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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군-27화 (27/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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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검은 인영들이 사라지고 난 뒤 다시 성문이 열렸다. 나타난 이는 젊은 낭인이었다.

낭인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몸을 날렸다.

그런데 신법이 독특하다. 한 발을 내딛는데 일장을 스르륵 미끄러져 간다.

낭인이 사라지고 난 뒤 대로에 붙어 있는 삼 층 건물 난간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역시 저 녀석은 도룡회 사람이 분명하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이는 노이칠이었다.

말을 마친 노이칠이 돌연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박쥐처럼 펄럭거리며 삼 층 건물에서 내려서는 솜씨 역시 보기 드문 신법이었다.

건물 아래는 말이 한 필 매여 있었다. 말 옆구리에는 긴 검이 꽂혀 있다.

노이칠은 말에 올라탄 뒤 고삐를 채었다.

잘 훈련된 말인 듯 울음도 없이 그대로 튀어나갔다.

그러자 건물 뒤편에서 한 떼의 기마가 튀어나와 노이칠의 뒤를 따랐다.

노이칠 역시 강소군이 사라진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

“그자가 남문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천무방의 군사 조개량은 콧수염을 비비며 생각에 잠겼다.

“남문이라 그렇다면 장강으로 가는구나.”

조개량이 옆에 있는 심복에게 물었다.

“삼도문 화천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추적대가 마지막 보내온 전서구 보고로는 파양호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개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천대가 남하하고 있다는 게 의외였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화천대가 북상하여 장강에서 합류하는 게 맞았다.

“삼도문과는 이제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조개량은 악양 백륭사와 모홍객잔 주위 사람들을 탐문하여 그동안 벌어진 일의 경위를 거의 알아냈다.

‘연화심이 그자를 찾아가 조력을 요청했고, 무슨 일인지 그자가 큰 부상을 입어 함께 삼도문으로 도주하였다.’

물론 모든 걸 알아내지는 못했다. 생각지 못한 변수도 있었다.

‘모홍객잔에 산동삼호가 웅크리고 있었을 줄이야.’

산동삼호가 무슨 인연으로 삼도문을 돕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그가 잡아야 하는 건 연화심과 강소군 두 사람이다.

지난밤 천성대가 온 산을 뒤졌는데 허탕을 쳤다. 새벽녘에서야 신양으로 빠져나간 걸 알고 뒤를 쫓았다.

구연강은 대노하여 잘못 판단한 척후들의 코와 귀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천성대주 구경염에게 명했다.

“그놈과 연화심의 행방을 찾기 전까지 돌아올 생각하지 말라.”

구연강의 분노에 조개량은 직접 신양성 외곽에 머물며 강소군의 행방을 추적하였다.

조개량은 연화심과 화천대에게는 큰 관심이 없었다. 계획대로 삼도문의 사업을 접수하였으니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다만 구양운을 해친 이름 모를 고수의 정체가 궁금했다.

지금까지 들은 바 대로라면 그는 십대고수의 일인인 구연강에 필적할 고수다.

천하를 놓고 쟁패하는데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화천대는 버린다! 귀영대에게 추적조만 붙이고 나머지는 장강으로 북상하라 일러라. 그놈의 행방을 수시로 알려줘서 앞길을 차단시켜라.”

조개량의 말에 귀영대 전령이 달려나갔다.

제자 홍의발이 다가와 감탄하듯 말했다.

“과연 사부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그놈은 절대 사부님의 수중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모두가 보란 듯이 신양성을 들쑤신 건 타초경사의 수법이었다.

그게 들어맞아 강소군이 성을 빠져나가려다 행적이 잡힌 걸 홍의발은 조개량의 공으로 돌렸다.

홍의발의 아첨은 끝이 없었다.

“천성대주가 직접 갔으니 놈을 놓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조개량이 고개를 저었다.

“놈은 우원송을 죽인 자다. 흑마대주도 감당하지 못했어. 부상을 입었다지만 호랑이다. 호랑이를 몰 때는 최선을 다해야지.”

조개량이 홍의발에게 말했다.

“살귀들을 풀어라.”

“예?”

살귀는 천무방의 암살대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자들이다.

조개량은 이번 구연강의 친정에 살귀대의 절반을 끌고 왔다.

구연강도 모르는 사실이다.

동원한 살귀대는 오십 명.

조개량은 그들을 모두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홍의발이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조개량의 시선이 탁자에 펼쳐진 지도에 꽂혔다.

‘구양운의 죽음이 우리에게 명분을 주었다. 이 기회에 하남으로 진출한다.’

구연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조개량이다.

구연강이 수시로 분노를 표출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아들 구양운의 죽음을 이유로 삼도문을 제거하고 하남 남쪽 장강으로 진출하려는 복심이 숨어 있다.

조개량은 강소군을 잡는데 천성대와 귀영대 그리고 살귀대를 투입함으로써 장강 일대를 천무방의 세력권으로 둘 생각이다.

‘대공자가 호남을 평정하고 있다. 그리되면 천무방은 호남과 하남의 장강 일대를 장악할 수 있다.’

장강은 천하 상권의 젖줄이다. 천무방이 천하제일방으로 올라서는 기반이 될 것이다.

조개량은 사실 강소군에게 치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구연강이 삼남 구양운을 애지중지하며 후계구도가 흐트러질 염려가 있었는데 강소군이 화근을 제거한 셈이다.

‘게다가 장강 진출의 명분까지!’

복수라는 명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

초겨울로 넘어가는 황량한 들판에 달빛이 가득하였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관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말을 달리는 강소군도 뒤를 따르는 천성대 삼십여 무사도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멀리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는 야트막한 구릉이 보였다.

강소군은 말을 멈췄다.

한 시진이 넘게 내리 달렸으니 말도 쉬어야 했다.

-푸르르륵.

말이 투레질을 하였다. 강소군이 소나무 한 그루에 말고삐를 묶고 말 등에서 수통을 꺼냈다.

먼저 자신이 한 모금 마시고 말의 목도 축여 주었다.

쫓기는 자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멈춰라.”

천성 일조장 유마운이 수하들을 멈춰 세웠다. 강소군과 삼십여 장 거리를 두고 있다.

“형님, 왜 멈추는 거요?”

천성 이조장 부차격이 다가와 물었다.

“대주께서 거리를 두고 쫓기만 하라고 명한 걸 너도 들었잖느냐?”

천성대주 고경염은 조장들에게 흉수를 발견하면 자신이 당도할 때까지 쫓기만 하라고 명령한 바 있다.

“커억, 퉤! 솔직히 말이 되오? 저 한 놈 잡는데 우리 천성대가 모두 투입되다니.”

부차격이 한 시진 넘게 경공을 펼치느라 깔깔해진 목에서 가래를 뽑아 뱉으며 투덜거렸다.

“응천대와 흑마대를 풍비박산 낸 놈이니까 아무래도 조심하는 거겠지.”

“흥! 응천대 녀석들. 허명만 번지르르하지 제대로 힘쓰는 놈이 몇이나 있다고.”

천성대는 천무방 내성 주력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자부심이 높았다.

무엇보다 부차격은 한 사람이 응천대와 흑마대를 궤멸시켰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솔직히 방주도 그러지는 못할 거야.’

온갖 궤계가 난무하는 강호다.

‘독을 쓰는 놈일지도 모르지.’

부차격은 자신이 지닌 약낭에 든 해독단을 떠올렸다.

어지간한 독을 해독시켜 주는 효능이 있으니 크게 염려할 것은 없다.

“솔직히 저놈 혼자 그랬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소. 아마도 간교한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소.”

부차격이 강소군을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이 찬바람 부는 벌판에서 대주님이 오실 때까지 벌벌 떨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우습소. 천성대의 명예가 있지.”

“어쩌자는 거냐?”

“일단 내가 가서 저놈의 실력을 떠보겠소.”

“굳이 위험을 자초할 게 뭔가.”

“저놈이 삼두육비의 괴물이 아니잖소.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으니 걱정 마시오.”

유마운도 부차격의 무공은 알고 있다. 호전적인 부차격의 연환도는 자신도 감당키 어려운 면이 있다.

사실 천성대의 조장 정도면 강호에 나가 적수를 찾기 쉽지 않다. 부차격은 열 명의 조장 가운데 무공으로만 치면 수위를 점할 것이다.

부차격은 도만으로 따지자면 응천대주 우원송의 언월도와도 겨루어 볼 만하다 자신해 왔다.

유마운이 잠시 망설이는데 부차격은 벌써 몸을 돌려 관도를 따라 걸어갔다.

“조심하게. 무공 수위만 살피고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오게.”

“걱정 마시오.”

부차격이 걸어가며 도를 들어 흔들흔들하였다.

‘저놈, 저러다 제 명에 죽지 못하지.’

유마운이 부차격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부차격은 달빛에 드러난 관도를 따라 올라갔다.

강소군은 소나무 아래 기대어 서 있었다. 한 손에 창을 들고 있는데 검붉은 핏빛이다.

‘창수(槍手)’

강호에서 창을 쓰는 자는 많지 않다.

일단 가지고 다니기 불편하다. 관이나 여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도 부담스럽다.

강소군은 부차격이 다가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부차격은 삼 장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이자 몸을 빼내 돌아갈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하다.

“당신이 귀창(鬼槍)이오?”

“….”

“아. 당신을 귀창이라 부르더군. 원래 별호가 아닌가?”

응천대와 흑마대는 강소군을 귀창이라 불렀다.

강소군이 부차격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먼 곳을 보았다.

부차격이 강소군의 시선을 따라 봤으나 달빛 받은 들판만 보일 뿐이다.

“이봐,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부차격이 으르렁거렸다. 강소군이 대답도 없이 시선을 거두니 무시당한 느낌이 든 것이다.

강소군은 귀창이라는 말에 옛 생각이 떠올랐다.

‘하하. 오랑캐들이 나를 귀창이라 부르더라고. 내가 도를 쓰면 뭐라고 하려나?’

전장에서 돌아온 장선백과 술을 나누는 자리였다. 봄비가 내리는 정원을 보며 홍로주를 마셨던 것 같다.

‘광도(狂刀)라고 했겠지.’

‘뭐라고? 광도?’

‘미친놈처럼 마구 내리치는 수밖에 모르니 광도 아냐?’

‘이 자식이, 형님의 도를 제대로 보지 못했군.’

장선백은 십팔반 병기에 능통했으나 그중에서 창과 도를 잘 썼고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도가 조금 더 나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댓돌에 부딪히며 절로 음률을 만들어 냈다.

아마도 우울한 대화의 끝이었던 것 같다.

조정은 늘 불안하였고 그 불안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장선백이 화제를 돌리려고 꺼낸 우스갯소리.

그 자리가 마지막이었다.

기억이란 게 붙잡는다고 잡히는 게 아니다.

시간이 흐르며 하나둘 사라지는 데 어떤 기억이 사라졌는지조차 모른다.

강소군은 부차격이 귀창이라고 한 말에서 장선백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되자 곰곰 되새겼다.

눈앞의 적보다 그에겐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당시 나눴던 정국에 대한 이야기에서 장씨 일가의 몰락에 대한 단초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강소군이 생각에 잠겨 있자 부차격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천성 이조장은 결코 무시받을 자리가 아니다.

“이봐, 내 말이 안 들리나?”

부차격은 당장이라도 발도를 할 기세다.

부차격의 호통에 지난 기억 속을 헤매던 강소군의 시선이 돌아왔다.

어두운 겨울 들판.

저쪽에 적이 웅크리고 있고 바로 앞에 한 장한이 도를 뽑을 기세로 노려보고 있다.

“무슨 일인가?”

강소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크흐흐. 이제야 정신이 드나 보군. 네가 응천대와 흑마대를 궤멸시켰다던데 솜씨를 한번 구경하고 싶구나.”

“….”

소나무에 기대어 섰던 강소군이 천천히 일어났다.

여러 말 할 필요 없이 들어오라는 뜻이다.

“나는 천성대 이조장 부차격이라고 한다. 강호에서는 섬전연환도라고 부르지.”

부차격이 도를 늘어뜨리며 다가섰다.

처음에는 한 발 한 발 천천히 다가가다 어느 순간 보폭이 좁아지며 걸음이 빨라졌다.

부차격은 강소군에 대한 소문을 믿지 않았으나 혹시 몰라 전신 공력을 일격에 담았다.

겨울바람보다 싸늘한 도기가 거세가 몰아쳤다.

강소군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창을 내밀었다.

창은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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