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사람들은 구연강을 천하 십대고수라 부른다.
구연강은 강호인들이 정한 서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천하에는 오직 사대천왕만 있을 뿐이다.
사대천왕.
그중 요천루주 풍가채가 죽었다.
구연강은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적수는 단 두 사람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삼도문에서 횡액을 당할 뻔했다.
구연강은 연성결의 시신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함께 천하를 일통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나의 제의를 거절한 것인가?’
구연강이 연성결 등의 시신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신기수사 조개량이 대청 뒤쪽에서 들어왔다.
“응천대주가 결국 죽었습니다.”
우원송은 치명적인 창격을 맞았다. 기식이 엄엄했는데 결국 죽은 모양이다.
구연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들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조개량이 연무장에 나란히 눕혀 놓은 삼도문 의형제의 시신을 보며 물었다.
“일문의 문주였다. 그에 맞게 장례를 치러 줘라.”
천무방의 주력을 이끌고 달려올 때만 해도 삼도문의 모든 식솔을 찢어 죽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삼도문 삼형제는 자신을 기다렸다.
그들과 한바탕 격렬한 혈전을 벌인 구연강은 생각이 바뀌었다.
같은 무림인으로서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구연강은 수하들에 의해 실려 가는 삼도문 삼형제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뜻은 알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하라.’
세 사람이 굳이 남아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죽음으로 끝을 내자는 뜻이다.
세 사람의 뜻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천무방이 입은 피해가 너무나 컸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
강소군이라는 놈.
그놈의 손에 아들은 물론이고 천무방 이백여 무인이 운명을 달리했다.
운살과 흑귀, 우원송을 비롯하여 암천대와 응천대는 물론이고 흑마대까지 궤멸 수준으로 당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당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놈, 절대 사대천왕 밑이 아니다!’
구연강이 이를 갈았다. 그렇다면 반드시 잡아 죽여야 한다.
조개량이 말했다.
“연문주의 딸은 오십여 삼도문도들과 함께 장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주 중입니다. 귀영대가 쫓고 있습니다.”
조개량이 잠시 말을 끊었다.
구연강이 조개량을 봤다.
조개량이 말하다 말고 주저하는 건 드문 일이다.
구연강이 원하는 걸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연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강소군이라는 놈은?”
“그자의 행적이 확실치 않습니다.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행적이 확실치 않다니?”
구연강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수하들의 말로는 홀로 동쪽 산악지대로 갔답니다.”
“그런데?”
조개량이 설명했다.
삼도문 앞은 사통팔달이라 할 만큼 여러 갈래로 길이 나 있다.
강소군은 장원 앞에 진을 친 응천대를 돌파하고 곧바로 서쪽에 주둔한 흑마대를 쳤다.
“동쪽으로 갈 생각이었다면 응천대와 겨룬 뒤 바로 가는 게 순리지요. 흑마대와 혈전을 겨룰 이유가 없었는데 굳이 싸우곤 되돌아간 게 이상합니다.”
구연강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었다.
구연강은 북쪽 길로 내려왔기에 강소군을 놓쳤다.
“그자는 작년부터 악양 백륭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연화심을 만나 삼도문까지 온 것이죠. 둘이 갈라섰다면 다시 악양으로 돌아가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동쪽으로 간 것처럼 보이고 길을 돌아 악양으로 갔을 것이란 말인가?”
“산속에서 길을 바꾸면 쫓기 어렵지요.”
구연강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그놈은 동쪽으로 간 게 맞다. 천성대를 모두 풀어 쫓아라.”
“예?”
조개량이 의아해하였다.
구연강이 가만 눈을 감았다.
조개량은 제법 뛰어난 책사다.
다만 모든 책사들이 그렇듯 자신의 머리를 너무 과신한다.
무인의 심리 특히 자신이나 강소군과 같은 고수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고수는 굳이 자신의 길을 감추지 않는다.’
막을 자가 없는데 왜 굳이 돌아간다는 말인가.
조개량은 죽었다 깨어나도 무인의 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계곡에서 바위를 타고 관도로 올랐다.
계곡을 따라 올라왔기에 말을 매어둔 곳은 삼십여 장 아래쪽이다.
강소군은 창을 비껴들고 천천히 길을 내려갔다.
낙엽이 수북이 내린 길인데도 밟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말이 보일 즈음 잠시 멈췄다.
길에는 이미 어둠이 내려 곳곳에 똬리 틀고 있었다.
어둠 속 어딘가에 살기가 웅크리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모두 다섯 놈이다.
왼쪽 다리와 팔은 움직일 때마다 불편하다. 오른쪽 역시 옆구리 검상이 깊어 제대로 창을 쓰기 어렵다.
-푸르르륵.
말이 먼저 강소군을 알아채고 투레질을 하였다.
강소군은 천천히 길을 내려갔다.
놈들은 말 주위에 매복하고 있었다.
계곡 쪽에 둘, 관도 위쪽 기슭에 둘. 그리고 길가 풀숲에 하나.
‘어느 놈이 먼저 달려들까.’
태연하게 말로 다가가는 강소군.
하지만 신경은 극도로 예민하게 곤두섰다.
계곡 쪽에 있는 놈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대로 솟구치며 한 놈이 수리검을 날리고 다른 한 놈이 대도로 다리를 쓸어왔다.
가타부타 말도 없었다. 어둠처럼 침묵으로 다가왔다.
영리한 공격이었다.
수리검을 피하고 대도의 공격권을 벗어나려면 풀숲에 숨은 놈에게 등을 보여 주어야 한다.
강소군이 적들의 계산 그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풀숲에 있는 놈이 튀어나와 대도로 등짝을 찍으려 들었다.
이를 피하려면 다시 한두 걸음 사선으로 움직여야 한다.
기슭에 있는 놈들이 뛰어내리며 도를 찍었다. 하나는 머리를 다른 하나는 창을 든 팔을 노렸다.
기합도 호통도 경고도 없었다. 오로지 죽이려는 의지만 있을 뿐이다.
어둠을 타는 인영들의 휘날림이 마치 잘 짜인 무언극을 보는듯했다.
계곡 쪽에서 튀어나온 놈들이 재차 공격을 해 왔다.
다섯 놈의 공격이 합을 맞춰 일시에 강소군의 몸을 찢어발기려는 순간.
-퍽!
강소군이 창대로 땅을 찍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적들은 순간적으로 먹잇감을 놓치자 발악하듯 위를 쳐다봤다.
-슉!
홍옥비도가 한 놈의 면상에 박혔다.
땅을 찍은 창을 들어 그 옆에 있는 놈의 턱을 쳐올렸다.
-쩍! 퍽!
뼈가 갈라지고 머리통이 터지는 둔탁한 소리) 함께 강소군은 허공에서 몸을 뒤채며 창을 돌려 찍었다.
-슉!
격렬하게 움직이자 옆구리에 입은 상처가 찢어지며 통증이 스치고 창이 멈칫하였다. 순간적으로 주춤하는 사이 적이 창날을 흘리고 빠져나갔다.
-쿵!
강소군이 땅에 내려섰다.
둔탁한 소리에 적들의 귀가 쫑긋 서는 게 보였다.
서로 시선을 나누는 게 보였다.
적들은 강소군이 상처 입은 걸 눈치챘다.
창의 공격권을 벗어나 맴돌 뿐 다가오지 않았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는 걸 알고 나니 움직임이 여유로워진 것이다.
강소군은 쓰러진 적의 면상에서 홍옥비도를 뽑았다.
그러자 놈들은 두어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비도의 공격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옆구리가 미적지근한 물로 적신 듯하다. 봉합한 상처가 찢어져 다시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강소군은 창을 비껴든 채 말 쪽으로 갔다.
-슉!
수리검이 날아왔다.
강소군이 아니라 말을 노렸다. 강소군이 창을 뻗어 가볍게 휘저었다.
-띵! 띵!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고 수리검이 튕겨 나갔다.
수리검을 튕겨낸 창이 갑자기 벼락같이 움직였다.
-땅!
허공에 뜬 수리검 하나가 강소군의 창에 맞더니 앞에 있는 놈을 향해 날아갔다.
“큭!”
갑작스레 날아든 수리검이 정확히 놈의 목에 박혔다.
동시에 강소군의 창이 어둠을 갈랐다.
-퍽!
왼쪽에 있던 놈이 창에 꿰뚫렸다.
살아남은 놈이 몸을 돌려 도주하였다.
강소군이 쓰러진 놈이 떨어뜨린 도를 집어 던졌다.
-휘리릭!
“크악!”
풍차처럼 날아간 도가 도주하는 놈의 등에 박혔다.
강소군은 창을 회수하고 말에 올랐다.
그러고는 천천히 적이 온 길 쪽으로 내려갔다.
얼마 가지 않아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관도 옆 숲에 놈들이 타고 온 말 다섯 필이 매여 있었다.
-푹!
강소군은 망설임 없이 네 마리를 찔러 죽였다.
그러곤 한 마리를 끌고 다시 산길을 달려 올라갔다.
-히히힝!
강소군이 말고삐를 채어 달렸다.
-두두두.
말이 어두운 산길 관도를 달렸다.
***
연화심은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들려 왔다.
-삐그덕 삐그덕.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노에서 나는 소리였으나 연화심은 무슨 소리인지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아버지 연성결이 갑자기 점혈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연화심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이다.
주위가 눈에 들어오자 연화심은 배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어나셨습니까?”
어둠 속에서 중랑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중랑?”
연화심이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다.
“깨어난 모양이군.”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장무강이었다.
중랑이 선실을 가린 천을 걷었다.
은은한 달빛이 들어왔다. 중랑은 연화심의 발치를 지키고 있었다.
“어찌 된 거지? 아버지는?”
“문주님은… 남으셨습니다.”
중랑이 말했다.
연화심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남다니?”
“세 분 모두… 구연강과 자웅을 겨루시겠다고 남으셨습니다.”
중랑이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연화심이 벌떡 일어났다.
“가야 돼!”
“문주님 뜻입니다!”
중랑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연화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뱃전에 산동삼호가 기대어 있다가 연화심을 바라보았다.
“아…!”
연화심은 망연자실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달빛이 내린 강은 하얗게 빛났다.
강은 넓었다.
필사적으로 주위를 돌아보는 연화심의 눈에 뒤편에서 노를 젓는 뱃사공이 들어왔다.
“육지로 배를 대요!”
연화심이 소리쳤다.
그때 커다란 손이 연화심의 어깨를 잡았다.
“진정하게, 연 낭자.”
언제 왔는지 장무강이 연화심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세 분은 낭자와 문도들을 위해 희생하셨네. 그 뜻을 헤아리게.”
연화심은 푹, 주저앉았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연화심은 소리 없이 통곡하였다.
장강에 흐르는 달빛을 따라 배가 내려갔다.
***
천성대주 고경염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어두운 산길에 혈향이 짙다.
“모두 죽었습니다.”
첨병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정말 대단한 놈이군. 부상을 입었다던데…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얼마나 된 것 같은가?”
“피가 굳은 정도로 보아 이각 정도 된 듯합니다.”
‘이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고경염이 전령을 불렀다.
“놈이 신양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방주님께 보고하라.”
전령이 나는 듯이 말에 오르더니 이내 산 아래로 달려갔다.
“우리는 놈을 쫓는다!”
고경염과 천성대 오십 명의 무인이 어두운 밤길을 달렸다.
무인들이 든 횃불이 밤하늘 유성처럼 산길을 흘렀다.
반 시진쯤 달렸을까.
앞서가던 첨병이 돌연 말을 멈췄다.
고경염이 검자루를 잡았다.
“말이 한 필 있습니다.”
고경염이 앞으로 나서서 보니 주인 잃은 말이 관도에 서 있었다.
“교활한 놈!”
중간에 말을 버리고 산길을 탄 모양이다. 밤에 산으로 숨어든 놈을 잡기란 난망한 일이다.
“되짚어가며 샛길이 있는지 살핀다.”
횃불을 든 무인들이 관도 양편을 비추며 온 길을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