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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칠이 준 환약은 무척 뛰어난 약효를 보였다.
강소군은 환약을 복용한 후 밤새 운기를 하여 내력의 절반 이상을 찾았다.
이대로 운기조식을 하며 백 일간 정양을 하면 요천루주로부터 입은 내상까지 완치할 수 있을 것이다.
요천루주의 무공은 무척이나 특이하였고 내력 또한 사이하였다. 사기나 다를 바 없는 요천루주의 내공이 침투하여 하단전 주위에 퍼져 있다.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며 내장이 나날이 굳어 가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강소군은 밤마다 금단진공을 운용하였다.
그런데 요천루 삼사가 찾아와 일전을 벌이는 바람에 또다시 내상을 입고 뒤이어 천무방과 연달아 벌인 격전에서 얻은 내상이 겹쳐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노이칠의 환약은 강소군이 입은 내상을 거의 바로 잡아 주었다.
다만 요천루주의 기운마저 몰아내지 못했다. 사기가 퍼져 내장의 기혈이 반 정도 굳은 듯했다.
“고맙소!”
강소군은 노이칠을 향해 짧게 한마디 하였다.
“공치사 받으려고 그런 건 아니네. 나도 살아야 할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바깥에 있는 개들이 흔한 똥개들이 아니더라고.”
노이칠이 바깥쪽을 향해 보며 말을 이었다.
“천무방에 숨겨 놓은 무력이 있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돌았네. 진짜 무력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지. 그중 하나가 자객들이라네.”
자객이라는 말에 강소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쫓는 이들의 기세가 남다르더라니 역시 살수들이었다.
“살귀대라고 하더군. 그놈들이 암약한다고 추측하긴 했는데 직접 마주치기는 처음이네.”
대정무각 십각은 각기 독립적이면서도 각자 역할이 약간씩 달랐다.
노이칠은 열 번째 각, 십각의 각주로 천하의 정보를 수집하고 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강소군이 물끄러미 노이칠을 바라보았다.
“왜 그리 보는가? 감격이라도 한 건가? 원래 내가 남을 감동시키는 능력이 좀 되지.”
노이칠의 뻔뻔스러운 넉살에 강소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 만에 웃는 웃음인가.
강소군이 시선을 돌렸다.
쉭 쉬쉭!
후원 쪽에서 검풍이 들려 왔다.
강소군이 천천히 건물을 돌아가니 연화심이 검을 수련하고 중랑이 지켜보고 있었다.
“화심아. 너무 무리하면 근골이 상해 역효과가 난다. 그만하자.”
“아직 육십사식을 모두 펼치지 못했어요. 한 번에 쭉 펼칠 수 있을 때까지 멈출 수 없어요.”
연화심도 중랑과 마찬가지로 천성검법을 익혔다.
중랑은 강소군의 도움으로 천성검법의 오의를 깨달아 일류에서 절정의 단계로 들어섰다.
오늘 새벽 연화심은 중랑에게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지적해 달라고 청했다.
연화심은 그동안 무공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무가의 자손이니 의례적으로 익혔던 것이다.
그런데 삼도문의 멸문 후 연화심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혹독하게 수련을 하고 있었고 중랑은 무리하지 말라고 말리는 중이다.
다른 사람의 수련을 훔쳐보는 것은 강호의 오랜 금기다.
강소군이 다시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연화심이 그 뒷모습을 보고 검을 멈췄다.
“강 대협!”
강소군이 몸을 돌렸다. 연화심의 크고 맑은 눈 깊숙한 곳에 한 가닥 독기가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길을 열어 주신 점 감사드려요. 덕분에 저와 화천대가 살아 삼도문의 맥을 잇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반드시 갚을 겁니다.”
연화심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
전날 연화심은 밤잠을 설쳤다.
강소군에 대한 원망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연화심은 강소군이라면 아버지와 숙부들을 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였다.
생면부지 남에게 그걸 따질 입장은 아니지만 잃은 사람이 피붙이이니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성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감정은 자꾸 엉뚱한 곳으로 치달았다.
연화심은 결국 새벽 수련을 하기 전 중랑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잘못일까요?”
중랑은 누군가를 연모해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남녀간의 정에 대해 알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연화심의 강소군을 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화심에게 강소군은 믿고 의지하고 싶은 남자였다.
그건 중랑 자신에게 보이는 믿음과는 다른 남녀간의 감정이었다.
그런 감정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마음은 그를 향하는데 또 다른 마음이 서운해하며 헛갈려 하는 것이다.
중랑은 분명히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심아. 그가 어찌했던 결과는 바꿀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장주님이 우원송에게 한 말을 기억해?”
삼도문을 나서 복건으로 향하던 황의채 일행이 응천대 우원송의 매복에 걸려 되돌아 왔던 날.
연성결은 우원송을 향해 말했다.
‘내가 직접 천무방주와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그에게 전하라. 기다리겠다고.’
“장주님의 말은 홧김에 순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중랑이 말을 이었다.
“천무방이 삼도문의 완전한 굴종을 원하는 한 장주님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는 강소군이 방수로 나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
연화심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천무방주와 사생결단을 치르겠다고 했으니 남의 도움을 얻어 도주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강소군이 돕겠다고 했어도 장주님은 천무방주와 직접 대결을 하셨을 것이야.”
한참을 생각하던 연화심이 마음을 정리하고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중랑이 담담하게 웃었다.
“네가 고민을 감추지 않고 말해줘서 오히려 내가 고맙다.”
***
강소군은 연화심이 정중히 치하하자 내심 당황스러웠다.
그는 그대로 일종의 부채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그가 천무방의 삼 공자 구양운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흘러오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 이후 책임의식을 떨치지 못했다.
일의 선후를 따지면 그보다 구양운이 자초한 일이기는 하지만 강소군은 원래 책임을 남에게 미루기보다는 스스로 감당하는 성격이었다.
‘오라버니는 사람이 너무 좋아. 나한테만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장영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 왔다.
연화심에게 치하를 받자 문득 옛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의 본래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다정다감했다.
그를 아는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냉혈한! 살인귀!’
적들은 치를 떨며 피를 뿌리고 죽어 갔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피냄새를 느끼는지 그를 꺼려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백륭사 주지 철우 대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신강삼랑을 죽였을 때 철우대사는 그를 붙잡고 보름이나 닦달을 하였다.
‘미물의 목숨을 거두는 것도 죄를 짓는 것이거늘 대체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시오.’
그의 성격이 냉혹하게 바뀐 것은 무총에서 보낸 나날 때문일 것이다.
적도 아군도 없는 죽음의 공간에서는 인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강 대협?”
연화심은 강소군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아무래도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불렀다.
‘아!’
그제야 강소군이 무총의 기억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감사받을 일은 아닌 것 같소.”
강소군이 마주 포권하며 나직하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
바깥채 식청에서 장무강과 노이칠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을 나누고 있었다.
“아. 강 소협! 이리 오시오!”
노이칠이 강소군을 향해 손짓을 하였다.
장무강에게 강소군의 이름을 얻어들은 모양이다.
강소군이 다가가 식탁에 앉았다.
노이칠이 술을 따르는데 반쯤만 따랐다.
“노 형, 그게 뭐요? 사내라면 잔이 철철 넘치게 따라야지.”
장무강이 노이칠이 따르는 걸 보고 타박하였다.
“아, 이 사람아. 지금 강 소협은 환자란 말일세.”
과묵한 장무강과 수다스러운 노이칠은 의외로 죽이 맞았다.
그새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나 보다. 노이칠이 장무강보다 두 살 위라고 형 노릇을 자처했다.
심마백과 위응환은 주위를 살피러 나갔고 조운룡 또한 보이지 않았다.
“도룡회 삼공자는 잠꾸러기인 모양이야.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네.”
노이칠은 강소군의 이름을 알아냈기에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정보망에 강소군을 올리면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
궁금한 건 못 참는 노이칠이 대정무각의 정보망 역할을 맡은 건 천직이랄 수 있었다.
“그럼 아예 따르지를 말아야지.”
장무강이 토를 달자 노이칠이 너스레를 떨었다.
“강 소협 덕분에 그 유명한 산동삼호를 만났지 뭔가. 고마워서 한 잔 따르는 것이네.”
자신을 치켜세우자 장무강이 쑥스러워하였다.
“보잘것없는 별호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더 놀랍소.”
“무슨 소리인가? 산동삼호의 협행은 아직도 산동지방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네.”
노이칠이 정색을 하더니 강소군에게 말했다.
“몇 년 전 산동에 흉년이 들어 농민 봉기가 일어났네. 탐관오리의 수탈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네.”
노이칠이 당시를 거론하자 장무강이 술을 한 잔 들이켰다.
옛 생각이 난 모양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오히려 탐관오리의 말만 믿고 관군을 보내 농민들을 진압하려 들었네.”
대정무각의 십각주답게 노이칠은 수년 전 일임에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관군이 마을 하나를 포위하고 학살을 하려 들었지. 봉기를 주도한 자가 숨어들었다는 이유였거든.”
장무강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있었소.”
“그때 세 사람의 영웅이 나타난 거야. 수백 관군을 세 사람이 막아선 것이지.”
“수백은 아니고 수십 명이었소.”
고지식한 장무강이 떨떠름해하면서 고쳐 주었다.
“커흠. 수십 명 뒤에 다시 수백 명이 있었으니 수백 명이 맞지. 너무 겸양을 떠는 것도 좋지 않은 거야.”
노이칠이 장무강의 말을 끊고는 열변을 이어갔다.
“세 협객이 관군을 막아선 사이 마을주민들은 무사히 몸을 빼내 농민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네. 그 후로 산동지방에 세 호랑이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
“우리만 나선 것이 아니었는데….”
장무강과 의제들이 나서자 농민군도 반격의 실마리를 잡고 관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자네는 가만있으래도. 세상이 그렇게 알고 있다면 그런 건 거야. 아무튼 대협객 산동삼호를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놀랍지 뭔가.”
노이칠은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삐걱.
조운룡의 객방 문이 열렸다.
조운룡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물었다.
“산동삼호라고 하였소?”
노이칠의 목소리가 커서 조운룡의 객방까지 들렸나 보다.
조운룡이 느닷없이 다가와 묻자 장무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세 형제를 강호에서 산동삼호라고 하네. 우리에게 볼 일이 이는가?”
장무강의 말에 조운룡이 허리를 꾸벅 숙이며 포권을 하였다.
“평소 산동삼호의 명성을 앙모하였던 바, 고인이 계셨는데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뜻밖에도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조운룡을 보고 노이칠이 놀랐다.
“네가 웬일이냐? 이렇게 예의 바른 모습은 처음이네?”
조운룡이 노이칠을 흘겨보고는 다시 말했다.
“산동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산동삼호의 협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본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허허. 이거 참. 아침부터 얼굴에 금칠을 하니 쑥스럽군.”
장무강이 마주 포권을 하였다.
이를 보는 노이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도룡회의 본거지가 산동이라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