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노이칠은 천성대와 조우했던 것을 상기하였다. 이자들은 확실히 천성대보다 강했다.
“특별한 놈들일 게야.”
노이칠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꺼림칙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천무방의 무력에 대해 다시 조사해 봐야겠다. 이놈들은 알려진 무력대가 아니야. 이런 놈들이 얼마나 있는 걸까?’
노이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경천승이 다가왔다.
피를 뒤집어쓴 얼굴이 악귀같이 보였다.
수하들이 죽어 나가자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기에 가장 많은 적을 죽이고 그 자신 또한 여기저기 도상을 입었다.
“시신을 모두 수습했습니다. 이놈들 또 어딨습니까?”
경천승의 눈에 광기가 어렸다.
일조에서만 네 명이나 죽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무래도 지원을 요청해야 할 것 같다. 합비로 연락을 해라.”
노이칠은 적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부상자는 시신을 수습하여 합비로 가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 안경성으로 간다.”
노이칠이 말에 올랐다.
***
안경성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성 밖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널따란 공지가 있었다.
스무 명가량의 흑의 복면인이 진을 짜고 서 있었다.
공지에는 말의 발목을 잡는 쇠질려가 깔려 있었다.
“훠어!”
강소군이 고삐를 채어 말을 멈춰다.
왼쪽은 연못이고 오른쪽은 빽빽한 숲이었다.
적은 여기서 결전을 벌이기로 한 모양이다.
뒤쪽에서 달려오는 적은 여섯 명.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말을 버려야 할 것 같군.”
장무강이 앞뒤의 적을 살피며 말했다.
‘스물여섯! 이쪽은 여섯!’
상황이 좋지 않았다.
대략 머릿수만 따져도 사 대 일의 싸움이 될 것이다.
한 차례 부딪힌 바로는 흑의 복면인들의 무공은 모두 일류였다.
물론 일대일로 싸운다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난전을 벌여야 한다.
모든 싸움이 그렇듯 승패는 무공의 수위로 결정 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난전은 더욱 그렇다.
장무강이 마을 쪽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모두 문을 걸어 닫은 듯 거리는 한산했다.
강소군에게 적이 몰리더라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 대 일 이상의 싸움을 치러야 할 것이다.
자신과 중랑은 몰라도 부상을 당한 심마백과 위응환, 연화심에게는 부담스러운 싸움이다.
장무강이 궁리를 하고 있는데 강소군이 말에서 내렸다.
모두가 의아하여 쳐다보는데 강소군이 말 등에서 장창을 뽑아 들며 말했다.
“말에서 내리지 마시오.”
강소군은 장창을 들고 앞을 가로막은 적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일정한 속도와 보폭이 싸우러 가는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흑의 복면인들이 말없이 도를 치켜들었다.
강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달리 살귀대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강소군은 쇠질려가 깔린 공지를 가운데 두고 스무 명의 적과 마주 섰다.
강소운은 창을 비껴든 채 가만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지?”
심마백이 혼잣말을 흘렸는데 위응환이 받았다.
“글쎄요.”
-파악!
강소군을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기음과 함께 강소군 주위의 공간이 울렁거리는 듯 보였다.
순간 강소군이 한 바퀴 회전을 하며 허공으로 솟더니 지면을 향해 창을 후려쳤다.
-콰쾅!
창에서 쏟아져 나온 기파가 땅바닥을 쳤는데 마치 폭약이 터지는 듯 굉음이 터졌다.
“창강(創鋼)!”
강소군의 창끝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강기가 분명했다.
검을 다룬 무사들이 평생 꿈꾸는 경지가 검강을 이루는 것이다.
검강을 이룬 자는 평생을 가도 만나기 어렵다.
하물며 창강이라니.
창으로 일가를 이뤘다는 심마백조차 기다란 창으로 강기를 펼치는 건 처음 보았다.
강소군은 연달아 세 번을 회전하며 강기를 쏟아냈다.
-쾅! 콰쾅!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비산하였다.
흑의 복면인들은 무지막지한 강기의 여파에 주춤 뒤로 물러났다.
“…!”
강소군의 놀라운 무위에 모두가 꼼짝도 하지 않고 보기만 할 뿐이었다.
비산한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공지는 마치 거대한 용이 할퀴고 간 듯 갈렸다.
흑의 복면인들이 깔아 놓았던 쇠질려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달려라!”
장무강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위응환의 말 엉덩이를 쳤다.
위응환의 말이 튀어나갔다.
위응환은 쇠뇌를 뽑아 화살을 걸었다.
번개 같은 손놀림이었다.
-슈슉!
위응환의 화살이 날자 흑의 복면인들이 감히 쳐내지 못하고 갈라졌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연화심과 중랑이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 말고삐를 채었다.
“막아라!”
흑의 복면인들이 몸을 날렸다.
-촤라락!
앞에 선 자의 등을 밟고 날아오른 흑의인들이 쇠줄에 달린 낫을 던졌다.
낫은 말의 머리와 다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조심해!”
장무강이 소리쳤으나 흑의인들의 수법이 너무나 빠르고 정확했다.
-히히힝!
위응환의 말에 쇠낫이 박혔다.
이를 본 연화심과 중랑이 말고삐를 채어 나가는 걸 멈췄다.
위응환이 말 등에서 굴러 땅으로 내려서며 허공에 뜬 흑의 복면인들을 향해 쇠뇌를 쏘았다.
-째쨍!
흑의 복면인들도 이번에는 대비하고 있었기에 화살을 쳐냈다.
-슈슉!
강소군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흑의 복면인들은 놀랍게도 쇠줄을 이용해 날아서 뒤로 물러났다.
그 사이 위응환이 착지하고 쇠뇌를 겨눴다.
강소군이 흑의 복면인들의 한복판으로 창을 겨누고 달려갔다.
강소군의 주위로 흑의 복면인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쇠사슬과 낫이 강소군을 향해 날아들었다.
“위험해요!”
연화심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흑의 복면인들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놀랍고 험악했다. 서로의 쇠사슬과 낫을 이용해 움직임의 변화를 더했다.
흑의 복면인들이 얼마나 연수합격에 능하고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 훈련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따당!
강소군이 낫을 쳐내며 공간을 확보하려 하였다.
네 명의 흑의 복면인이 쇠사슬과 낫을 휘두르고 있었고 두 명이 쇠뇌를 겨누고 다시 네 명이 사방에서 도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무려 열 명이 강소군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나머지 열 명은 연화심 일행을 향해 날아왔다.
-촤라락!
쇠사슬에 달린 낫이 먼저 날아왔다.
말과 사람을 동시에 노리는 수였다.
중랑이 말 등을 박차고 몸을 솟구치며 날아오는 쇠낫을 쳐내려 하였다.
그런데 쇠낫이 흔들, 하더니 살아 있는 뱀처럼 방향을 바꿨다.
쇠낫은 두 갈래로 나뉘어 중랑의 좌우에서 짓쳐 들었다.
걸리면 허리가 잘려 반토막이 날 판이다.
중랑이 허공에서 몸을 뒤채었다. 강소군의 신법을 보고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기에 가능한 움직임이었다.
중랑은 무학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하지만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만은 않았다.
회전이 약하여 쇠낫이 중랑의 허리춤을 스쳤다.
팍!
다행히 피륙의 상처로 끝났다.
“몸을 띄우지 마라! 응환, 자리를 잡아라!”
장무강이 크게 외쳤다.
난전에서 몸을 띄우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
허공으로 몸을 띄우면 적들이 착지할 곳을 미리 선점하여 기다리기 때문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장무강은 곧바로 말에서 뛰어내려 몸을 돌렸다.
뒤에서 달려드는 흑의 복면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슈슉!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이 먼저 날아오고 양쪽에서 두 명씩 짓쳐 들었다.
심마백도 말에서 뛰어내려 적을 막았다.
위응환이 중랑의 착지점을 선점한 자들에게 암기를 뿌렸다.
적들이 피하는 사이 중랑이 땅에 내려섰다.
“연 낭자! 이리로!”
위응환이 외치자 연화심이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위응환과 중랑, 연화심이 품자형으로 등을 지고 적을 상대하였다.
위응환도 허리춤에 찬 도를 뽑았다. 가느다란 환도가 하얗게 빛났다.
“제대로 한판 해보자고.”
위응환이 씨익, 웃으며 중랑을 보았다.
중랑은 후려쳐 오는 적의 도를 걷어내며 연화심에게 외쳤다.
“진형을 유지해라!”
세 사람은 방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적은 열 명이고 이쪽은 셋이다. 한 사람이라도 쓰러지면 나머지 둘도 곧바로 난도질당할 것이다.
-쨍! 째쟁!
장내에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근접전이 벌어지자 쇠사슬에 달린 낫을 던지던 자들도 도를 뽑아 달려들었다.
강소군의 창이 사방으로 비산하였다. 좌우로 흔들리는가 하면 위아래로 후려치며 낫을 쳐냈다.
적들은 강소군의 무위를 잘 알고 있는 듯 거리를 두고 가까이 오지 않았다.
간간이 화살이 날아와 강소군의 활동반경을 제약했다.
‘나를 붙잡아 두고 연화심을 노리는구나!’
적들은 영리했다. 일행의 약한 고리 연화심을 먼저 잡겠다는 것이다.
장무강과 심마백은 뒤쪽에서 오는 여섯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다.
개개인의 무공만 따지자면 산동삼호가 훨씬 윗줄이었지만 흑의 복면인들의 연수합격은 교묘하였다.
강소군은 상황을 파악하자 바로 결단을 내렸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쇠사슬을 피해 땅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헛!”
흑의 복면인 중 하나가 숨을 들이켰다.
대개의 무인은 땅바닥을 구르는 수를 선택하지 않는다. 치욕적이기도 하지만 한 번 몰리면 다시 공세로 전환하기 어려운 수비식이다.
강소군이 과감히 구르자 흑의 복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날려 찍으려 들었다.
순간 강소군이 풀쩍 날아오르며 창을 좌우로 흔들었다.
무려 일 장이나 도약하며 휘두른 창에서 핏빛 창강이 쏟아졌다.
“강기다! 피하라!”
누군가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콰강! 펑!
폭음과 함께 네 명이 나가떨어졌다.
가슴팍이 박살이 난 것이 절명한 게 분명했다.
강소군은 다시 풍차처럼 창을 돌리다 앞으로 쏘았다.
창이 일 장이나 길어진 듯 쭉 늘어나며 흑의 복면인 한 사람의 가슴을 꿰뚫었다.
강소군은 창을 날림과 동시에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는 그새 도가 들려 있었다.
“아앗!”
흑의 복면인이 당황하여 도를 걷어 올리려 했는데 어느새 강소군이 도가 지나갔다.
-쩍!
머리통이 정확하게 반쪽으로 갈라지며 흑의 복면인이 쓰러졌다.
강소군은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는 흑의 복면인의 손에 있는 도를 걷어찼다. 도가 날아가는 끝에 흑의 복면인 하나가 있었다.
-쨍!
그가 황급히 날아오는 도를 쳐내며 옆으로 몸을 비트는데 그 자리에 이미 강소군이 와 있었다.
-쿡!
강소군의 도가 흑의 복면인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일곱이나 되는 흑의 복면인이 당한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명의 흑의 복면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동시에 달려들어 강소군의 등과 허벅지 대혈, 그리고 목을 찌르거나 후려쳐 왔다.
옆구리가 찔린 흑의 복면인은 자신을 찌른 강소군의 도를 두 손으로 잡았다.
죽어 가면서도 동료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강소군은 미련 없이 도를 버리고 양쪽에서 오는 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머리로 오는 도를 잡아 끌어내리며 허벅지를 찌르는 자의 목에 꽂고, 허벅지를 노리는 자의 칼을 잡아 끌어올리며 머리를 노린 자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커윽!”
“큭!”
강소군은 양쪽의 도를 이용해 적을 격살하며 동시에 몸을 비틀었으나 등을 후려치는 도세를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됐다! 죽어라!”
흑의 복면인들은 교전하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들이 죽어 가며 만들어 준 기회로 강적을 잡게 되자 흑의 복면인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어쩌면 지긋지긋한 사신(死神)의 공포를 떨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사각!
도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사선을 그으며 강소군의 등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