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배는 무심한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연화심은 뱃전에 앉아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이 보석처럼 빛났다.
그러나 연화심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게 침침해 보였다.
장무강이 다가왔다.
“연 낭자. 이러다 몸 상하겠네. 장주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지켜야 할 걸세.”
연화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반드시! 반드시 내 손으로 천무방을 없애고 말 거예요.”
연화심이 얼굴에 독기가 가득했다. 사람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니.’
장무강이 속으로 탄식하였다.
연화심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천무방을 없애겠다니.
스스로 명줄을 끊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장무강은 과연 연화심의 목숨을 끝까지 지켜 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아비를 잃고도 절망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독기를 세우는 걸 보니 기특하기도 했다.
‘연 문주. 당신 딸은 나약한 어린아이가 아니오. 너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시오.’
장무강은 연성결의 생사를 듣지는 못했지만 이미 죽었을 것이라 단정하고 있었다.
중랑이 다가왔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장무강이 중랑을 데리고 배 뒤로 갔다.
“화천대가 적을 유인하였지만 장강 쪽에도 추적이 들어올 걸세.”
천무방 정도 되는 방파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화천대를 따라붙은 적들이 연화심이 없다는 걸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다.
“적당한 곳에서 육로를 택하는 게 좋을 것 같네만.”
중랑도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타고 있는 배는 적을 막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자신이나 산동삼호나 강에서는 제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저 앞이 구강입니다. 큰 현이니 오늘 밤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세.”
장무강은 심마백과 위응환에게도 준비하라 일렀다.
구강현은 장강과 파양호가 만나는 길목에 있어 상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아 행적을 지우기에도 용이했다. 그런 만큼 적 또한 주시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중랑이 지도를 가져와 펼치며 산동삼호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들은 우리가 남쪽으로 가고 있을 거라고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어찌 됐든 화천대와 합류할 거라고 보고 있겠지.”
“강북에 내려 육로를 이용하여 장강을 따라간 다음 황산을 돌아 내려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너무 멀리 도는 게 아닌가?”
“대신 그만큼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중랑에게는 연화심이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실 복건까지 적이 쫓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빨리 갈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하세.”
장무강이 고개를 동의하였다.
그날 밤.
구강현 맞은편 장강 북쪽에 내린 일행은 산길을 이용해 안경으로 향했다.
***
“허어! 고 대주가! 정녕 고 대주가 당했단 말이냐!”
조개량이 크게 놀라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쩌다 그리됐단 말이냐? 막기만 하라고 했는데!”
“놈이 밀고 들어왔습니다.”
부복한 전령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보고하였다.
“허어!”
조개량은 난감해하였다.
응천대주 우원송에 이어 천성대주 고경염까지 죽었다.
며칠 사이 무력대의 대주를 둘이나 잃은 것이다.
조개량이 심복에게 물었다.
“살귀들은 어떻게 됐느냐?”
“육안 쪽에 풀어두었습니다.”
조개량이 지도가 펼쳐진 탁자 위를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자가 왜 산길을 택한 것일까. 굳이 산을 넘어 신양을 왔다가 다시 산을 넘는다?’
물론 추적을 뿌리치기에 산이 유리하긴 하다. 하지만 이자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산들이 굽이친 아래 장강이 보였다.
‘장강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천성대주의 죽음을 방주에게 고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살귀들을 붙여. 일단 뒤를 따르라고만 해!”
더 이상 전력손실을 입을 수 없었다. 이러다가 천무방의 원기를 다칠 수도 있었다.
***
타탁 타탁.
생 나뭇가지가 타들어 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겨울 산은 황량하였다. 강소군은 삼 장 절벽을 등지고 불을 피웠다. 어차피 외길이라 적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다.
차라리 몸을 먼저 회복하는 게 우선이었다.
크르르.
뒤쪽 절벽 위에서 나직한 짐승울음이 들려 왔다.
올려다보니 어둠 속에서 퍼런 불이 번뜩인다. 혈향을 맡고 범이 찾아온 것이다.
강소군이 피운 모닥불은 일장 주위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범은 절벽 위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범은 굳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강소군의 혈향을 맡고 왔다면 인육을 먹어 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겨울 산에서 먹이를 찾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강소군이 등에 맨 창을 풀었다.
몸이 정상이라면 범을 막는 데 굳이 무기까지 들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창의 날카로움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다.
범은 영리했고 기다릴 줄 알았다. 사람을 사냥해 본 경험이 있는지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강소군은 창을 옆에 꽂고 운기에 들어갔다.
범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상을 조금이라도 다스려야 했다.
-저벅, 저벅.
누군가 산길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산길임에도 걸음은 일정하였다.
강소군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한 사람이 산길에서 접어들어 강소군이 모닥불을 피운 공지로 들어왔다.
허리에 도를 찬 젊은 낭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모닥불가에 앉았다. 그러더니 메고 온 등짐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낭인의 손에 잡힌 것은 말린 고기였다.
낭인은 말린 고기를 쭉 찢더니 모닥불에 구웠다.
크르르.
고기가 타는 냄새가 나자 범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높아가더니 기어이 포효를 터뜨렸다.
크어헝!
그러나 젊은 낭인도 강소군도 꿈쩍하지 않았다.
범은 낭인이 뿜는 기세에 달려들지는 못하고 위협만 할 뿐이었다.
낭인은 구운 고기를 강소군에게 던졌다. 고기는 정확히 강소군의 무릎에 떨어졌다.
“도주를 하면서 건량도 챙기지 않다니. 귀하게 자란 모양이군.”
젊은 낭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소군이 피식, 웃었다.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한 척하는 모습에서 누군가가 생각났던 것이다.
젊은 낭인은 이십 초반. 그보다 서너 살은 아래로 보였다.
***
동북 변방의 칼바람은 살을 에인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전투는 지리하게 이어졌고 사상자는 나날이 늘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에 적도 아군도 지쳐갔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병사들만 부질없이 죽어 나갔다.
죽어 나간 병사들을 대신하여 오는 보충병들은 언제부터인가 늙거나 어렸다.
마운산은 열여섯이었다.
덩치는 제법 컸지만 어딘가 모르게 애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센 척, 포악스럽게 구는 녀석이었다.
오자마자 마흔이 다 되어 가는 고참 병사하고 드잡이질을 하였다.
그 이유가 어이없었다.
자신을 보는 눈이 고까웠다나.
***
‘마운산이 살아 있다면 저 나이겠군.’
강소군이 고기를 집어 씹었다.
그는 며칠을 먹지 않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내상을 다스려야 하는 지금 위에 무리를 주는 건량이 좋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천천히 건량을 씹었다.
순전히 젊은 낭인이 마운산을 연상케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강소군이 건량을 씹자 젊은 낭인의 전신에 어렸던 어색한 긴장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자신이 준 걸 의심 없이 먹는 걸 보고 마음을 푼 것이다.
젊은 낭인이 느닷없이 물었다.
“왜 웃은 것이오?”
“누가 생각나서.”
강소군이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상대의 말을 받아 준 게 참 오랜만이다.
낭인이 마운산을 떠올리게 한 것 때문일까.
젊은 낭인이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모닥불에 던져 넣었다.
“웃음을 짓게 만들다니... 좋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오.”
마운산이 좋은 놈이었던가?
강소군은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뭐라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늘 싸움을 벌이고 사고 치기 일쑤였던 녀석이다.
전장에서는 가장 앞서 달려가고 끝까지 뒤에 남았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의외였다.
‘내 뒤에 남은 놈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니 왜 안 되냐고 물을 수 없었다.
마운산이 속한 조는 그래서 죽은 사람은 있어도 포로로 잡혀간 이는 없었다.
“왜 따라온 건가?”
“당신이 앞에 있었을 뿐이오.”
너무나 뻔히 거짓임을 알 수 있는 말을 이렇듯 태연하게 하는 것도 마운산과 비슷하다.
“살귀들이 오고 있소.”
“살귀?”
“천무방의 개들이오.”
젊은 낭인의 목소리에 증오가 어려 있다.
강소군 역시 삼십여 장 주위에 웅크리고 있는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어둠 속의 살귀들은 기세를 감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듯 살기를 흘렸다.
-저벅 저벅.
살귀들이 뿜어낸 살기를 가르고 한 사람이 산길을 올라왔다.
등에 봇짐을 멘 상인은 노이칠이었다.
노이칠이 모닥불을 보고 다가왔다.
“으흐흐. 이 추운 산속에서 불을 보다니. 임을 만난 것보다 반갑군.”
노이칠이 너스레를 떨며 모닥불 한쪽에 앉았다.
세 사람은 자연히 품(品)자형을 이뤄 앉은 형국이 되었다.
젊은 낭인은 노이칠이 나타나자 입을 닫았다.
“우리가 인연이 참 깊군. 화양객잔의 손님들이 산속에서 한자리에 모이다니. 이런 인연이 어딨겠나. 통성명이라도 해야 않겠나?”
노이칠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노이칠이라 하네.”
노이칠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음에도 강소군이나 젊은 낭인은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입이 무겁군.”
“이름이 아니라 신분을 밝혀야 하는 게 아닌가?”
젊은 낭인이 퉁명스레 말했다.
“신분? 차나 사고파는 상인에게 따로 내세울 만한 신분이 있겠나?”
“흥!”
낭인이 코웃음을 치자 노이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밝힐 만한 신분이라면 도룡회의 화룡도(火龍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천하사패 도룡회주의 셋째 제자이니 말이지.”
젊은 낭인의 눈빛에 붉은 살기가 올랐다.
“입이 화를 부른다는 말 못 들었소?”
주위의 한기만큼이나 싸늘한 어조다.
화룡도 조운룡. 젊은 낭인의 이름이었다.
도룡회주의 셋째 제자로 도를 휘두를 때마다 붉은 화염이 인다고 하여 붙은 별호다.
“어린놈이 성깔하고는.”
노이칠은 개의치 않았다.
그 한마디에서 노이칠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대정무각은 모두 당신처럼 무례한 것인가?”
조운룡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노이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알고 있었군그래.”
모닥불을 주시하던 강소군이 시선을 들어 노이칠과 조운룡을 번갈아 보았다.
대정무각과 도룡회!
두 세력은 하남과 강소에서 영역 다툼을 벌이고 있다.
나머지 이패, 천무방과 요천루 때문에 전면전에 나서지는 않고 있지만 물밑 신경전은 치열하다.
강소군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두 사람이 서로 적대관계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찾아온 거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