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대문 앞에는 척무량과 황의채를 비롯해 화천대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대문을 열어 달라더니 그냥 나갔습니다.”
초지항이 말했다. 더 덧붙일 것도 없다는 황당한 표정이다.
-쨍!
“으악!”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담벼락 너머 멀리서 들려 왔다.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망루에서 바깥을 살피던 무사가 소리쳤다.
연성결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싸울 준비를 하라고 해라. 산동삼호에게도 소식을 전하고.”
북이 울리고 화천대원 몇몇이 바삐 오갔다.
순식간에 삼도문 무사 전원이 연무장에 집결하였다.
화천대원 이십여 명을 포함해도 오십 명이 채 안 된다.
“연 문주! 무슨 일입니까?”
산동삼호가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강 협사가 장원을 나갔네.”
“장원을 나가다니요?”
“떠난다고 혼자 나갔는데 적과 싸우는 모양이네.”
연성결이 장무강에게 급히 상황을 설명하고는 초지항에게 명령했다.
“초지항! 대문을 열어라!”
초지항이 대문을 지키고 있는 무사들에게 소리쳤다.
“대문을 열어라!”
-쿠쿠쿵. 끼이익.
커다란 대문이 열리며 바깥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
삼도문에서 삼백 리 떨어진 들판.
천무방 귀영대와 천성대가 야영을 거두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천무방 군사인 신기수사 조개량의 군막.
귀영대주 우참이 직접 들어와 보고하였다.
“척후들의 보고로는 이상 없습니다. 오시경 삼도문에 도착할 겁니다.”
천하사패 천무방주 구연강이 직접 출정하였다.
구연강이 친정을 하겠다고 했을 때 천무방 장로들이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다.
하지만 천무방주의 입에서 한 번 명이 떨어진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구연강의 친정에 천무방의 두뇌 신기수사 조개량이 바빠졌다.
구연강은 흑마대를 선발로 보내고 귀영대와 천성대를 직접 끌고 가는 중이다.
무한의 그리 크지 않은 문파 삼도문을 치는데 응천대와 흑마대, 귀영대와 천성대 등 천무방의 무력대가 넷이나 투입된 것이다.
“으음. 적은 오십 명이라고 했다. 도착하기 전 건량으로 점심을 먹고 가자마자 바로 친다!”
조개량은 속전속결을 택했다.
삼도문이 문제가 아니다. 수장이 죽은 요천루는 몰라도 대정무각과 도룡회의 움직임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사패가 암중에서 서로 견제하기를 몇 년. 자칫 틈을 보이면 급습을 당할 수도 있다.
천무방의 무력 12대 가운데 3대는 대공자 구양조가 인솔하여 귀주를 공략하고 있다.
구연강이 삼도문을 친다고 4대를 끌고 나왔고 암천대가 일대주를 잃고 정비 중이니 방을 지키는 무력은 4대라고 봐야 한다.
장로와 호법들이 있기는 하지만 혹시 몰라 조개량은 우려하였다.
조개량이 알아본 바로 연성결과 의형제 둘, 그리고 산동삼호와 이름 모를 젊은 고수만 제거하면 바로 삼도문을 접수할 수 있었다.
삼도문을 병합하면 천무방은 무한을 통해 장강으로 진출할 수 있다. 삼도문의 상권은 그 기반이 될 테고 그러면 지금보다 배는 세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무한을 차지하면 무림 일통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조개량의 눈빛 깊숙한 곳에 섬광이 스쳤다.
***
우원송이 몸을 솟구치면서 언월도를 사선으로 쳐올렸다.
강소군이 높이 허공으로 솟아 공중제비를 돌며 솟구쳐 올라오는 우원송의 머리를 창으로 내리찍었다.
-쇄애액!
우원송이 말 등을 차며 몸을 돌려 언월도를 쓸어 올리던 기세 그대로 강소군의 허리를 자르려 했다.
-쐐애액!
강소군의 창이 회전을 하며 언월도를 튕겨내고 그대로 우원송의 옆구리에 꽂혔다.
-콰직!
우원송이 눈을 부릅떴다.
왼쪽 아래 갈비뼈가 박살이 났다.
우원송은 끔찍한 고통과 함께 허공에서 그대로 떨어졌다.
-쿵!
“크윽!”
충격과 함께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창도룡이라는 별호를 얻기까지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언월도 아래 피를 뿌렸다.
‘오늘은 나인가?’
보다 강한 사람을 만나면 목숨을 내줘야 하는 것.
그것이 칼 든 자의 운명이다.
“대주님!”
“대주님을 구하라!”
응천대 조장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세 사람이 강소군을 향해 칼을 휘둘렀고 두 사람이 창을 맞고 떨어진 우원송을 끌어냈다.
뒤이어 응천대원들이 달려들었다.
난전이 벌어졌다.
-쿠쿠쿵!
삼도문의 거대한 대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아…!.”
“...!”
연성결 등은 장원 밖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광경에 입이 딱 벌어졌다.
모두 말문이 막혔다.
조조의 백만대군을 휘젓던 조자룡이 이랬을까.
강소군은 한 자루 창을 미친듯이 휘두르며 응천대원들 사이를 무인지경처럼 달렸다.
-써걱!
강소군의 창이 움직일 때마다 응천대원은 목이 잘리거나 가슴이 뚫려 쓰러졌다.
강소군의 창은 망설임이 없었다. 창의 영역에 있는 자는 여지없이 피를 뿌렸다.
늦가을 바람이 스산한 날이었다.
바닥의 낙엽이 창세에 말려 회오리치며 올랐다가 바람에 분분히 날리니 더욱 혼란스러웠다.
강소군이 가는 쪽마다 응천대원들의 진형이 와르르 무너지곤 하였다.
“대형을 유지하라!”
응천대 조장들이 쉼 없이 독려하며 강소군을 노렸으나 일 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저건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야.”
심마백이 혀를 내둘렀다.
심마백도 창을 쓴다.
창을 쓰는 무인이라면 한 번쯤 꿈꿔 보는 경지.
강소군이 심마백에게 그 경지란 이런 것이다, 라고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거든다고 나서기가 민망하군요.”
척무량이 말했다.
응천대는 우원송이 당하고 맥없이 밀리자 위급신호를 보내 삼도문 주위에 매복하고 있던 대원들을 모았다.
“일각만 버텨라! 흑마대가 오고 있다. 컥!”
말을 타고 연신 대원들을 독려하던 응천대 조장의 목에 창이 박혔다.
콰당!
즉사한 조장이 말에서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그 말에 강소군이 올라탔다.
“이랴!”
강소군이 말고삐를 채어 달렸다.
“잡아라!”
다른 조장 하나가 소리쳤으나 아무도 쫓지 않았다.
아니, 쫓을 수가 없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응천대원에게는 지옥 그 자체이자 영원과도 같이 길게 느껴졌다.
지금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만 수십여 구다.
대주 우원송조차 중상을 입고 생사지경을 헤매고 있다.
응천대원들이 망연자실 서 있는데 삼도문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유사시에 대주를 대신하는 일조장 구화마검 조정평이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구려.”
조정평은 산동삼호를 잡기 직전 연성결과 화천대를 만나 죽을 뻔했다. 간신히 빠져나왔는데 당시 옆구리에 입은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린다.
“응천대의 형세가 어려움을 알고 오신 것이겠구려?”
조정평은 상대가 어려운 틈을 타 겁박하는 걸 비난하였다.
조정평은 속으로 퇴각할 궁리를 하면서 일단 명분을 잡으려 들었다.
지금 삼도문이 도를 뽑는다면 남은 응천대원의 전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응천대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날이 될 것이다.
“우습군. 지금 천무방이 강호의 도의를 논하자는 겐가?”
연성결이 싸늘하게 대꾸하였다.
자신의 안위만이라면 굳이 위기에 몰린 적을 몰아붙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딸과 의제, 그리고 수하들의 목숨이 달렸다.
“일각을 주겠다! 물러가라!”
연성결이 말했다.
조정평이 연성결 등을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응천대, 퇴각한다!”
연성결은 천우신조의 기회가 왔다고 여겼다.
초지항에게 명령했다.
“초지항! 화천대와 문도들에게 장원을 떠날 준비를 시켜라. 최대한 간편하게 꾸려야 한다. 시간이 없다.”
곧바로 산동삼호를 향해 포권을 하였다.
“장 대협. 연씨의 맥을 부탁드리겠소.”
장무강이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성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무강이 결연한 낯빛으로 말했다.
“삼도문 삼형제의 의기는 천추에 남을 것입니다. 후일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산동삼호의 목숨을 걸겠습니다.”
중랑과 연화심도 떠날 준비를 하고 왔다.
연화심은 이번에도 남장을 하였다.
“아버님은?”
연화심은 연성결이 아무런 준비가 없는 걸 보고 의아해하였다.
“이리 오너라.”
연성결이 부르자 연화심이 다가갔다.
“복건으로 가거든 강호는 잊어라.”
연성결이 말하고는 번개같이 연화심의 마혈을 짚었다.
“앗! 문주님!”
중랑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연화심이 눈을 부릅떴는데 연성결은 곧바로 수혈까지 짚었다.
연성결이 쓰러진 연화심을 중랑에게 건네며 말했다.
“지금은 촌각을 다퉈야 한다. 공연한 논쟁으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연성결의 지엄한 명령에 초지항과 중랑도 거역할 수 없었다.
중랑이 연화심을 안고 말에 올랐다.
“문주님! 기다리겠습니다!”
초지항도 눈물을 뿌리면서 말에 올랐다.
“지항아!”
연성결이 초지항의 이름을 불렀다. 초지항이 흠칫, 하였다. 연성결이 품에서 회천십이도의 비급을 꺼내 건넸다.
“회천십이도의 맥은 네가 잇는 것이다!”
“문주님!”
“다시 불러 봐라.”
초지항에게 연성결은 사부와 같은 존재다. 배사지례를 지내지 않았지만 연성결은 초지항을 제자로, 초지항은 사부로 여겨 왔다.
“사부님!”
“오냐!”
연성결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산동삼호가 마상에서 다시 한 번 삼도문 삼형제에게 포권을 하였다.
“부디 보중하셔서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장무강은 말을 마치자마자 말고삐를 채었다.
-히히힝.
말이 크게 울부짖더니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그 뒤로 심마백과 위응환이 따르고 중랑이 연화심을 안고 달렸다.
“가자!”
초지항이 외치자 화천대와 삼도문의 문도들이 이를 악물고 말 엉덩이를 내리쳤다.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삼도문의 문도들이 사라졌다.
연성결은 삼도문 대문을 닫았다.
“술이나 한잔하세.”
연성결이 아끼는 술을 가지고 나왔다.
늦가을 볕이 텅 빈 연무장에 내렸다.
대청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연무장을 내다보는 연성결의 얼굴이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야 마음 편히 적을 맞을 수 있겠구나!”
척무량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생각납니다.”
“하하하. 나도 그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의채가 크게 웃으며 척무량의 말을 받았다.
연성결도 지난날을 떠올렸다.
무한 북쪽 산간에 있던 산적들이 양민을 해치는 일이 일어났다.
연성결은 지나다가 산적들이 저지른 만행을 보고 크게 분노하여 홀로 산을 올랐다.
이십여 명의 산적들과 단신으로 혈전을 벌이는데 마침 척무량이 산적 소굴로 쳐들어왔다.
“뒤이어 자네가 왔지.”
척무량이 황의채를 보며 말했다.
“그때는 혈기왕성하여 겁나는 게 없었지요. 지금은 그러라고 해도 못 할 겁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신으로 산채를 쳐들어 왔다는 인연에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자네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그 산채에서 죽었을 것이네.”
“저 역시 마찬가지였겠죠. 그놈들이 그렇게 강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저 평범한 산적이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무공을 익힌 자들이 많았고 수도 알려진 것보다 배는 되었다.
세 사람은 악전고투 끝에 산적들을 모두 해치울 수 있었다.
그때 일을 다시 돌이키니 감회가 새로웠다.
척무량이 술을 벌컥 마시고는 시원하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 세 형제 중에 그날 한 사람이라도 없었으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연성결이 담담한 미소로 척무량의 말을 받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목숨 빚이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황의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연성결과 척무량의 잔에 술을 따르고 건배를 청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오늘 같이 죽는다 해도 억울할 것 없습니다.”
황의채의 말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세 사람이 모두 일어나 건배를 하였다.