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강소군은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곧장 산 하나를 올랐다.
산 정상에서 보니 아래로 야트막한 산과 들, 호수가 보이고 그 끝에 뱀처럼 휘어진 기다란 강이 보였다.
강이 흘러가는 왼쪽 끝으로 커다란 도시가 보였다.
강소군은 거침없이 직진을 하여 산을 내려갔다.
절벽이 나오면 그대로 뛰어내리는 무식한 산행이다.
뒤따르는 노이칠과 조운룡은 죽을 맛이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노이칠이 연신 투덜거렸다.
제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내공에는 한계가 있다.
뒤에 강적이 따르는데 한정 없이 무리하게 경공을 펼칠 수는 없었다.
노이칠과 조운룡이 간신히 산을 벗어났을 때 강소군은 이미 들을 지나 맞은편 야트막한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저 사람 정말 부상당한 거 맞나?”
조운룡도 기가 차서 한마디 하였다.
어제 천무방과의 싸움에서 탈진한 걸 분명히 보았다. 그런데 하룻밤 자고 났다고 저렇게 갈 수 있다니.
그들이 몰랐지만 강소군은 금단진공을 운용하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내력이 간간이 끊겨 고통이 전신을 파고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천무방 살귀들의 움직임을 보고 당분간 공격은 없을 것이란 판단을 했다.
그렇다면 한시바삐 목적지로 가서 운기요상을 하는 편이 나았다.
그의 머릿속 지도에 의하면 강가의 도시는 안경이었다.
큰 도시이니 약재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소군은 해가 지기 전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다.
***
간신히 걸려 있는 낡은 현판에 평안객잔이라 쓰여 있다.
안경 외곽 허름한 객잔이다.
현판이 걸린 문과 붙어 있는 바깥채를 지나면 너른 마당이 나오고 좌우로 각기 객방 셋이 있는 건물이 마주하고 있다.
중랑이 왼편 가운데 객방에서 나와 바깥채로 들어갔다.
바깥채는 주인의 거처와 주방 그리고 거실로 이뤄져 있었는데 거실에 기다란 탁자가 하나,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둘 놓여 있었다.
기다란 탁자에는 산동삼호가 이미 자리를 잡고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새벽에 당도한 일행은 온종일 쉬면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구해 왔네. 밤이 내리면 떠나기로 하세.”
장무강이 말하며 술잔을 건넸다.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밤길을 이용하기로 상의를 한 바 있다.
중랑이 술잔을 받아 쭉 마시고는 주방을 돌아봤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나 보더라고. 음식을 해 놓았으니 가져다 먹으라잖아. 이런 객잔은 처음일세.”
전직 객잔 숙수였던 장무강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중랑이 음식을 챙겨 쟁반에 담아 연화심의 방으로 갔다.
“아가씨.”
“들어오세요.”
연화심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중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화심이 자신의 목소리를 모를 리 없는데 존대를 하다니.
중랑은 혹시 몰라 오른손을 검자루로 가져가고 왼손으로 음식 쟁반을 들었다.
중랑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연화심은 객방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중랑이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아무 이상이 없자 탁자에 쟁반을 놓았다.
‘잘못 들었나 보군.’
중랑은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여겼다.
“저녁 드세요. 어두워지면 떠나야 합니다.”
연화심이 쟁반을 살짝 밀치고 중랑에게 말했다.
“잠깐 앉아 보세요.”
중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서요.”
연화심의 재촉에 중랑이 탁자에 앉았다.
연화심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중랑에게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절을 하였다.
“아가씨, 왜 이러십니까?”
중랑이 연화심을 만류하였으나 끝끝내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자리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중랑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죽었을 거예요.”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자 중랑은 어색하기만 하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가씨? 괜찮아요?”
중랑은 연화심이 연이은 고초에 혹시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염려하였다.
구강에서 내려 산길로 오다 삼도문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았다.
예상대로 연성결과 의형제들은 구연강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죽었다.
연화심은 그 소식을 들은 후 말을 잃었다.
“아가씨.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중랑이 안타까워하며 달래는데 연화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주 정신이 맑아요. 이제야 알겠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
“삼도문은 멸망했어요. 삼도문의 아가씨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오로지 연화심이라는 사람만 있을 뿐이죠.”
연화심의 목소리는 차분하였다.
“실은 전부터 이러고 싶었어요. 어려서부터 친오라버니처럼 저를 돌봐주었지요. 저는 한 번도 오라버니를 아랫사람으로 생각지 않았어요.”
중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심은 늘 자신을 따르고 존중하였다.
“오라버니는 삼도문의 하인이 아니라 손님이었어요. 아버지도 그렇게 여겼고요.”
“연 문주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이에 보답하지 못한….”
“아뇨! 오라버니는 충분히 하셨어요. 악양에서 저를 몇 차례나 구해 주셨잖아요. 아버지도 감사해할 거예요.”
연화심은 중랑의 말을 자르고 계속 이어갔다.
“이제 삼도문도 연 아가씨도 없어요. 오라버니께서 저를 보면 누이가 떠오른다고 하셨지요. 오라버니만 허락한다면 의남매를 맺고 싶어요.”
“….”
“원치 않으신다면 앞으로는 중 소협으로 부르겠어요.”
연화심은 삼도문의 멸문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였다.
중랑과의 관계도 다시 정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중랑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도 될지는 모르지만….”
중랑이 잠시 망설이다 연화심의 뜻을 받아 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늘 아가씨를, 아니 너를 친누이처럼 여겨왔다. 굳이 의남매를 맺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누이나 마찬가지다.”
중랑의 말에 연화심이 눈물을 글썽이더니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절을 하였다.
“오라버니, 화심의 절을 받으세요.”
중랑도 일어나서 맞절을 하였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를 지킬 것이다.”
중랑은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처음 기회는 자신이 너무 어리고 힘이 없었다. 누이가 죽어 가는 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아니, 반드시 다를 것이다. 고맙구나.’
중랑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중랑은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어서 저녁을 먹어라. 자시가 머지않았으니 갈 준비를 해야겠다.”
중랑은 격동하는 마음을 다스리고자 연화심의 객방을 서둘러 나왔다.
“무슨 일이 있는가?”
마침 심마백이 뒷간에서 나오다 중랑을 보고 물었다.
중랑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 걸 본 것이다.
“아닙니다. 하루살이가 눈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하하. 자네도 참 실없군. 자네 같은 고수가 하루살이에게 당했다는 말인가?”
심마백이 껄껄 웃고는 다시 바깥채로 들어갔다.
중랑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싸늘한 겨울 달빛이 오늘은 왠지 푸근하게 다가왔다.
그 달빛을 중랑은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왜 그렇게 푸근했는지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천애고아로 세상을 떠돌던 자신에게 가족이 다시 생긴 밤이었기에. 그리하여 달빛이 그리도 푸근했음을.
***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이 되어서야 안경 외곽에 당도하였다.
안경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객잔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달린 현판이 달빛에 빛났다.
평안객잔.
“성문이 닫혔을 것이네. 여기서 묵는 게 어떤가?”
노이칠은 당장이라도 들어가 따뜻한 음식과 술을 마시고 싶었다.
조운룡이 뒤를 돌아보았다.
살귀들은 여전히 삼십 장에서 오십여 장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놔두게. 아마도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네. 괜히 먼저 싸움을 걸 필요는 없지.”
“한가한 소리 아니오? 이러다 포위망에 걸릴 게 분명하오.”
“크흐흐. 호북이라면 천무방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는 곤란하지.”
노이칠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연통을 받고 대정무각의 무사들이 오고 있을 것이다.
안경은 안휘성의 서북단으로 호북과 하남의 경계에 있다.
천무방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다.
“자네는 도룡회 삼공자씩이나 되는데 호위도 없나?”
노이칠이 조운룡에게 물었다.
조운룡이 자신의 도를 들어 보였다.
“이게 나의 호위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루 사이에 두 사람은 제법 말문을 트는 사이가 됐다.
주로 노이칠이 말하면 조운룡이 응대하는 수준이기는 했지만 서로를 경계하는 분위기는 확실히 누그러들었다.
어쩌면 강소군 덕분인지도 몰랐다.
강소군은 두 사람이 따라오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도룡회와 대정무각 사람임을 밝혔는데도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
적도 아군도 아닌 그저 길손처럼 두 사람을 대했다.
두 사람도 서로에 대해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안객잔으로 다가가던 강소군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객잔의 옆문이 열리며 몇 사람이 말을 끌고 나오다 강소군을 보고는 멈췄다.
“강 대협!”
연화심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강소군은 순간,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는 안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남경으로 갈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연화심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긴 했다.
왜 그런 기대를 했을까.
노이칠은 연화심과 화천대가 장강 쪽으로 갔다고 했다.
강소군은 당연히 장강을 따라 내려갔을 거라 여겼다. 적 또한 이를 알고 추적을 하리라 여겼고.
그게 염려가 되어 이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내가 왜 연 낭자를 걱정하였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더 급한 건 닥친 상황이었다.
강소군은 본의 아니게 적을 연화심에게 끌고 온 셈이다.
화천대는 보이지 않았다. 연화심과 중랑, 산동삼호뿐이다.
강소군은 화천대가 적을 유인하고 이들이 따로 빠져나가는 중이었음을 대번 알 수 있었다.
“후우.”
강소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미련이 엉뚱하게도 연화심을 다시 위험에 빠뜨린 것이다.
“강 협이 어떻게 알고 왔는가?”
장무강이 강소군의 뒤에 선 노이칠과 조운룡을 경계하며 다가왔다.
강호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아군에서 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모르는 자와 함께 있으니 자연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이칠은 자연스레 서 있었으나 조운룡은 장무강의 기세에 흠칫, 경계하며 허리에 찬 화룡도를 잡았다.
“쉬러 온 것뿐이오. 그런데 밤길은 가지 않는 게 좋겠소.”
강소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뜻인가?”
장무강이 노이칠과 조운룡을 경계하며 말했다.
“적이 따라오고 있소.”
적이란 말에 장무강은 물론이고 심마백과 위응환, 중랑의 안색이 바뀌었다.
세 사람은 황급히 주변을 살피며 말을 객잔으로 몰아넣었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경계할 건 없소. 저놈들은 개처럼 졸졸 따라오고 있을 뿐이니까.”
노이칠이 넉살 좋게 나서서 말했다.
“당신은 누구요?”
장무강이 은근히 내력을 끌어올려 물었다.
“나는 떠돌이 상인….”
“그는 대정무각 십각의 각주요!”
노이칠이 둘러대려는데 조운룡이 대뜸 신분을 밝혔다.
‘저 자식이?’
노이칠이 눈을 흘겼으나 이미 산통이 다 깨졌다.
“그렇다고 하는구려.”
노이칠이 투덜대며 시인하자 장무강은 더욱 경계하였다.
“대정무각 십각! 범상치 않은 분을 만났구려.”
“범상치 않기는. 알고 보면 아주 평범한 떠돌이에 불과하다오. 정말 범상치 않은 분은 저기 있는 놈이요.”
노이칠이 조운룡을 가리켰다.
존대와 비하를 동시에 쓴 걸 보면 심사가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게 분명했다.
조운룡이 눈알을 부라렸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분이 바로 도룡회 삼공자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