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천무방 천성대주 고경염은 산기슭에 서서 강소군을 내려다보았다.
“으음.”
먹잇감을 두고도 먹지 못하는 야수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를 막아 계곡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그러면 살귀대가 붙어 토끼몰이를 할 것이다.
‘정말 방주의 뜻일까?’
그에게 내려온 첩지에는 신기수사 조개량의 인이 찍혀 있었다.
이번 삼도문 정벌은 방주의 친정이다.
최종 지휘권은 방주에게 있다는 뜻이다.
조개량이 천무방 군사이기는 하지만 구연강을 대신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고경염은 살귀대의 뒤나 봐주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천무방 내원의 주력 천성대의 대주로 살귀대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살귀대 자체를 탐탁지 않아 하는 무인이다.
살귀대는 비슷한 일을 하는 암천대와도 또 다르다.
정식 편제에 없는 무력이다.
‘암살이나 하는 자객일 뿐!’
고경염은 강소군과 정면으로 맞붙고 싶었다.
응천대와 흑마대가 형편없이 깨져 나갔으나 천성대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고경염이 갈등을 하는 사이 전령이 달려왔다.
“부차격 조장과 세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중경상자가 일곱입니다.”
“뭐라고?”
고경염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도를 쥔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도 자루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차격이가, 정말 차격이가 죽었단 말이냐?”
부차격은 그가 아끼는 수하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놈이 아니다.
순간 고경염의 결심이 섰다.
‘저놈은 반드시 내가 죽인다!’
마침 잠시 멈칫했던 강소군이 그대로 직진해 왔다.
강소군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계곡에 숨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살기를 드러냈다는 사실에 유의하였다.
열여섯 나이부터 변방 전장을 누볐던 그다.
적이 일부러 살기를 드러냈다는 건 길을 돌리라는 뜻이다. 물러나면 그들의 함정에 떨어진다. 죽을 길이 곧 살 길이다.
강소군은 그대로 돌파할 작정이다.
강소군의 말은 얼마 가지 않아 다시 멈춰 섰다.
수레 하나가 올라갈 만한 길이 개천을 따라 이어지는데 그 복판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커다란 대검을 든 무인이었다.
무인의 뒤로 얼핏 보기에 수십은 되어 보이는 무사들이 도와 검 등을 들고 막고 있었다.
양쪽 기슭의 수풀이 흔들리는 걸로 보아 그쪽에도 매복이 있다고 봐야 했다.
계곡이 좁으니 그야말로 한 사람이 백 명을 막을 수 있는 요지였는데 거꾸로 수십 명이 한 사람을 막고 있다.
대검을 둔 무인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네놈이 삼공자를 해쳤느냐?”
강소군은 말에서 내리더니 창을 뽑아 비스듬히 등에 맸다. 그러고는 부차격에게서 뺏은 도를 손에 들었다.
수림이 많은 산속에서 싸우자면 창보다 도가 유리했다.
강소군은 밤새워 금단진공을 운기하여 삼성 가량의 내력을 모을 수 있었다.
상처는 돌보지 않고 오로지 축기에만 몰입하여 내력을 쌓았으나 눈앞의 적들을 모두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네가 부차격을 죽였느냐?”
고경염은 강소군의 손에 들린 도를 보고는 이를 갈며 다시 물었다.
사실 물으나 마나 한 일이다.
어느 무인이 자신의 무기를 남에게 건네겠는가.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
고경염이 살심을 굳히고 한발 내디뎠다.
강소군이 말 엉덩이를 쳐서 쫓았다. 퇴로는 생각지 않겠다는 뜻이다.
강소군은 도를 뽑더니 길게 늘어뜨리고는 천천히 산길을 올라왔다.
-차라라락.
땅에 끌린 도끝이 돌에 부딪히며 불꽃이 일었다. 도에 경기가 어려 있다는 의미다.
무기를 아끼는 무인들이 보면 눈살을 찌푸릴 행동이다.
고경염은 부차격이 끌려오는 듯한 느낌에 더욱 분노가 폭발하였다.
하지만 그는 천성대의 대주였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생사지경을 넘나든 적이 수십 번이다.
그때마다 살아남았던 것은 조심성 덕분이었다.
그는 우원송처럼 혼자 상대하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
“쳐라!”
고경염이 대검을 쳐들자 양쪽 기슭에서 무사들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고경염의 뒤에 있던 수십 명의 무사들이 이열로 줄지어 강소군을 포위하려 들었다.
강소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포위당하겠다는 듯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천성대 무사들은 강소군을 가운데 두고 진을 형성하였다.
사방을 포위하기는 했으나 수레 하나 지나갈 산길이라 완벽한 진형을 이룰 수는 없었다.
-쉬이익!
-쉭!
강소군의 정면으로 검이 찔러 오고 옆으로 도가 베어왔다.
천성대는 오십 명의 도수와 역시 오십 명의 검수로 이뤄져 있다.
검수와 도수가 한 조를 이뤄 찌르는 검과 베는 도의 절묘한 배합으로 적을 해치운다.
강소군이 끌고 오던 도를 올려쳤다.
도와 검이 한 칼에 튕겨 나갔다.
순간 강소군이 몸을 돌리며 쳐들은 도를 횡으로 내리쳤다.
“크윽!”
검수와 도수가 각기 복부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강소군은 이어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도광이 번뜩였다.
일대혼전이 벌어졌다. 강소군의 도는 천성대 무사들보다 정확히 반 박자 빨랐다.
도세가 물 흐르듯 이어지고 그 끝에 천성대 무사들의 몸이 있었다.
놀랍게도 강소군은 수십 명의 천성대 무사들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다녔다.
“저놈! 저….”
고경염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었다.
‘설마 흑마대주가 거짓을 이야기했단 말인가?’
고경염이 정면승부를 택한 이유는 상대가 부상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흑마대주 위평은 그와 친분이 있었다.
그가 분명히 말했다.
옆구리에 한 칼을 먹였고 허벅지와 어깨에도 수리검을 박았다고.
흑마대 팔할 가까이 사상자가 나왔는데 고작 그 정도밖에 피해를 입히지 못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위평은 그 정도도 큰일을 한 것처럼 말했다.
‘인간이 아니야. 살귀였어.’
멍하니 되뇌던 위평.
두 눈에 공포가 스치던 것이 생각났다.
고경염은 위평의 말을 실감하는 중이다.
산길은 어느새 피로 덮이고 떨어진 팔다리와 구르는 머리통으로 지옥도를 방불케 하였다.
‘그, 그만…!’
고경염은 자기도 모르게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무수한 전장을 누빈 그로서도 이렇듯 처참하고 일방적인 싸움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조개량의 말을 따르지 않은 걸 후회하였다.
애초에 그가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멈춰라!”
고경염이 고함을 질렀다.
천성대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로 빠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진작 도주하고 싶었는데 공포에 질려 오히려 불나방처럼 달려든 것이다.
고경염의 고함에 정신을 차리고 물러난 천성대원들은 주위를 돌아보며 참담한 심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크흐흐. 과연 듣던 대로군.”
고경염이 대검을 세우고 강소군에게 다가갔다.
그는 우원송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순식간에 대원을 삼 할을 잃었다. 한 사람에게 이런 대패를 당하고도 대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고경염은 자신의 화려했던 경력이 끝장났음을 절감했다.
이제 남은 건 저놈과의 마지막 승부다.
강소군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득한 핏덩이 하나가 도 끝에 매달려 있다.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도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을 것이다.
피로 점철된 도가 오히려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다만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고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도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적의 수장이 대검을 들고 다가왔다. 기세가 만만치 않다.
이제까지 만난 천무방 무인들 가운데 운살이라고 한 자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자다.
“나를 죽여야만 이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고경염이 대검을 세웠다.
보통 검보다 한 자가 더 길고 폭도 세 치가 넓었다.
강소군이 숙였던 머리를 들어 고경염을 보았다.
“…!”
두 눈이 뜻밖에도 맑았다.
핏발이 서기는 했지만 방금 무수한 살육을 저지른 자의 눈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천살성!’
고경염은 오래전 들었던 전설이 떠올랐다.
하늘이 내린 살성은 사람을 파리 잡듯이 잡는다고 했다.
파리를 잡는 사람이 무슨 죄책감을 느낄 것인가.
보통의 인간은 살인을 저지르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이상행동을 한다.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도 사람을 죽이면 죽일수록 황폐해진다.
고경염 역시 인성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자는 달랐다.
무수한 살육을 저지르고도 담담하다.
땅을 디딘 고경염의 두 발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순간 대검이 강소군을 향해 찔러 갔다.
가는 동안에 변초가 세 번. 찌를 듯하다 후려치는 동작으로 바뀌고 다시 찌르기를 반복하는 사이 검에서 뿜어 나온 기가 강소군의 전신을 난타하였다.
-파파팍!
강소군의 옷이 검기를 이기지 못하고 찢겨 나갔다.
천무방 천성대주 고경염은 확실히 뛰어난 무위를 선보였다. 다만 무위만큼 담대하지 못한 마음이 약점이었다.
곧바로 적을 찔러 갔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검을 다시 한 번 돌렸다.
그게 패착이었다.
코끝까지 찔러 온 대검이 한 바퀴 도는 순간 강소군이 벼락같이 튀어나가며 늘어뜨렸던 도를 거꾸로 쳐 올렸다.
-서걱!
허공을 감던 고경염의 대검이 멈췄다.
-꺽!
기이한 소리가 나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고경염은 가랑이부터 정수리까지 반쪽이 났다.
“대주님!”
“으악!”
천성대는 대주 고경염을 무신으로 여겼다.
그런데 일 합도 겨루지 못하고 반쪽이 나는 광경에 그만 정신이 나갔다.
강소군은 바닥에 쓰러진 고경염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사실 그의 눈에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에 의지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막는 자가 없었다. 그가 다가서면 천성대원들은 물이 갈라지듯 비켜나기 바빴다.
강소군은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천성대원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천성 사조장이 나섰다. 다른 조장들이 죽거나 없는 이상 이 자리에서 그가 가장 선임이었다.
“전령을 본진으로 보내고 경상자는 시신과 부상자를 수습하라. 나머지는 모두 집결하라. 저놈을 놓쳐선 안 된다.”
천성 사조장이 대원들을 독려하였다.
천성대원들이 둉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데 한 사람이 걸어왔다.
도를 든 젊은 낭인이었는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소리도 없이 일 장씩 다가왔다.
“누구냐!”
천성 사조장이 가로막았다.
-쉬익!
붉은빛이 한 번 번뜩였나 싶었는데 천성 사조장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적이다!”
누군가 외쳤다. 두 사람이 검과 칼을 내밀었고 다음 순간, 다시 한 번 붉은빛이 번뜩이고 그들의 목이 떨어졌다.
압도적인 무위였다.
“…!”
천성대원들은 숨을 죽였다. 누구 하나 발검, 발도를 하지 못했다.
천성대원 하나하나가 강호에서 일류라고 자처해 왔는데 연달아 등장한 고수 앞에서 얼어붙은 듯 대처하지를 못했다.
젊은 낭인은 그대로 천성대원의 사이를 지나쳐 강소군이 간 산길로 올라갔다.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결코 느리지도 않았다. 한 걸음에 일 장씩 사라졌다.
***
점차 시력이 돌아왔다. 내력을 극한으로 뽑아 쓴 바람에 일순간 앞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우욱!”
피를 한 움큼이나 쏟아내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옆구리와 허벅지, 왼쪽 어깨의 상처도 다시 터졌다. 진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강소군은 냉정히 계산하였다.
산을 넘는데 지금 체력이라면 하루가 족히 걸릴 것이다.
적이 쫓아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추슬러 일정한 보폭으로 걸었다.
일정한 보폭은 일정한 호흡을 가져다주었고, 일정한 호흡은 내력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가 지나간 길에 짙은 혈향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