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소군-22화 (2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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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무량이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켜고는 말했다.

“강소군이란 자는 정말 대단하더군. 십대고수라 할지라도 그런 무위를 보여 줄 수 있을지 의문이야.”

황의채는 일전에 연성결로부터 강소군이 황궁 고수일 것이란 말을 들은 바가 있다.

“대형 말씀대로 그자가 황궁 출신이라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천하사패가 무림을 좌지우지한다지만 황궁이 마음만 먹는다면 허깨비처럼 스러지겠구나.”

연성결이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네. 천하사패가 곧 무림은 아니니까. 진정한 고수들은 잠룡과 같아 세상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지요. 무림은 깊고도 넓은 바다와 같은 것! 어렸을 적 절대고수를 찾아 헤매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하하하.”

호승심이 강했던 척무량은 젊은 날 고수를 찾아 비무행을 한 바 있었다.

그 생각이 났는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그자를 찾아 꼭 한 번 겨뤄 보고 싶군요.”

그때.

-두두두두.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언뜻 듣기에도 수십 필의 말이 달려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오는 모양이군.”

연성결이 술잔을 들고 일어나 두 아우에게 보이며 말했다.

“천하사패의 패주이자 십대고수라고 했나? 구연강의 무공이 과연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꾸나!”

척무량도 술잔을 들었다.

“좋습니다. 삼도문에 일도삼단이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 주지요.”

일도삼단은 척무량의 별호다.

한 쌍의 반월도를 쓰는데 칼빛이 번뜩이는 순간 상대가 세 조각이 난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좋지요.”

황의채가 술잔을 들어 의형들에게 보였다.

세 사람은 술잔을 벌컥 비우고 동시에 대청 바닥에 내리쳐 깨뜨렸다.

결전에 앞서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술을 나눴다.

세 사람이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연무장에 내린 오시의 햇볕을 소슬한 바람이 쓸고 갔다.

“죽기에 딱 좋은 날이로구나!”

척무량이 호탕하게 웃었다.

***

무한의 한 포구.

배를 구하러 갔던 초지항이 돌아왔다.

“배를 구했습니다.”

삼도문을 떠날 때 계획은 배를 타고 장강을 건너 복주까지 바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상의를 드릴 게 있습니다.”

초지항이 장무강과 중랑을 따로 부르더니 품에서 지도 한 장과 서찰을 꺼내 건넸다.

“황 장로께서 주신 것입니다.”

황 장로라면 백선문사 황의채다.

장무강이 서찰을 읽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 문사는 이 상황을 벌써 짐작하고 있었군.”

황의채는 초지항의 화천대는 장강을 넘어 복주로 향하고 연화심 일행은 강을 따라 가다 우회한 후 시일이 지나 복건으로 가라고 적었다.

“천무방주는 독한 자이니 절대 아가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초지항의 전언에 장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연강은 아들이 죽었다고 천무방의 세력 삼 할을 직접 끌고 내려왔다.

황의채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장무강이 초지항에게 물었다.

“자네들과는 어디서 합류하는가?”

“복건의 장원이 어디 있는지는 아가씨도 아십니다. 직접 가시면 됩니다.”

초지항이 담담하게 말했다.

장무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초지항의 말은 화천대와 삼도문도들은 복건까지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니, 가지 않겠다는 뜻일 수도 있다.

황의채가 서찰에 적어 놓은 계책에 의하면 그들은 미끼였다. 그런데 초지항은 미끼가 아니라 독사가 되어 뒤꿈치를 물겠다고 말하고 있다.

장무강이 탄식을 하였다.

‘어찌하여 강호에 삼도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장무강이 보기에 삼도문은 규모는 작지만 더없이 강한 문파다.

“연 문주께서 자네를 제자로 인정한 이유를 잘 생각해야 하네. 회천십이도의 맥이 끊어진다면 그가 저승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야. 일단 목숨을 보전하고 후일을 도모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초지항이 의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타고 가는 배는 말을 싣는 배입니다. 오십여 마필과 사람이 건너는 것이니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입니다.”

한 번에 오십 마리의 말을 건넬 수 있는 큰 배가 없으니 세 차례 나눠서 간다고 했다.

“두 번째 배로 강을 건너십시오. 강 건너에 마차를 대기 시켜 놨는데 오르는 척하셨다가 분주한 틈을 타서 강을 따라 내려가시면 됩니다. 후미진 포구에 배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배를 어떻게 알아본다는 말인가?”

초지항이 중랑을 보며 말했다.

“중랑이 알아볼 겁니다. 뱃사공이 삼도문에 있었던 자입니다.”

***

무한 동쪽은 산들이 파도치듯 이어진 산악지대다.

그 산들을 지나면 하남 땅이다.

해가 기울어 어둑어둑한 산길에 한 필의 말이 나타났다.

말 위에 탄 자는 피로 얼룩진 무복을 입은 강소군이다.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에는 여전히 창을 들고 있었다.

피로 물든 창을 쥐고 있는 손에 간간이 경련이 일었다.

흑마대주란 자는 응천대주 우원송보다 한 수 위였다.

흑마대 역시 응천대보다 개개인의 무공이 뛰어났다.

응천대를 천무방의 선봉이라 하나 실상은 끝없이 소모하고 버리는 패였던 듯했다.

흑마대 등의 무력이야말로 진정한 천무방의 주력이었음이 분명하다.

강소군의 오른쪽 옆구리와 왼쪽 허벅지에서 피가 흘렀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왼쪽 어깨 뒤쪽에 박힌 수리검이었다.

수리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냥 뽑아 버리면 피를 멈출 수가 없다.

그러잖아도 피를 너무 흘렸다.

나른하게 졸리고 입술이 타들어 갔다.

강소군은 감기려 드는 눈을 애써 부릅떴다. 졸음도 졸음이지만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마침 길이 계곡과 만났다. 계곡 아래서 물소리가 들렸다.

강소군은 말에서 내렸다.

길가 나무에 말고삐를 매어놓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늦가을 가뭄에 수량이 많지 않았다.

계곡을 따라 약간 올라가다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웅덩이를 발견하였다.

강소군은 엎드려 손으로 떠서 물을 맛봤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물을 마셨다.

깊은 산속 물에 독이 있을 리 없건만 몸에 밴 오랜 습성은 어쩔 수 없었다.

“푸우.”

물을 마시고 그대로 머리를 물속에 넣었다.

차디찬 물에 머리를 담그니 정신이 확, 들었다.

강소군은 등에 맨 보따리를 풀고 손을 뒤로하여 어깨에 박힌 수리검을 뽑았다.

“욱!”

강렬한 고통이 전신을 스쳐 갔다.

온 신경이 일제히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강소군은 이를 악물고 윗옷을 벗었다.

군살 없는 상체 곳곳에 검흔과 도흔, 창상이 있다.

웃통을 벗은 강소군은 그대로 물에 들어갔다.

-풍덩.

겨울이 다가오는 산. 계곡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웅덩이의 맑은 물은 강소군의 옆구리와 허벅지에서 흘러나온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강소군은 물 밖으로 나와 등에 맸던 보따리를 뒤졌다.

작은 목갑을 꺼내서 갈고리 같은 바늘을 찾아 실을 꿰었다.

상처를 살펴보니 허벅지의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옆구리는 꽤 길게 상처가 났다.

흑마대주가 남긴 검상이다.

조금만 깊었더라면 간을 찔릴 뻔했다.

강소군은 보따리에서 가죽으로 만든 물주머니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물주머니에 담긴 건 술이었다.

술이 넘어가며 목구멍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곤 술을 상처에 들이부었다.

“…!”

매번 겪는 아픔이지만 여전히 고통스럽다.

누가 고통에 둔감해진다고 그랬던가?

강소군은 고통을 겪을수록 몸과 마음이 깨져 이제는 작은 고통도 두려웠다.

적 앞에서 필사적이 되는 것도 더 이상의 고통을 겪지 않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신경 때문에 제멋대로 벌벌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꿰맸다.

옆구리와 허벅지의 상처는 꿰맸으나 수리검이 박혔던 어깨는 금창약 가루를 뿌리는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치료한 강소군은 보따리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피로 범벅이 된 옷가지는 둘둘 말아서 버렸다.

상처를 수습하고 일어서 일어서다 문득, 옆에 기대어 놓은 창이 눈에 들어왔다.

강소군은 피로 벌겋게 물든 창을 물로 씻었다.

그런데 물이 빠지지 않는다.

창대는 붉은 피를 빨아들여 원래 벌겋게 칠한 것처럼 보였다.

강소군은 물가에 주저앉아 창을 살펴보았다.

‘평범한 창이 아니다.’

연성결이 창을 건넸을 때 잠시 주저했던 것은 창대를 칠하지 않은 걸 보고 훈련할 때 쓰는 창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직접 골라 준 성의 때문에 받았는데 막상 쓰면서 그게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정말 훈련용 창이었다면 벌써 몇 번이고 부러지거나 갈라졌을 것이다.

창은 강소군의 내력을 감당하고 적의 도를 튕겨냈다.

적당한 길이에 평범하게 만든 창이다.

무게 중심이나 탄력, 그리고 손에 잡히는 느낌까지 모든 게 적당했다.

검이나 도처럼 창도 균형을 갖춰 만들기 쉽지 않다.

연성결도 평범한 창이 아님을 알았기에 내주었을 것이다.

연성결이 떠오르니 자연 삼도문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 이어졌다.

‘어찌 되었을까?’

사실 응천대와 흑마대가 막는다 해도 돌파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그들과 부딪혀 혈전을 벌인 건 나름 삼도문을 생각해서였다.

어찌 됐던 연화심 덕분에 살았다.

게다가 황의채와 삼도문에서 초빙한 의원들이 아낌없이 약을 썼기에 예상보다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고질화된 내상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당장의 운신은 가능하게 된 것만으로 천만다행이었다.

강소군은 그 값은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천대를 박살내고 흑마대를 궤멸시켰으니 삼도문도 나름 방도를 찾았을 것이다.

‘이제 다시 볼 일이 없겠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연화심의 큰 눈이 떠올랐다.

지난해 백륭사에서 봤던 맑은 눈빛.

그리고 올 가을 내내 자신을 따라 다니던 불안하고 근심 어린 눈빛.

연화심의 눈빛이 점점 더 커지더니 그를 감싼다.

검은 눈동자 속으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다.

-히히힝!

매어 둔 말이 우는 소리에 깨었다.

깜박 졸았나 보다. 어느새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산짐승일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산짐승이라면 말울음 소리가 계속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뚝 끊겼다.

그새 적이 따라온 모양이다.

***

구연강은 삼도문 대청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의원이 등 뒤에 길게 난 상처에 금창약을 뿌리고 하얀 천을 감았다.

육순의 나이임에도 구연강의 벗은 상체는 강건한 근육으로 덮여 있다.

통나무처럼 굵은 허벅지에도 하얀 천이 감겼다.

“다 됐습니다.”

의원이 천을 감고 물러나자 하인이 옷을 들고 왔다.

윗옷을 입고 장포를 걸치다 대청 탁자에 놓인 술병과 바닥에 깨진 잔들을 보았다.

연성결이 그의 의형제들과 마지막 나눈 술잔이리라.

구연강의 시선이 대청 밖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삼도문주 연성결과 그의 의제라는 이들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긴 싸움이었다.

세 사람은 끈질겼고 그럴만한 무공을 지녔다.

특히 연성결의 회천십이도는 대단했다.

등 뒤를 가로지른 도상은 연성결이 남긴 것이다.

척무량의 반월쌍도 역시 허벅지를 그었다.

황의채가 찌른 검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저 연무장 차디찬 땅에 누워 있는 것은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이 절로 떠올랐다.

연성결의 도를 쳐내고 척무량을 좌권으로 밀쳐내는데 황의채의 검이 옆에서 찔러 왔다.

자신의 중검을 내밀어 황의채의 검을 튕겨내려다 주춤했다.

황의채의 검이 세 자루로 나뉘어 다가온 것이다.

‘그의 산검(散劍) 공부가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당했을 것이다.’

구연강은 세 자루의 산검 중 두 자루를 튕겨냈다.

황의채의 마지막 일검을 튕겨낸 것은 암중에서 보좌하던 천살이었다.

황의채의 산검이 네 자루였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 순간이 떠오르자 구연강은 탄식하였다.

‘삼도문에 이런 고수들이 있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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