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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부유한 상인의 집이다. 현판에 상관부(上官府)라 적혀 있다.
외원과 내원, 별원 그리고 후원까지 격식을 제대로 갖춰 주인의 품격이 절로 느껴진다.
후원 대나무 숲에 눈발이 비친다. 살짝 얼은 연못에 떨어진 눈이 쌓인다.
-삐걱.
정원으로 난 덧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 흑단으로 짠 대청마루가 보였다. 한가운데 화로가 놓였고 찻물이 끓고 있다.
앉은뱅이 다탁에 앉아 있는 이는 강소군이었다.
“올해 처음 눈을 보는 듯하군.”
문을 연 이는 장원의 주인 상관청유다.
오십 정도 되어 보이는 문사로 양 갈래로 난 콧수염과 길지 않은 턱수염이 단정하다.
안경성에서 제법 이름난 상단의 주인이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문인에 더 어울려 보였다.
냉랭한 한기가 밀려들었으나 상관청유는 개의치 않았다. 연못과 주위 대나무 숲에 내리는 눈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자리는 봄비가 내리는 날이 가장 좋다네. 대나무 순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지.”
화로에 올려둔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과 함께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려 왔다.
상관청유가 다탁에 앉았다. 강소군은 열린 문으로 정원을 내다봤다.
하얀 눈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
“세상이 멈춘 것 같아. 너무나 고요해.”
여자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아주 오래된 기억.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던 그날. 손님이 왔다.
커다란 마차와 호위병들, 그리고 장군이라는 거구의 장한. 그런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어린 여자아이가 걸어오던 기억만 뚜렷하다.
마차에서 내린 여자아이가 그를 보고 아장아장 걸어왔다.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소년이 걸어가는 여자아이가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내려 미끄러운 청석을 아슬아슬 걸어온 여자아이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강소군은 그 손을 바라만 봤다.
오라비가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말했다.
“영영이가 너를 좋아하나 보다. 손을 잡아 줘.”
강소군이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오라비가 그의 어깨를 짚었다.
“나 장선백이야. 네가 강소군이라며?”
또 다른 눈의 기억.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벌판을 헤맸다.
길을 잃은 지 이미 오래였다.
아군도 적도 하늘이 무너진 듯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혔다.
적이 아니라 미친 듯 몰아치는 눈폭풍과 싸워야 했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량한 대지.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눈에 덮인 거대한 언덕이 보였다. 언덕 아래쪽에 자그만 석문이 보였다.
미친 듯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석문에 다다랐다.
석문 위에 쓰인 글귀.
무총!
***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는가?”
강소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노이칠의 주선으로 이 장원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다.
천무방의 추적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상관청유가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몸은 어떠신가?”
“….”
노이칠이 건넨 환약은 제법 효능이 좋았지만 계속된 부상으로 고질화된 내상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금단진공으로 시일을 두고 정양을 해야만 완치할 수 있을 것이다.
상관청유는 이 말없는 청년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그러기에 따로 불러 이렇게 차를 낸 것이다.
“말수가 적다 들었는데 과연 그렇군.”
“묻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강소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하. 우선 차부터 한잔하시게.”
상관청유가 찻잔을 건네며 강소군을 조목조목 살폈다.
노이칠은 강소군의 신분이 범상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공을 지녔다고 전했다.
‘과연 예사 신분은 아닌 듯하군.’
상관청유는 다도에 깊이 빠진 인물이다. 그가 다루는 다기는 하나같이 보기 힘든 귀물들이다. 그러나 강소군은 아주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차를 마셨다.
상관청유는 강소군이 차를 마시는 기품만 보고도 신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라니 묻겠네.”
차를 한 모금 마신 상관청유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앞으로 어찌할 건가?”
거취를 묻는 것이다.
강소군이 말없이 찻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객이 찻주전자를 들었으니 어찌 보면 다례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너무나 자연스러워 허물로 보이지 않았다.
강소군은 남경으로 가서 장영영의 행적을 다시 추적할 생각이다. 또한 연화심이 안전하게 천무방의 손아귀를 벗어나기를 바랐다.
몸은 하나인데 원하는 바는 두 가지다. 그러니 강소군도 아직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내상을 하루빨리 완치하는 게 급했다.
상관청유는 강소군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로 자네들을 들였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보았는가?”
상관청유가 묻는 바를 강소군은 알아들었다.
천무방이 추적하는 자들을 들였다?
이는 천무방과의 대치를 감수하는 일이니만큼 대정무각으로서도 작은 결단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노 각주는 사방에 정을 흘리고 다니며 제 잇속을 차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네.”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아한 문인의 풍모를 하고 있으나 눈매만은 손해득실을 냉정하게 계산하는 상인을 연상케 한다.
강소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여기는 단순한 안가가 아닌 것 같소.”
강소군의 뜬금없는 말에 상관청유는 묵묵히 차만 마셨다.
이 장원은 대정무각의 오각주 상관청유의 거점 중 하나다. 대정무각의 오각은 중원 상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자금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 만큼 적에게 노출될 경우 타격이 크다.
노이칠이 강소군 일행을 끌고 왔다는 것은 결국 오각주 상관청유의 거점 중 하나를 노출시키는 결과를 감수한다는 행동이었다.
상관청유는 노발대발하였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는 상재에 뛰어난 인물답게 상황을 냉정히 직시하고 수습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공개 거점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어쨌거나 단순한 안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맞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단순한 안가라면 천무방이 여태껏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 않겠소?”
강소군은 장원 곳곳에 기관진식이 배치되어 있고 무인들이 매복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으나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본 각에서 자네 일행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짐작하겠군.”
“노 각주가 도움을 준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강소군이 선을 그었다.
상관청유는 눈앞의 청년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노이칠은 강소군 일행을 대정무각의 품으로 거두자고 말했다.
강소군이나 산동삼호나 쉽게 볼 수 있는 고수들이 아니니 대정무각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상관청유는 그렇게 쉽게 생각지 않았다.
그만한 고수들은 쉽게 몸을 의탁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노이칠이 왜 이리 호의를 보이고 오각의 본거지까지 이들을 달고 왔는지 그게 의문일 따름이다.
‘이칠, 이자는 우리 각으로 들어올 자가 아니다!’
상관청유는 판단이 빠르고 냉정한 인물이다.
강소군 일행과 천무방과의 관계를 저울질하고 얼마만큼 간여해야 할지 결론을 내렸다.
천무방이 궁극의 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이제까지 공개적으로 직접 부딪친 적은 없었다.
이들로 인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다.
노이칠이 천무방 무력과 충돌하기는 했으나 아직은 무마할 수 있는 선이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은 다르다.
천무방 삼공자를 죽인 자다. 천무방주 구연강은 이 자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자를 끌어들인 순간 천무방과 일전을 불사해야 한다.’
행동을 하기 전 이득을 따지는 상관청유로서는 바람직한 거래가 아니다.
‘이자는 내보내고 산동삼호만 잡는다.’
상관청유는 연화심 일행은 끌어들일 생각이다.
무슨 인연인지 몰라도 산동삼호는 연화심의 안위에 대해 극진하다.
연화심을 보호하고 있으면 산동삼호 역시 머물 것이고 그 같은 고수들이라면 대정무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연화심 역시 천무방의 추적대상이기는 하지만 대정무각이 나서면 중재가 가능하다.
구연강은 이미 삼도문의 세 의형제를 직접 죽였다. 그로써 아들의 복수를 한 셈이라고 강호 여론을 몰아가면 구연강 역시 연화심을 끝끝내 죽이고자 고집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구연강 역시 아직은 대정무각과의 일전을 치를 생각은 없을 것이다.
“삼도문의 여식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상관청유도 선을 그었다.
강소군이 상관청유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는 대정무각 십각주 노이칠을 이칠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신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노이칠보다는 아래가 아닐 것이다.
그가 먼저 나서서 연화심의 안위를 보장하였으니 당분간은 무사할 것이다.
“내일 떠나겠소.”
상관청유의 의중을 읽은 강소군이 짤막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노이칠은 안경성 외곽에 깔아둔 이목을 훑고 다녔다.
천무방의 추적이 잠잠해졌으나 이는 더 큰 위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목들의 보고 역시 그의 직감을 뒷받침하고 있다.
보고에 따르면 천무방 신무와 참룡, 그리고 귀영대가 신양과 육안에 걸쳐 포진하고 있다.
‘하남으로 진출하겠다는 뜻이로군.’
그밖에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문파 하나를 휩쓸 무력대들을 연달아 희생시키면서도 악착같이 쫓았음에도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이 오히려 불안하다.
이목들을 돌아보고 상관부로 돌아온 노이칠이 상관청유의 집무실을 찾았다.
“아무래도 조짐이 심상치 않소. 천무방이 무언가는 몰라도 단단히 준비를 하는 분위기요.”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십각으로 가는 전서구 좀 씁시다.”
십각은 대정무각의 정보를 관리하고 있다. 그러니 주요 거점마다 십각으로 보내는 전서구가 있다.
“흥! 자네 덕분에 안경의 거점을 새로 마련해야 할 판이네. 어차피 거덜 난 것 마음대로 하게나.”
노이칠은 상관청유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고 있으니 탓할 수가 없었다.
“거점이야 또 마련하면 되지만 절세고수는 평생이 가도 만나기 어렵다는 걸 알잖소. 투자라고 생각하시오.”
“세상 사람이 모두 자네 같은 마음인 줄 아는가? 나는 대형이 자네에게 십각을 맡긴 이유를 도통 모르겠네.”
두 사람의 대형이라면 일각주 백정무를 말한다.
두 사람 모두가 하늘처럼 공경하는 대형이다.
“정보조직의 수장이라면 냉정해야 하거늘. 정에 이끌려 민폐를 끼쳐서야 되겠나.”
“청유 형님이야 말로 상계를 관리하시면서 투자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것 같소.”
“이보게 이칠. 지금 자네가 내 앞에서 투자 운운할 처지인가? 사람에 대한 투자만큼 어려운 게 없다는 걸 정말 모르는가?”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노이칠이 손사래를 쳤다.
“그만합시다. 전서구나 내주시오.”
상관청유가 자신의 거처에서 전서구를 세 마리 잡아 왔다.
노이칠이 서신을 적어 각기 전서통에 넣고 매달았다.
세 마리를 보내는 것은 혹시나 중간에 매를 만나거나 적에게 잡힐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전서통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도 암어로 적혀 있으니 상관없지만 제때 연락이 가지 않는 건 곤란하다.
노이칠이 전서구를 날려 보내고 나오려는데 상관청유가 말했다.
“강소군이란 자가 내일 떠나겠다더군.”
노이칠이 흠칫, 상관청유를 돌아봤다.
상관청유는 자신의 서탁에서 장부를 펼쳐 보고 있었다. 고개도 들지 않고 지나가듯 말했으나 노이칠은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챘다.
“그에게 뭐라고 했소!”
“그가 먼저 알아서 떠난다더군.”
“오 각주!”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지도 않는구나!”
상관청유가 고개도 쳐들지 않고 말했다.
화가 난 노이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오 각주를 그야말로 군자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당신 같은 쫌생이도 없을 거요.”
노이칠의 거침없는 말에 상관청유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상인이 쫌생이 노릇하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에이, 말을 말아야지.”
노이칠이 상관청유의 집무실 문을 쾅, 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