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콰악!
유마운의 눈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삼십여 장 거리이건만 부차격의 목이 창에 뚫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부차격의 도법은 섬전연환도.
섬전이라 이름 붙은 건 그만큼 빠르기 때문이다.
연환은 도세와 도세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상대를 몰아치기 때문이다.
부차격은 자신의 별호를 이뤄 준 도법을 제대로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직선으로 뻗은 창이 그대로 부차격의 목을 뚫은 것이다.
“저런 미친….”
유마운이 보기에 상대의 창에 부차격이 몸을 던진 것 같았다.
피하지도 창대를 쳐내지도 않았다.
유마운이 보기에 그리 빠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부차격이 어이없이 당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부차격은 목이 꿰뚫린 채 잠시 서 있다가 강소군이 창을 빼자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강소군이 천천히 부차격에게 다가가더니 땅에 떨어진 도를 집어 들었다.
도를 쥔 강소군이 이쪽을 바라봤다. 유마운은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응천대와 흑마대 궤멸이 사실이구나!’
강소군은 이쪽으로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부차격의 도를 챙기더니 말에 올라타고 관도를 따라 천천히 달려갔다.
천성대의 무사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자연스러웠다.
순식간에 조장을 잃은 천성 이조는 너무나 차원이 다른 강소군의 무공에 조장의 복수를 할 생각조차 못 했다.
그들의 조장이 얼마나 강한지 안다. 그런 자를 일격에 죽인 사람에게 덤벼든다는 건 목숨을 내놔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 살아 있다면 모를까 부차격은 이미 죽었다.
평소 자신들을 거칠 게 다룬 부차격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조원은 없었다.
“쫓… 쫓아라!”
유마운이 정신을 가다듬고 멍하게 서서 강소군이 가는 걸 바라보는 천성대원들에게 명령했다.
유마운은 강소군을 쫓아가며 수치와 모욕감을 느꼈다.
강소군의 행동이 자신들 따위는 신경 쓸 존재가 못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유마운은 강소군이 부상을 입었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지금 어떤 상태인지 정확히 모른다.
강소군은 중상에서 회복되지 않았다. 가진 바 내력과 힘을 일격에 담아 부차격을 죽인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유마운은 강소군을 쫓기만 할 뿐이다.
유마운은 강소군의 무위에 정신이 팔려 자신들의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욱.’
강소군은 치미는 핏덩이를 삼켰다.
기연을 얻어 금단진공(金丹眞功)의 화후가 대성에 이르렀으나 연이은 내상에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다.
적어도 백일은 정양을 해야 하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홍옥비도를 찾은 뒤부터 부쩍 마음이 급하다.
남경으로 가서 당시 동창과 금의위의 신원을 알아볼 생각이다.
그들의 신원이 드러나면 장영영의 생사에 관해 알 수 있을 것이란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강소군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관도를 달려가며 금단진공을 꾸준히 운용하였다.
적은 다시 올 것이고 더 강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내력을 안정시켜야 했다.
***
-슈슉!
“컥!”
어둠 속에서 십여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유마운은 용케 쳐냈지만 천성대 무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쓰러졌다.
“매복이 있다! 쇠뇌를 조심하라.”
천성대 무사들이 재빨리 원형진을 형성하였다.
유마운이 중앙에 서서 외쳤다.
“우리는 천무방이다. 정체를 밝혀라!”
야트막한 구릉 양옆은 덤불이 수북하였다. 화살을 쏜 자들은 그 속에 은신하고 있을 것이다.
너른 들판이라 암습을 대비하지 못한 게 실책이었다.
어떤 자들인지 몰라도 거의 유일한 매복지를 선정한 셈이다.
-슈슉!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그냥 당하지 않았다.
천성대 무사들이 칼과 검을 휘두르자 화살이 막혔다.
“역시 천무방 천성대로군!”
어둠 속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유마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상대는 이쪽이 누군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몰살을 노리고 매복한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대놓고 천무방과 대적한다면?’
당금 강호에서 천무방과 공공연하게 맞설만한 곳은 많지 않다.
도룡회 아니면 대정무각이다.
‘도룡회는 산동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경에 근거지를 둔 대정무각일 가능성이 높다.’
도룡회는 하북과 하남 북부를 관할한다. 하남 남부와 장강 일대를 관장하는 곳은 대정무각이다.
“대정무각!”
“….”
어둠 속에 있는 자는 말이 없었다.
“대정무각이 천무방과 전쟁을 하자는 건가?”
유마운이 다시 물었으나 여전히 답이 없었다.
유마운은 상대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손을 쳐들어 진을 물리고 있었다.
천성대원들이 원형진을 이룬 채 부상을 입은 동료들을 끌고 구릉 아래로 물러났다.
***
노이칠은 망설이고 있었다.
강소군은 전력 질주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그의 상태로 보면 말을 타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랬기에 노이칠은 강소군과 천성대를 따라잡고 들판을 우회하여 매복할 수 있었다.
노이칠이 유마운 등 천성대원들을 살펴보며 숫자를 세었다.
‘딱 스물이로군.’
유마운이 고수이기는 하나 노이칠의 안중에 들어올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전체 전력으로 보면 불리했다. 매복하고 있는 수하들은 열두 명이다.
개개인의 무공 또한 천무방 내원의 주력 천성대와 비교하여 손색이 있다.
워낙 급하게 끌 어모으다 보니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수준의 무공을 지닌 자도 있다.
‘오늘 밤만 버티면 되는데.’
지원요청을 했으니 아침이면 대정무각의 무사들이 합류할 것이다.
‘과연 잘하는 짓일까?’
노이칠은 모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천무방의 무력 이대를 단신으로 궤멸시킨 고수.
그를 대정무각으로 끌어들인다면 큰 공로를 세우는 셈이 될 것이다.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런 논리를 댔지만 실은 다른 이유도 있다.
노이칠은 자기도 모르게 강소군에게 끌렸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자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여러 사람의 목숨을 걸었으니 마음의 부담이 컸다.
결국 타협을 하였다. 이 정도 선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지금쯤이면 강소군은 들을 빠져나갔을 것이다.
노이칠이 수신호를 하였다. 뒤로 빠진다는 뜻이다.
열두 명의 무사 가운데 여덟 명이 조심스레 뒤로 빠졌다.
구릉 뒤에 말을 매어 두었으니 타고 달아나면 적은 누구에게 당했는지 모를 것이다.
나머지 네 명은 여전히 쇠뇌를 겨누며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유마운은 당혹스러웠다. 매복조가 빠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뭐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하고 싶지만 또 다른 함정이 있을까 싶어 바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말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 순간 판단을 내렸다.
유마운은 신중한 자였지 용기 없는 자는 아니었다.
기습을 당하고 적의 정체도 모른다면 그는 곧바로 말단 무사로 강등될 것이다.
천무방은 적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방도를 원하지 자기 목숨을 우선하는 자를 원하지 않는다.
유마운이 손을 쳐들고 수신호를 보냈다.
다섯 명이 남고 열다섯 명이 경공을 펼쳐 구릉으로 향했다.
-슈슉!
네 발의 화살이 날아왔으나 방비를 하고 있는 천성대 무사들에게 더는 통하지 않았다.
-쨍!
화살이 튕겨 나갔다.
유마운은 네 발의 화살을 보는 순간 확신하였다.
‘처음에 십여 발, 이번에 네 발. 이 새끼들이?’
적은 기습을 하고 도주를 하는 것이다.
유마운이 몸을 솟구쳐 앞선 천성대 무사들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적은 소수다! 반드시 잡아라!”
순간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흥!”
유마운이 도를 세워 화살을 쳐내며 몸을 날렸다. 다시 장전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했다.
-쉭!
이번에는 날아오는 소리가 달랐다.
유마운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곧바로 몸을 꺾었다.
수리검 한 쌍이 코끝을 스쳤다.
“크윽!”
유마운은 용케 피했지만 몇몇 무사는 그러지 못했다. 연달아 날아오는 수리검에 두 명이 쓰러졌다.
“이 비겁한 놈들!”
유마운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덤불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새 노이칠과 네 사람의 무사는 먼저 간 동료들과 합류하였다.
“놓치지 마라!”
유마운이 악을 썼는데 돌아온 건 마상에 있던 이들이 쏜 화살이었다.
화살은 집중적으로 유마운을 노렸기에 옆으로 뒹굴어 간신히 피했다.
“헛, 이랴!”
그 사이 노이칠은 말고삐를 채어 달아났다.
천성대의 무사들이 뒤쫓으며 품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크윽!”
한 사람이 암기를 맞고 떨어지려는 걸 뒤쫓아 가던 노이칠이 잡아채어 자신의 뒤에 태웠다.
천성대 무사들이 쫓는 걸 보던 유마운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구릉 뒤로 관도에서 갈라진 샛길이 있었는데 매복자들은 샛길로 가고 있었다.
“멈춰라! 돌아와라!”
유마운이 고함을 질러 천성대 무사들을 불러들였다.
유마운은 피해상황을 돌아보고 기가 막혔다.
쇠뇌에 당해 셋이나 죽었다. 중상도 다섯이나 되었다.
‘대정무각! 이 비겁한 자식들!’
유마운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정말 대정무각의 무사들인지 확인조차 못했다.
느닷없이 기습을 하고 바로 도주하였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어서 그놈을 쫓아야 한다!”
천성대주 고경염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러니 강소군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했다.
유마운은 경상을 입은 무사들에게 죽은 동료와 중상자를 돌보게 한 후 남은 인원을 끌고 다시 강소군을 쫓았다.
***
“누구냐?”
부상을 입고 동료들을 돌보고 있는 천무방 무사 가운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도를 들고 경계를 하였다.
관도 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기에는 너무나 빨랐다. 그렇다고 뛰는 것도 아니었다.
걷는 듯하지만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일장을 쭉쭉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경신법만 봐도 예사 고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으니 천무방 무사들이 극히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
가까이 다가온 이는 이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였다. 옆구리에 도를 찼는데 행색으로 보아 낭인 무사 같았다.
“신원을 밝혀라. 우리는 천무방 천성대다!”
왼팔에 화살이 박힌 비교적 경상을 입은 천무방 무사가 낭인에게 소리쳤다.
젊은 낭인은 길옆에 뉘여 있는 시신과 중상자를 흘깃 보고는 말없이 지나쳐 갔다.
젊은 낭인은 소리 없이 나타나 귀신같이 사라졌다.
천무방 무사는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했다.
***
하늘에 옅은 빛이 들었다.
앞으로 쭉 뻗은 관도는 육안으로 가는 길이다.
강소군은 오른쪽으로 틀어 산간지대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지도에 따르면 저 산들을 넘으면 안경이 나온다.
안경에서 배를 타고 남경으로 향할 생각이다.
강소군은 자신이 왜 굳이 평지를 두고 산을 넘기로 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지 않았다. 다만 적의 추격을 떨치기 위함이라 여겼다.
산속에서 적을 떨칠 수 있으리란 판단은 오산이었다.
“…!”
산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말을 멈췄다. 좁은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 양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천성대주 고경염은 새삼 조개량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였다.
‘저놈이 이쪽으로 올지 어떻게 알았을까?’
괜히 신기수사(神技秀士)라 불리는 게 아니다.
다만 납득할 수 없는 건 잡거나 죽이지 말고 내몰라는 명이었다.
토끼몰이하듯 합비까지 몰고 가라고 하였다. 게다가 모는 건 살귀들이 하니 천성대는 지원만 하면 된다고 했다.
천기수사 조개량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승복하지 못하는 게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살귀대 뒤나 보라는 뜻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