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장웅은 팔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동시에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아야. 이게 무슨 짓이오!”
장웅의 소리에 장 노대가 깼다.
“어이쿠. 술에 취했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갔나 보군.”
노이칠이 부산을 떨며 장웅을 끌어당겼다.
장웅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노이칠이 장 노대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혼자 먹기 적적해서 손자에게 술친구나 해 달라고 한 거요.”
장웅은 노이칠에게 잡혔던 팔을 주물럭거렸다. 어떻게 눌렀는지 하반신이 마비되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
장웅이 항의하려는데 노이칠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장 노대, 잔 하나 더 주지?”
“어린애를 데리고 무슨 주사를 부리려고 그러나?”
장 노대가 투덜거리면서도 잔을 하나 놓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안줏거리를 더 내올 모양이다.
“자네는 이렇듯 자상한 할아버지가 있으니 참 좋겠군.”
노이칠이 장웅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나는 고아로 컸다네. 젖먹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지.”
장웅은 노이칠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노이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자가 무림인이었나?’
장사치로 여겼는데 아무래도 무공을 익힌 자인가보다.
무공 중에 점혈이라는 수법이 있는데 그 수법에 당하면 움직일 수가 없다고 들었다.
장웅은 자기 상태가 말로만 듣던 점혈에 당한 게 아닌가 싶었다.
“자, 어서 들게.”
노이칠이 허리를 숙여 술잔을 건네면서 나직하면서도 빠르게 속삭였다.
“천무방을 찾아갈 거라면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장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노이칠은 확실히 무림인이었다.
‘내가 천무방 무사들을 만나려는 걸 어떻게 알았지?’
장웅이 주방 쪽을 봤다. 장 노대가 커다란 솥에 야채를 넣고 볶는 게 보였다.
“왜 그러고 있나. 한 잔 마시라니까.”
노이칠이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술을 들이켰다.
“커어. 술맛 좋다!”
노이칠이 입가를 닦더니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힘이 장사였는데 남을 도와주는 걸 좋아했다더군. 그러다 엉뚱한 일에 휘말려 죽었다는 거야.”
“그것 참 공교롭구만. 얘 아비도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죽었다네.”
장 노대가 야채볶음을 가지고 나오면서 노이칠의 말을 받았다.
“그래요? 아드님도 그랬단 말이오?”
“다 자기 팔자지 뭐겠나?”
장 노대가 한탄을 하고는 내원으로 들어갔다.
장 노대의 뒤에 대고 노이칠이 소리쳤다.
“팔자라니. 괜한 호기심이나 객기만 부리지 않았다면 멀쩡했을 것 아니오? 내가 오늘같이 무림인들이 설치는 날은 아예 나다니지 않은 게 다 그런 이유라오.”
노이칠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젊은 낭인이 들어왔다.
젊은 낭인은 노이칠과 장웅이 앉은 자리를 흘깃 보고는 내원으로 들어갔다.
“저자는 나이는 어리지만 강호를 살아가는 지혜를 아는군. 귀하게 자라 세상천지 분간 못 하는 어떤 놈보다 확실히 낫군그래.”
노이칠이 장웅을 보고 나직하게 협박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너도 네 할아버지도 제 명에 못 살 것이다.”
장웅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천무방 사람들을 찾아 수상한 자가 객잔에 있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노이칠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때 강소군의 방문이 열렸다.
강소군이 나오더니 반점 쪽으로 걸어왔다.
장웅이 애써 외면했다.
강소군이 나오자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내심 긴장하였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 두 사람이 한패인가?’
아무래도 그럴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강소군을 밀고하려는 자신을 노이칠이 막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장웅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신양에서 나고 자란 우물 안의 개구리 장웅은 강호 사정의 복잡함을 짐작할 수가 없다.
노이칠 역시 자신만의 사정으로 천무방 사람들과 마주치기를 꺼렸기에 막은 것뿐이란 건 알지 못했다.
강소군이 반점에 들어왔다.
“한잔하시겠소? 앉으시오.”
노이칠이 강소군에게 말을 건넸다.
강소군이 노이칠을 가만 바라보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장웅 옆자리다.
장웅은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노이칠이 주방으로 가더니 새 술과 잔을 가지고 와서 강소군의 앞에 놓았다.
“이 집이 술맛은 좋다오.”
강소군이 벌컥 잔을 들이마셨다.
강소군은 자신의 객실에서 요양을 하다 노이칠의 말을 들었다.
노이칠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천무방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강소군에게 주의를 주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강소군은 노이칠을 모른다. 그가 왜 자신에게 천무방의 동정을 알려 주는지 궁금했다.
일부러 접근한 자라면 숨은 의도를 알아야 했다.
강소군이 장웅을 보았다.
“객잔 주인의 유일한 손자라오. 아직 철이 없어 그렇지 심성은 괜찮은 놈이요.”
노이칠이 뜬금없이 말했다.
노이칠 자신도 왜 갑자기 장웅을 막았는지 이유를 스스로에게도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장웅이 번거로운 일을 만들어도 자기 한 몸 피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굳이 장웅을 잡았다.
‘장 노대 때문인가?’
화양객잔을 드나든 지 몇 년 됐다.
장 노대는 일 년에 한 번 찾는 그를 잊지 않고 올 때마다 살갑게 대해 주었다.
노이칠 자신의 말대로 고아로 자랐기에 장 노대에게서 부친의 정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노이칠은 장 노대의 유일한 희망이 피기도 전에 끝나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어 끼어들었다.
장웅이 천무방에 강소군의 존재를 알리면 화양객잔은 피바다가 될 것이라는 본능적인 예감이 있었던 것이다.
장웅은 그런 사정을 모르고 진땀을 흘릴 뿐이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이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강소군은 그를 해칠 생각은 아닌 듯 보였다.
“어찌 알았소.”
강소군이 술병을 집어 술잔에 따르며 뜬금없이 물었다.
장웅은 무슨 말인지 몰라 강소군과 노이칠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노이칠은 강소군이 무얼 묻는지 알았다.
“세상을 떠돌다 보면 보고 듣는 게 꽤 된다오. 얼마 전 악양에서 천무방 삼공자가 피살된 일을 모르는 무림인은 없을 것이오.”
장사치 차림이었으나 노이칠은 무림 동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살해한 사람이 삼도문과 연관이 있고 그 때문에 천무방주가 직접 나섰다는 소문도 무림에 파다하다오.”
장웅은 자신의 처지를 잊고 귀를 세웠다.
무한 삼도문이 멀지 않았음에도 자신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소군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며 들었다.
“삼도문주가 식솔을 모두 떠나보내고 몇몇 문도들과 결사항전을 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었소.”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과장되거나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았는데 노이칠이 알고 있는 바는 제법 정확했다.
이는 그가 정보를 다루는 데 있어 남다른 면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제 일어난 삼도문의 혈사까지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노이칠의 분석은 이어졌다.
“오늘 바깥을 나가보니 신양 바닥에 천무방 무사들이 깔렸소. 이게 무슨 뜻이겠소.”
“무슨 뜻인데요?”
노이칠이 말을 끊으니 장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노이칠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웅이 네놈이 할아버지 반만 닮았으면 좋으련만. 오래 살아남으려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해야 하는 법도 익혀야 한다.”
“귀하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군. 보지 않은 것도 본 듯 말하는 걸 보니.”
강소군이 한마디 하였다.
“천무방 무사들이 신양에 나타났다는 건 이미 삼도문이 무너졌다는 뜻 아니겠소?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삼도문의 생존자를 찾는 것 아니겠소?”
장웅이 강소군을 봤다.
이 사람이 삼도문의 생존자라고?
강소군은 강소군대로 생각에 잠겼다.
‘삼도문 사람들이 산을 넘었단 말인가?’
강소군은 자신이 떠난 뒤 삼도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자신이 천무방 포위망을 흔들었으니 탈출했을 것이란 짐작만 할 따름이다.
하지만 의외였다.
자신이 삼도문주라면 뱃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천무방은 호북 산간에 있으니 산길 추적에 능할 것인데 왜 산을 넘었을까.
“그래서 아는 상인을 찾아 사실을 확인해 봤소.”
노이칠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마시곤 입을 씻었다.
“마침 무한 쪽에서 온 상인이 있었소. 그의 말을 들으니 삼도문은 어제 멸문했다고 하오. 천무방이 쫓는 자는 한 사람이라고 하더군.”
강소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국 멸문하고 만 것인가? 연화심의 얼굴이 스쳐 가는 건 왜일까?
“삼도문이 멸문당했다고요?”
장웅이 놀라 되물었다.
삼도문이 관리하는 상점이 신양에도 있어 장웅도 알고 있다.
“웅이 네가 술이 제법 세구나.”
노이칠이 중얼거리더니 앞에 놓인 젓가락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퍽!
젓가락이 날아가 장웅의 미간을 찍었다.
장웅은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지며 기절하였다.
강소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놈의 목숨은 붙여 놔야지 늙은이가 살아가지.”
노이칠이 중얼거렸다.
강소군은 담담한 얼굴로 술잔을 들었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니야.’
노이칠은 속으로 자신이 판단이 맞다고 끄덕였다.
젓가락으로 혈을 때리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강소군은 담담하다.
노이칠이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이 천무방 삼공자를 격살한 장본인 같소만.”
노이칠은 말을 하면서 내력을 끌어 전신에 퍼뜨렸다.
상대가 어찌 나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도주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체가 발각 나면 목격자를 죽이려드는 게 보통이다.
강소군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소군이 중얼거렸다.
“천무방 삼공자란 이가 그리 대단한가?”
혼잣말이었을 뿐인데 노이칠에게는 마치 파리를 죽였는데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들렸다.
노이칠이 잠시 어이없어하다가 말했다.
“천무방이 당금 강호의 사패라는 건 아시오?”
“….”
“요천루주가 죽었으니 이제 삼패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노이칠이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거 아시오?”
노이칠이 뜬금없이 물었다.
“요천루주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는데 그에게는 아비가 없었소.”
“…?”
“천무방 삼공자 그 자신은 별게 아닐 수 있지만 그 아비가 천무방주란 말이오.”
강소군은 묵묵히 앞에 놓인 술잔을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다. 요천루주를 위해 복수할 자는 삼사뿐이었다.
하지만 구양운의 복수는 천무방 전체가 나설 것이다.
강소군이 속으로 탄식하였다.
그는 적에게 단호했지만 살귀는 아니다. 그럼에도 백륭사에서 일면식도 없던 구양운을 격살하였다.
스스로 변명하자면 심적으로 쫓기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상을 완전히 회복하지 않은 상태였고 삼사가 집요하게 뒤를 쫓고 있었다.
게다가 장선백의 종적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실망감에 신경이 곤두선 상황이었으니 구양운과 응천대는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구양운과 응천대가 앞을 가로막은 건 그들의 잘못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랐다.
당장 자기만 해도 백륭사를 떠나 이 자리에 있지 않은가.
‘삼도문이 멸문한 것은 내가 구양운을 죽였기 때문인가?’
결과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구양운이 죽지 않았다면 천무방주 구연강이 직접 무한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강소군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동시에 연화심의 간절했던 눈빛이 또 한 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