잔이 떠오르자 손바닥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목이나 축이고 가라는 말을 못 들었나?”
술잔이 강소군을 향해 날아가는데 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강소군이 오른손을 내밀어 날아오는 술잔을 받았다.
술잔에 담긴 경력이 묵직했다. 남자는 내가 고수였다.
강소군은 술잔을 받아 입에 털어 넣고 뒤로 던졌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술잔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듯 강소군이 탄 말이 가볍게 달려나갔다.
남자는 강소군이 가는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잠시 뒤 주막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붉은색 치마를 입은 서른 중반의 여인과 거대한 체구를 지닌 사십 대 대한이었다.
“특이한 자로군. 우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전혀 경계를 하지 않다니.”
붉은 치마의 여인이 멀어져 가는 강소군의 뒤를 보며 말했다.
“실력은 몰라도 건방지긴 하군.”
백옥검을 지닌 남자, 옥면미랑이 깨진 술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놈들이 일찍 세상을 뜨게 마련이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탁탑천왕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내상을 입었다는 정보가 맞나?”
붉은 치마의 여인, 홍나찰이 옥면미랑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럼 굳이 우리까지 나설 필요도 없을 것 같군.”
홍나찰이 멀리 마을 쪽을 보며 말했다.
“흑백쌍귀의 쌍도는 제법 날카롭거든.”
“나는 그놈들 실력을 믿지 않아.”
옥면미랑이 고개를 저었다. 흑백쌍귀는 가장 최근에 십객의 자리에 올랐다.
옥면미랑이 강소군의 뒷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자가 정상은 아니지만 흑백쌍귀에게 죽을 것 같지도 않아.”
홍나찰이 눈살을 찌푸렸다.
옥면미랑은 내가고수로 특이하게 상대의 내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다.
옥면미랑이 말이 맞다면 내상을 입은 몸으로 흑백쌍귀를 처치할 수 있는 실력자라는 뜻이다.
“흑백쌍귀가 실패하면 다음에는 누가 나설 건가?”
홍나찰이 탁탑천왕을 보며 말했다. 네가 나서라는 뜻이다.
탁탑천왕은 거구에 어울리지 않게 약삭빨랐다. 혼자 짐을 떠맡을 생각이 없었다.
“번거롭게 한 사람씩 갈 이유가 있나? 셋이 가서 빨리 해치워 버리고 술이나 한잔하는 게 낫지.”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
세 사람은 강호에서 고수로 손꼽히는 이들이었으나 체면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이들이었다. 평소 친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이런 일이 있으면 담합할 정도의 친분은 된다.
옥면미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천천히 따라가 볼까?”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은 장포 다른 한 사람은 흰색 장포를 입었다.
둘 다 기다란 도를 들고 있었는데 왜국의 도처럼 길다.
두 사람이 길에서 버티고 있으니 오가는 사람들은 멀리 돌아간다.
“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거지?”
“벌써 한 식경 째 저러고 있잖아?”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이들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움직인다!”
골목에서 웅크리고 지켜보던 누군가 낮게 소곤거렸다.
흑백쌍귀 두 사람의 전신에 흐르는 기운이 바뀌었다. 마치 잘 벼린 칼이 꽂혀 있는 듯 살기가 솟았다.
“역시 고수들이었어.”
“어디서 온 자들일까?”
사람들은 혹시 몰라 뒤로 물러나면서도 서로서로 속닥거렸다.
따각 따각.
마을로 들어오는 관도에 한 필의 말이 가볍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 사람을 기다렸나 봐.”
사람들은 흑백쌍귀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아챘다.
말 위에는 말끔한 청의를 입은 강소군이 타고 있었다.
말이 점차 가까워지자 흑백쌍귀의 살기 또한 짙어갔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침만 꼴깍, 삼킬 뿐이다.
“이랴!”
십여 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강소군이 말고삐를 채었다.
가볍게 달려오던 말이 질주하였다.
“오옷!”
사람들은 강소군이 달리는 말에서 뛰어오르자 탄성을 질렀다.
언제 뽑아 들었는지 붉은 창을 앞세워 날아가는데 매가 먹이를 향해 꽂히는 것처럼 빨랐다.
흑백쌍귀는 잠시 당황했다. 상대가 통성명도 없이 곧바로 공격을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기합을 질렀다.
“타앗!”
두 사람의 신형이 폭사되었다.
-쨍!
-푹!
-파악!
“…!”
강소군은 흑귀의 도를 창끝으로 걷어내고 그 기세를 몰아 목을 찔렀다. 이어서 몸을 회전하며 창대로 백귀의 뒤통수를 갈겼다.
마을 어귀에서 한 식경이 넘도록 기다렸던 흑백쌍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꿰이고 머리가 터져 피와 뇌수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사람들은 우아하면서도 단호하고 무자비한 살수에 놀라 말을 잃었다.
멀리서 뒤따라오던 옥면미랑 일행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관도에 우뚝 선 채 석상이 되어 버렸다.
옥면미랑이 무시하기는 했지만 흑백쌍귀는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었다.
한때 절강에서 살인귀로 이름을 떨쳤던 이들이다. 두 사람의 합격술에 죽어간 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강소군이 창 한 번 휘두르자 길바닥 고혼이 되어 버렸다.
강소군은 바닥을 박차고 다시 말에 올라탔다.
강소군의 시선이 잠시 멀리 서 있는 옥면미랑 등을 훑었다.
올 테면 오라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